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15)

약속

 

야곱이 외삼촌 라반과 화해하고 하란을 떠났습니다. 형 에서와도 화해하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얍복강에서 이름까지 바뀌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니 야곱 앞에는 장밋빛 융단이 펼쳐져야 할 것 같습니다.

 

벧엘, 하란, 얍복강 그리고 형 에서와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야곱도 한층 성숙해서 “하나님과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의 남은 인생이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인생에 어울립니다.

 

그런데 야곱의 인생이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형 에서와 헤어진 야곱은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로 가지 않고 당시 경제의 중심지라고 추측되는 세겜에 정착합니다.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도시에 상업이 발달해서 돈을 벌고 가족을 돌볼 기회가 많았습니다. 체류 신분을 확보하지 못한 야곱과 그의 가족이 경제적인 이유로 세겜에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루는 레아에게서 난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마을에 놀러 나갔다가 세겜 부족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성폭력을 당합니다. 세겜은 디나를 강제로 추행했지만, 진심으로 디나를 좋아해서 아내로 삼길 원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하몰과 함께 야곱을 찾아와서 디나를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합니다. 부족장과 사돈이 되면 야곱과 그의 가족의 합법적인 체류가 가능해집니다. 괜찮은 제안입니다.

 

하지만, 여동생이 성폭행당한 것을 알고 있는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으면 동생 디나를 아내로 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데, 세겜 사람들을 속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실제로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움직일 수 없을 때, 레아의 아들인 레위와 시므온이 세겜에 가서 사람들을 죽입니다. 여동생 디나를 대신해서 복수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버지 야곱은 말이 없습니다. 나중이 되어서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느냐고 한탄할 뿐입니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31절)라는 구절에서 야곱의 무기력과 야곱 아들들의 분노를 느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벧엘로 가지 않고 세속 도시 세겜에 머물다 생긴 일입니다. 디나 사건을 다루는 본문에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이처럼 세겜은 하나님 부재(divine absence)의 장소였습니다.

 

디나 사건을 겪은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서 그곳에 거주하며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신을 차린 야곱은 이방 신상들과 장신구를 모두 나무 밑에 묻고 벧엘로 향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힘들 때마다 찾아오셨고 약속을 모두 지키셨습니다. 진작에 벧엘로 와서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있어야 할 곳,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