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1)

아버지와 아들

 

지난 두 달여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은혜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께 깊이 스며들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으로 우리 삶을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 힘으로 가정과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길 원했습니다. 자신들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을 가슴에 품고 돌보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랐습니다.

 

9월 한 달 동안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 동생이 돌아왔을 때 화를 내면서 아버지의 입장을 거부했던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빈손으로 돌아온 둘째를 사랑으로 맞아 주신 아버지 –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하면 그 제목처럼 아버지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 헬라어 <아가페>로 표현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탕자의 비유 속에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돌봄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탕자(prodigal son)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지루했고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열심히 아버지 재산을 돌보는 형이 껄끄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분을 요구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모은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 재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상속분을 미리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재산을 갖고 가서 어떻게 사용할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어떻게 하든지 끝까지 그를 기다리시고 돌보실 참입니다. 둘째가 잘났거나, 재산을 갖고 가서 성공했을 때만 그를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일을 벌이든지 상관없이 둘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재산을 팔아 주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둘째에게 자신의 재산을 팔아준 아버지만큼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줄 아시면서도 재산을 팔아 주신 것은 우리의 잘못을 책임지시겠다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한 주간 오늘 비유 속의 하나님을 이모저모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8)

돌보는 교회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보는 교회>에 맞춰서 지난 7월부터는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 안에 충분히 임했을 때 자연스레 교회와 세상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정성껏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에서 아담의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드시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당혹스럽고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양치기 목동 다윗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챙기고 돌보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큰 죄에 빠집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만, 그가 치를 죗값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둘째 솔로몬을 주시고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다윗을 위한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를 뛰어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악독한 왕비의 고향인 시돈으로 가서 한 과부의 돌봄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에 갔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려는 과부를 만나서 그의 돌봄으로 가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돌보셔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사르밧 과부를 찾으신 하나님의 돌봄이 특별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한 니느웨를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성경 전체에서 특별했습니다. 아무리 니느웨가 회개해도 그곳 백성은 물론 짐승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도 돌보셨습니다. 요나는 물론 우리의 선입관까지 뛰어넘은 돌봄입니다. 우리의 돌봄의 넓이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느꼈습니다.

 

시편 142편 말씀은 돌봄을 실천하려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원통함과 상한 심령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주의 구원을 볼 수 있고, 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도 돌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교회는 물론 세상과 나누기 원합니다 -河-

개근상

저는 국민학교 출신입니다. 1996년 3월부터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국민학교는 ‘천황의 국민’이라는 뜻의 일제 잔재여서 바로잡았답니다. 제가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이왕이면 초등학교로 정정해서 부르겠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께서는 우등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근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등상이야 공부 조금 잘하면 탈 수 있지만, 개근상은 건강과 성실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초등학교 6년 동안 개근상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일 년에 3-4일은 감기와 편도선염 등으로 학교를 빠졌습니다. 5학년 때는 수학여행후에 류마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와서 반년 가까이 아예 학교를 쉬었습니다. 그렇게 초등학교 내내 개근상 근처에도 못 갔습니다. 대신 중학교와 고등학교 6년은 개근했습니다. 부모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 주셨고 저도 커가면서 몸이 건강해진 덕분입니다. 사실 사고뭉치들 빼고 중고등학교는 대개 개근합니다. 코흘리개 꼬마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입학해서 초등학교  6년을 내리 개근하는 것이 훨씬 대단하지요!

 

우리 교회에는 팔순이 넘었거나 가까우신 권사님들이 꽤 계십니다. 연세가 드시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으신데, 주일마다 꼬박꼬박 개근하십니다. 출타하시거나 특별한 일이 있으면 미리 알려주십니다. 교회 일에 관여하거나 나서지 않으시고 뒤에서 젊은이들을 응원하실 뿐입니다. 새로 오시는 분들이 보면,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시는 조용한 권사님들이십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주일예배에 개근하신 권사님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왕 시작했으니 한 가지만 더 교회를 자랑하겠습니다. 8월이 되면 광복절 기념 북가주 배구 대회가 산호세에서 열립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 야외 예배와 겹친 작년을 빼고 3년 연속 참가했습니다. 서너 번 주일 오후에 모여서 연습을 했는데, 젊은 집사님들의 열의가 대단했고 우승은 못 해도 부끄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회에 참가해보니 모든 팀이 관록도 있고 우리보다 훨씬 잘했습니다. 한 세트만 이기고 네 경기를 전패하고 왔습니다. 그래도 여선 교회가 준비한 근사한 점심을 먹고 교회 피크닉처럼 즐겼습니다.

