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님과 가족들, 나이가 들면서 가까워진 친지들과 이웃들, 그리고 우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돕는 배필 즉 배우자와의 만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모든 만남이 복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좋았던 기억들을 간직하고 좋은 만남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다윗에게도 좋은 만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과의 만남이 눈에 띕니다.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는 기쁨입니다”라는 뜻이니,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정에서 곱고 예쁘게 자랐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비가일을 두고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비가일은 고집이 세고 포악한 남편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름이 나발인데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이 부유한 목축업자였다는 사실 외에 달리 좋을 것이 없어보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을 때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먹거리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들에서 나발의 가축들과 목자들을 지켜준 일이 있었기에 나발이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고약한 마음씨의 나발은 다윗을 비난하면서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400명의 군사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발을 치러 올라갑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입니다. 나발이 괘씸할 수는 있어도 광야에 사는 일개 목축업자에게 그렇게까지 흥분해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별것 아닌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작은 일로 자존심이 상하면 참지 못하고 발끈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을 만나러 옵니다. 여인 혼자서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쳐들어오는 다윗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애원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명 보자기”로 싸서 보호해 주실 테니 먹거리가 없어도 또한 자존심이 상해도 함부로 칼을 들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다윗이 물 맷돌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렸듯이, 하나님께서 물 맷돌로 다윗의 원수들을 쓰러뜨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한 명연설이었습니다. 다윗이 군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은 자신의 가정을 살렸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사소한 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지혜롭게 조언했습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러 가는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숨어있는 동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울도 살려주었던 다윗이 음식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발과 그의 가족을 전멸시키는 것은 졸장부의 행세입니다. 자칫 큰일을 앞두고 창피한 이력을 남길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고귀한 품격을 되찾게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유진 피터슨이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을 놀라게 하여 갑작스럽게 빠져 들어갔던 추함에서 그를 구해 내었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된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추한 마음도 아름답고 고귀하게 변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보고 듣게 하는 만남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선하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되찾게 해 줄 만남을 기대합니다. 귀한 만남이 가져올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꿈꾸면서 새봄을 맞고 싶습니다.(2016년 2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