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봄 (1)

  • 토기장이 하나님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돌보는 교회”입니다. 요즘 세상은 자기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돌보는 것보다 내 것을 챙기고 내가 행복한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의 도움을 구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에게 향하길 바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자세로 살아가니 세상살이가 각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성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억지로 또는 의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경험하면 저절로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 사랑으로 확대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돌보며 삶 전체를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새해 첫 달에 함께 나눴던 말씀의 요약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돌보는 삶을 사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가족, 참빛 식구들, 이웃과 세상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셨을 것입니다. 이제 하반기에도 돌봄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이번 달에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돌봄을 살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기 원합니다.

 

창세기 두 번째 장인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시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장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웅장하고 조화로운 우주의 창조를 알려줍니다. 반면에 창세기 2장은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4절)라는 말씀이 뜻하듯이 이 땅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을 경작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세상을 관리할 의무와 특권을 아담에게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는 장면이 흥미롭습니다. 먼지(dust)라고 직역할 수 있는 땅의 흙을 빚어서 아담(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다마”이니 “아담”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땅, 아다마>에서 먼지를 취해서, 거기에 물을 묻히시고 <아담>을 정성껏 세심하게 빚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토기장이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세심하게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정성껏 빚어서 만든 걸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돋보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하셨듯이 선한 일을 하라는 의미와 목적도 부여하셨습니다(엡2:10). 다음 한 주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와 사랑으로 살기 원합니다.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河-

독립 기념일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243번째 맞는

미국의 독립 기념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독립 기념일(4th July)은

불꽃놀이를 하는 날,

여기저기서 큰 세일을 하는 날,

무엇보다 하루를 쉬는 휴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립 기념일은 말 그대로

미국이 영국의 통치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우리에게도 익숙한 동인도 회사의 결손을 미국과의 무역으로 보충하고,

그러면서도 미국 대표단이 영국 의회에 참가할 기회를 차단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은 자치의회를 구성해서

1776년 7월 2일 필라델피아에 모여서 동부 13개 주의 독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고

이틀 후인 7월 4일에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 후로도 독립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영국에 완전히 승리하고(1781년)

1783년 파리에서 조약을 맺음으로 완전한 독립이 가능해졌습니다.

 

2.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5인이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이 미국에 가한 학정 등을 조목조목 고발하면서 독립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서문의 첫 문장입니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확실한 권리를 부여 받았으며, 그 안에는 삶, 자유 및 행복의 추구가 포함됨을 자명한 진리로 인정합니다.

 

독립선언서에는

영국을 고발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영국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억제한 것입니다.

요즘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규제안이 극성인데

미국의 건국 정신에 기초해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뒷얘기로

영국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노예제도의 거부를 독립선언서에 포함하려 했지만,

전원 일치의 동의를 얻지 못해서 누락시켰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노예제도는 그로부터 87년 후인 1863년 1월 1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3.

독립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살고있는 미국을 세웠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갖고 있던 정신을 돌아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경적인 건국이념은 아니지만

그 근저에 기독교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근거를

창조주 하나님에서 찾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독립 기념일을 맞으면서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평화롭고 조화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길 바랍니다.

 

휴일과 축제 분위기에 취할 것이 아니라

미국 독립의 처음 정신과 선조들의 투쟁을 되새겨 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미국은 물론 온 세상에 강물처럼 흘러 넘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Gen 1: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미국 땅이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을 갖추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4이-메일 목회 서신)

 

 

 

 

용서 (5)

용서와 화해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은 용서를 넘어서 화해에 이르는 여정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요셉이 아버지는 물론 형들까지 그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것을 가족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그 꿈을 마음에 두었지만, 형들은 도리어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게다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하루는 요셉이 아버지 심부름으로 들에 있는 형들을 만나러 갔는데 요셉이 오는 것을 본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창37:19)고 말하면서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가 유다의 중재로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들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집트에 팔려 간 요셉은 바로왕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집안일을 총괄하는 청지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를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를 뿌리쳤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감옥 생활도 열심히 했습니다. 바로왕의 신하의 꿈을 해석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서 바로왕의 이상한 꿈도 해석해 주고, 결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해준 바로왕의 꿈처럼 이집트와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으로 고생하던 야곱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열 명의 아들을 이집트에 보냅니다. 요셉이 총리로 있는 곳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쉽게 알아보았습니다. 요셉의 꿈대로 형들이 그에게 절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서둘러 드러내지 않고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밟습니다. 형들을 이집트를 정탐하러 온 첩자로 몰아붙이고, 아버지 야곱과 자신의 친동생 베냐민이 살아있는지도 캐묻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사흘 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시므온 한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가서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요셉이 자기 동생인 것을 알지 못한 형들은 그제야 살려달라는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먹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후회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결국, 막내 베냐민를 이집트에 데려왔습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이 다른 방에 가서 목놓아 울 정도로 반가움과 서러움이 교차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분노하고 슬퍼하면서 용서의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평온을 찾았을 때 형들 앞에 나가서 자신이 그들이 팔아먹은 요셉임을 밝힙니다. 그때 했던 요셉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형들을 용서하고 화해한 요셉을 통해서 용서의 최종 목적지가 화해임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가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