 

이듬해 참가한 대회에서도 같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실력이 조금 늘어서 비등한 경기를 조금 더 했을 뿐입니다. 웬만한 교회는 두 번 참가해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하면 포기한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젊은 집사님들은 올해 세 번째 다시 도전했습니다. 교회 근처 배구장에 가서 그곳을 찾는 고등학생들과 함께 대여섯 주간 연습했습니다. 물론 선수로 참가하겠다는 분들도 바쁘다 보니 참석률이 들쑥날쑥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경기를 치르면서 손발이 맞아간다고 했을까요! 비교적 열심히 준비했건만, 올해 역시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듀스까지 가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경기가 조금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마음껏 대회를 즐겼습니다. 여선교회가 준비한 메밀국수와 김밥을 먹는 것만도 행복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년에도 참가할 것 같습니다. 키가 큰 청년들도 교회에 많아져서 평소에 조금만 연습하면 한두 경기는 승리할 것 같지만,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젊은 집사님들이 배구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승리보다 꾸준히 참가하는 개근이 중요함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이래 개근상에 목말라하는 저에게 커다란 위로요 도전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열심히 잘해서 상을 타는 것보다 개근하듯이 꾸준히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더 귀합니다. 변덕스러운 신앙, 대회 우승처럼 큰 것만 추구하는 신앙, 남에게 보이고 인정받으려고 과시하는 신앙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신앙이 최고입니다. 올해도 이제 넉 달 남았습니다. 때로는 하루하루 사는 것이 기적일 만큼 주어진 삶이 무겁습니다. 열심히 산 것 같은데 손에 든 열매가 초라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남은 한 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개근상을 향해서 열심히 달려갑시다.(2019년 8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나님의 돌봄 (7)

다윗의 동굴 기도

 

<돌보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돌봄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돌봄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듯이, 우리의 돌봄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 가운데 세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돌봄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2편에는 다윗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사울의 시기와 질투 속에 10년 이상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사울은 집요하게 다윗의 목숨을 노렸고 다윗은 동굴에 숨는 것은 물론 미친 척도 하고, 때로는 이웃 나라에 몸을 숨기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돌봄을 더 크게 느낍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서 느낍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다른 것을 돌아볼 틈도 없이 하나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른 이에게 기도를 부탁할 겨를도 없습니다. 4절에 있듯이 다윗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다윗을 돌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와서 단독자로 기도할 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도 하나님 앞에서 차근차근 진술합니다. 육체와 마음만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도 지쳤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도 힘겹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어려울 때 피할 곳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피난처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말 그대로 깜깜한 동굴에 피해 있으니 다윗에게 하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분깃(몫)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견딜 수 없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면서 살아야 할 인생입니다. 피난처되시고 분깃되시는 하나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돌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할렐루야! -河-

해방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미국 시간으로

조국의 해방을 기억하는 광복절입니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 해방의 기쁨을 노래한 광복절 노래의 첫 소절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살던 땅이지만

해방되고 다시 만져보는 흙은 우리 땅이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의 바닷물도

해방되고 나니 덩달아 춤추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태평양 너머에서 펼쳐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나라는 운동경기만 해도

승부욕이 치솟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감정이 앞서는데

예전에 풀지 못한 숙제까지 겹쳐서 나타나니

분위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매듭은 풀고

앞으로 나갈 일들은 화해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길 바랄 뿐입니다.

 

2.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서 61장 1-2절 말씀을 읽고 그 뜻을 풀어 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여기서 “자유”가 곧 해방입니다.

예수님은 포로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에 포로가 되고

그릇된 습관과 악한 유혹에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실제로

억울하게 포로가 되었거나

억압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임하길 바라십니다.

 

우리나라가 36년 일제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것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맞물립니다.

 

3.

광복절을 맞으면서

아직도 풀지 못한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의 마음과 삶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은혜의 해(희년,jubilee)가 선포되길 바랍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고

잘못한 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보상하며

문제를 푸는 것이 도리요 상식이니

생떼 쓰지 말고 당사자가 나서서 풀기 바랍니다.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미국에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여전히 이런저런 일들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외부의 세력이 아니어도

육체의 질병, 나쁜 습관, 우울, 세상 염려, 미래의 불안 등에

억눌리고 포로가 된 분들도 많습니다.

