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