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봄 (4)

  • 여디디야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시고, 자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세심하게 대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외모가 출중했던 사울입니다. 처음 왕으로 세움 받을 때는 왕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수레바퀴 뒤에 숨었는데 전쟁에 승리하고 자신의 영역이 커지면서 안하무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에 보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압을 비롯한 이새의 일곱 아들 가운데 왕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들에서 양을 치는 막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찾아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안목이 돋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이지만, 다윗 역시 그의 왕국이 견고해 지면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 다섯 가지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시편 51편에 있듯이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하게 씻겨 주시길 회개하며 간구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기가 심하게 앓게 되자 다윗은 방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7일 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상심할 것이 두려워서 아이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지만, 다윗은 일어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차려 입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왕궁에 돌아와서 왕업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 가셨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살피시고 돌보셨습니다. 밧세바가 다시 아들을 낳으니 다윗은 그를 “솔로몬 (평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아들을 잃고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의 처지를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사람)”로 부르십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심을 확증하고 그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꼭 맞게 임함을 다윗을 통해서 봅니다.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河-

만남의 기쁨

지난주에는 19년 전 인디애나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함께 교회를 세웠던 옛 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에 다녀왔습니다. 시카고 근교에 정착한 두 분 집사님의 가정이 호스트가 되었고, 시카고, 인디애나, 위스콘신, 오하이오에 정착한 동문들의 가정이 참석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번 모임을 주선한 집사님 가정과 우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내와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공항에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경찰견이 모든 승객의 짐과 몸을 수색하더니 비행기도 지연되었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해서도 아침에 내린 폭우로 비행장이 만원이 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고등학교 동창의 라이드를 받아서 모임 장소에 가니 모두 반갑게 맞이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아이들이 훌쩍 큰 것입니다. 주일 학생이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키가 6피트가 넘는 남자아이가 저를 안아줍니다.

 

함께 나눌 성경 공부도 준비해 갔는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고 업데이트하느라 말씀 전할 틈이 없습니다. 말씀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이 더 다급하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틈을 내서 말씀을 전하지만 자연스레 각자의 삶과 연결되어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저녁 늦게 모임을 마치고 다음날을 기약했습니다.

 

시차를 고려해서 느지막하게 두 번째 날을 시작했습니다. 인디애나와 위스콘신에서 두 가정이 새롭게 참가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이 올 때마다 모임을 접고 그들의 근황을 듣고 마주 앉아 그동안의 삶을 주고받습니다. 요즘은 카톡과 SNS가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같은 장소에서 모임을 하는 것에 견줄 수 없습니다. 웃음꽃이 핍니다. 아이들이 크니 모임을 갖기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재상봉(reunion)모임이 그렇듯이 우리들도 그때 그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함께 교회를 세웠던 일들, 만났던 분들, 함께 나눴던 비전과 잊지 못할 사건들을 추억하면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인디애나 교회는 유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대부분 형편이 풍족하지 않고 앞날이 불확실한 채 학업에 전념하던 때였습니다. 어려울 때 만났던 신앙의 동지들이기에 더욱 각별했습니다.

 

지금은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니 다시 한 마음이 됩니다. 물론, 얼굴이나 모습에 조금씩 연륜이 느껴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연장자인 저의 외모가 가장 변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과 사모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어떻게 참았는지 꼭꼭 싸매어 두었던 신앙과 인생의 질문을 풀어놓습니다. 쉽게 꺼내 놓기 힘든 얘기도 나눕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그 시절 주일예배 마지막에 불렀던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라는 찬양을 손을 잡고 불렀습니다. 모두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습니다.

 

재상봉 모임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렀어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흐트러진 삶을 다시 조율(reset)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만 생각하면 안 되기에 그때 배웠던 신앙을 “씨앗” 삼아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설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아가길 부탁했습니다.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만남의 기쁨을 만끽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시작된 만남이었기에 우리의 재상봉 모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만남의 기쁨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먼 훗날, 현재 제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과도 재상봉 모임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날을 위해서 더욱더 진실하게 목회해야겠습니다. (2019년 7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전도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은

구약성경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성문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아가서)에 속하고,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라는 명칭은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에서 왔습니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코헬렛(Qoheleth)”인데

“모임”이라는 뜻도 있기에 혹자는 “집회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영어표현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솔로몬 왕의 설교를 듣거나,

훗날 백성들이 모여서 솔로몬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2.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하콜 하벨”입니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수증기, 안개, 한숨, 가치 없음, 헛됨”입니다.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헛되다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0)”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아굴의 잠언을 떠올리면 전도서의 주제가  쉽게 이해됩니다.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전도서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에 해당하는 전도서 6장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와 재산과 명예를 다 얻었는데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니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식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언어 습관도 지적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빈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4.