그분들께도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복음이 임하길 바랍니다.

 

행여나 참빛 식구들을 괴롭히고 억누르고

포로로 삼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복음의 능력이 그 위에 임하고 자유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누가4:18-19)

The Spirit of the Lord is up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oclaim good news to the poor. He has sent me to proclaim liberty to the captives

and recovering of sight to the blind, to set at liberty those who are oppressed (Luke 4:18-19)

 

하나님 아버지

은헤의 해,

자유케하는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5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6)

요나와 니느웨

 

구약성경 요나서는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당시의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왕에게 들리니 왕은 조서를 내려서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 물도 마시지 말고 회개의 자리로 나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폭력과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은 줄을 누가 알겠느냐”(9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니느웨의 회개는 백성으로 시작해서 왕까지 올라간 독특한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니느웨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취소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회개입니다. 개인적인 회개도 중요하지만, 국가 또는 공동체에 닥치는 재앙을 놓고 온 백성이 함께 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려던 심판을 취소하신 것 자체가 특별한 일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분노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간신히 살아난 요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어도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만 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방 나라 니느웨는 하나님 구원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니느웨가 살아나면 자신은 죽는 편이 낫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겠다며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습니다. 햇볕이 따가웠습니다. 그때 박넝쿨이 나와서 그늘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이번에는 벌레가 나와서 박넝쿨을 갉아 먹었습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에도 미련을 갖는데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있는 12만 명의 사람들과 가축을 돌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매우 파격적인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지난주 사르밧 과부에 이어서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가 생각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독점하려던 요나와 진정으로 회개한 니느웨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이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돌보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넘어서 돌봄을 실천하기 원합니다.-河-

돈 키호테

좋은 아침입니다.

 

1.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무모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한 요즘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커다란 비중을 두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느냐”는

조소 섞인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하나님 믿는 것 아니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현실성이 있고 과연 실익이 있는지 의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선과 악, 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구분없이

뒤죽박죽 섞여서 복과 화가 발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임하는 복과

반대의 경우 임한다는 저주가 작동하지 않으니

우리 마음이 답답하고 무겁기 마련입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시끄럽습니다.

미국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확인된

총격 사건이 수일이 멀지 않게 발생합니다.

숭고한 희생자들의 숫자가 점점 쌓여가는데

정치권은 손을 놓고, 투표에서 이길 궁리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제각각 자신이 옳다고 말하고

상대방을 향해서 “가짜(Fake)”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지구 온난화, 핵무기를 비롯한 전쟁의 위협,

여전히 계속되는 빈곤과 식량, 차별 등

힘을 합쳐도 풀기 힘든 과제가 산적해 있는데

서로의 잇속을 챙기고 있으니 우리 같은 민초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뿐입니다.

 

지난주 목요 서신에 이어서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3.

미국에 올 때 아이들이 갖고 온  <돈 키호테>를 읽었습니다.

세르반테스의 긴 소설을 어린이용으로 아주 짧게 요약한 책인데

그래도 흥미롭습니다.

 

돈 키호테는 <양반/Sir 키호테>라는 뜻입니다.

스페인 시골에 기사 소설을 워낙 많이 읽고

스스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정의의 기사로 나선

돈 키호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로시난테라는 말,

정의와 평화의 세상이 오면 한자리를 주겠다는 말에

선뜻 따라나선 시골 농부 산초판사,

그리고 돈 키호테가 맞이하는 부조리한 세상.

 

풍차와 싸우고, 목동들에게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지고,

그래도 모든 사람에게 임할 자유와 평등, 정의의 세상을 꿈꾸는

돈 키호테의 행적이 때로는 불쌍해 보이고, 위대해 보이고,

지나칠 만큼 엉뚱해 보입니다.

 

돈 키호테가 인기를 끌던 스페인에서는

길가에 앉아서 울고 웃으며 돈 키호테를 읽었다고 했듯이

왠지 모를 시원함과 작은 희망도 발견합니다.

 

4.

때로는 돈 키호테처럼 무모해 보일 정도의 신앙을 갖고 싶습니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피를 흘리며 매를 맞고 내쳐지면서도

소신껏 자신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 돈 키호테>말입니다.

 

복잡하고, 잇속에 빠르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말하는 요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무모할 정도의 용기!

 

2천 년 전,

예수님도 그 길을 가셨기에 우리도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이 신앙의 길,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실

참빛 식구들을 응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9-10)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Mt 5:9-10)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살려는 참빛식구들과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