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는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Nicodemus)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백성의 정복자 conqueror of the people”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공한 인물입니다.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했습니다.

니고데모를 70인으로 구성된

입법과 사법 그리고 행정을 관할한 최고 의결 기구였던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봅니다.

 

게다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루살렘 지도자들로 나오지만,

바리새인들은 랍비로 대표되듯이

유대교 안에서 영향력이 무척 컸습니다.

 

2.

예수님 당시 종교적으로/사회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는 니고데모가

밤중에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에 비하면 출신성분은 물론

나이도 훨씬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랍비(스승)라고 부릅니다.

 

신분 격차와 차별이 확실히 존재했던 당시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파격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가 본문에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 추측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이룬 니고데모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장 밑에 있는 고민입니다.

 

3.

저는 지난주일 설교에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영적인 고민이 있었다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공회원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바빴을까요!

 

워낙 바쁜 일상이어서

예수님을 찾아올 정도로 영적인 일이

다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그것도 모르냐?”는

예수님의 핀잔 섞인 말에도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니고데모는 갈급했습니다.

영원한 진리를 향한 갈급함입니다.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에 대한 고민이고 질문입니다.

성경은 니고데모가 답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놓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논쟁할 때,

온건하지만 예수님 편에서 발언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장례에 향품 70파운드를 갖고 찾아옵니다.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선언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결과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놓고 고민한 결과입니다.

 

니고데모의 영성(신앙)을 닮고 싶습니다.

끝까지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것을 두고 고민하고 신앙 안에서 풀어내기를 원합니다.

 

우리 시대의 니고데모가 되기 원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없느니라 (요3:3)

 

 

 

하나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마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4. 3. 7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