전도서는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줍니다.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훗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7월도 훌쩍 지났습니다.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이룬 것이 없다고

행여나 초조해질 것도 아닙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잘 살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을 누리고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 7: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 7:29)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25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3)

다윗을 찾아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처음 두 장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보기 좋았더라”고 연거푸 감탄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이기에 정성을 기울이셨고 그에 비례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손으로 빚어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어서 생명을 얻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 무화과나무로 수치를 가린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하고 자신의 자리를 넘보았던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과 상관없이 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수줍어하던 사울이지만,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이 그에게 들어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장면입니다. 이새는 물론 그의 아들을 먼저 정결하게 하고 주님 앞에 서길 부탁했습니다.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은 키도 크고 용모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상과 달리 엘리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삼마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새의 일곱 아들을 인터뷰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새에게는 막내아들 다윗이 있었습니다.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다윗은 말 그대로 “꼴찌”였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보겠답니다. 다윗은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형제들의 서열도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막내인 다윗을 찾아내셨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새의 가족들이 하찮게 여기는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니라 막내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돌보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찾아서 돌보시고, 행여나 작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들어 쓰십니다. 작은 것까지 챙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꼭 만나기 원합니다. -河-

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2)

가죽옷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임합니다. 은혜에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유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난 다음에 돌아보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길을 가는 여정이 모두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문과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기에 예정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섭리”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이나 삶의 중심을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돌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돌봄의 최종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12:1) 것입니다. 그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통제하고 뛰어넘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없이 어느 때나 작동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서로의 허물과 수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치, 즉 부끄러움은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그릇 행했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하는 일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시고, 결국에는 이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연약하고 심지어 거역한 모습 가운데도 임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정성껏 빚으신 인간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감을 감사하고 주님의 돌보심을 깊이 경험하는 한 주간 되기 바랍니다.-河-

사모함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시편 말씀은 우리 신앙에 종합 비타민과 같습니다.

 

제가 신앙을

<머리/교리 또는 앎Doctrine>

<가슴/체험 Experience>

<손과 발/생활 Practice>로 설명하는데,

시편 말씀 속에는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지혜를 알려주는 시편이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 탄식함으로 주님께 나가는 탄식 시편,

온몸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결단의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막힐 때

시편을 갖고 기도할 수 있고,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으로 찬양합니다.

시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도 얻습니다.

 

2.

시편 말씀 가운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편42:1)는 구절을 종종 묵상합니다.

 

“갈급함”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라그>는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은 사슴이

살기 위해서 헐떡거리며 물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뜻합니다.

 

물 한 방울이 그립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목을 축이고 싶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오직 물만 생각하고 물이 그립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슴이 헐떡거리며 물을 찾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을 찾는 것에 일치시킵니다.

그토록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3.

우리 삶이 참 바쁩니다.

중요하고 다급한 일들에 쫓겨 삽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추구하고 찾아 나서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당장 필요한 의식주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헐떡거리며 찾아 나설 수 밖에요.

그렇게 우리의 힘을 모두 소진하니 하나님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가외의 것(extra-), 즉 욕심을 버리고, 경쟁심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비켜서면

하나님을 찾고 사모할 여유가 생깁니다.

 

요즘 시대에 우리가 헐레벌떡 찾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의 범주를 뛰어넘는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헐떡거리며 찾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 안에서 다시 시작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시고, 책임지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우리가 추구할 생명길입니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 체험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모함이 실제로 힘이 있고

우리 삶을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간증할 만큼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시편 107:9)

For he satisfies the longing soul,

and the hungry soul he fills with good things.(Psalms 107:9)

 

하나님 아버지

당신을 향한

간절함, 갈급함, 갈망함을 회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