온순한 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양극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흑백논리가 설득력을 갖고, 흑이든 백이든 한쪽을 취할 것을 강요합니다. 중간에 있으면 회색지대라면서 좌우 양쪽에서 협공을 시작하니 어느 한쪽에 속하는 것이 도리어 마음 편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화, 협력, 상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양쪽이 혈안이 되어서 싸웁니다. 함께 뜻을 합쳐야 할 공동선(共同善)의 이슈를 갖고도 상대방을 깎아내립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와 태도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치인들이 양극화를 주도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을 소신껏 주장하는 것을 뒤로 한 채 상대방을 깎아내리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무조건 반대하고 보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외도를 해도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요! 이 말속에는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배려를 찾아볼 수 없는 극도의 이기주의가 들어있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양극화 현상은 더욱 깊어 갑니다.

 

정치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끔 한국에서 방영되는 예능프로그램을 시청하다 보면, 예전에는 방송에서 금지될 법한 용어나 말투가 난무합니다. 조용하고 온화하게 얘기하는 사람들의 말은 편집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출연자의 말이 자막과 함께 전파를 탑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말이 남을 비난하거나 상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식으로 방송 분량을 확보합니다.

 

물론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구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변하는 세상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그래도 방송에서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리거나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거친 표현을 마다치 않는 인기인들을 보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식의 방송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아 씁쓸할 때도 있습니다.

 

인간관계를 알려주는 책에서 “급소를 찌르는 말을 삼가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극단적인 말은 끝까지 마음에 품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급소를 찌르는 말로 상대방을 무너뜨렸다고 통쾌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부메랑 법칙을 기억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격언도 기억합니다. 자칫 자신도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잠언에서는 온순한 혀를 생명 나무라고 했습니다. 생명 나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과 마지막인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그리고 잠언에만 등장합니다. “온순한”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마르페>는 “치료하다<라파>”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여호와 라파(치료하시는 하나님)”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이처럼 온순한 말이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살립니다. 당시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온순한 말속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말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심으로 폭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니 제자들이 각 민족의 말로 복음을 전하고 바벨탑 이래 갈라진 언어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말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성취, 다양한 사람까지 하나가 되게 하는 조화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거친 말을 사용하고,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면서 자기주장을 펼칩니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 인상 찌푸리는 말도 서슴없이 사용합니다. 말로 내 편과 네 편을 가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점점 양편으로 나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해도 아름답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합니다. 사려 깊은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배려합니다. 온순한 혀가 생명 나무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 사용이 세상을 밝고 맑게 만드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2019년 6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시편묵상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이

시편을 지나고 있습니다.

 

150편으로 이뤄진

시편은 성경의 한 가운데에 위치합니다.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하루 평균 석 장씩 읽는 성경 통독에서는

두 달여 시편을 읽는 동안

뒤처진 분량을 따라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2.

시편은 구약성경에서 욥기 다음에 위치하고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함께 성문서에 속합니다.

 

욥기는 하나님 법칙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고

의인이 고난 받는 세상에 대한 고발이고 고민입니다.

얼기설기, 좌충우돌, 뒤죽박죽의 세상을 잘 반영합니다.

 

시편은 그래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함을 깨우칩니다.

시편에는 말씀, 기도, 찬양, 지혜가 골고루 들어있고

각 장의 분량이 짧아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잠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을 선포하고

가정, 왕궁,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알려줍니다.

 

전도서는 삶의 좌표를 끝(죽음)에 갖다 놓고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인생인지 알려줍니다.

세상과 인생 자체에 지나칠 정도로 큰 미련을 갖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에 감사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할 것을 요청합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노래입니다.

연인의 깊고 달콤한 사랑처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친밀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3.

시편에는 다윗의 시가 많아서

혹자는 “다윗 오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삶과 연결해서 노래하는 시편들이 절반에 가깝습니다.

 

다윗의 탄식은 이스라엘은 물론 우리의 탄식입니다.

“언제까지입니까(How long)?”

“왜 나입니까 (Why me)? “도와주세요” 등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과 시편의 저자는 탄식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감사 시편에서는

무조건 두루뭉슬하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르고, 감사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지혜 시편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삶을 조목조목 알려줍니다.

시편의 첫 번째 말씀이 지혜 시편인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밖에도 메시아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고하고

감사와 더불어 호흡이 있는 자들은 다 나와서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부탁합니다.

 

4.

기도가 힘들 때는 시편 말씀을 읽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하고 싶을 때도 시편 말씀을 갖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인 찬양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시편 말씀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예배 안내서입니다.

 

시편은

신앙의 깊이를 더하려는

참빛 식구들께서 꼭 가까이할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라 (시편 73:25-26)

Whom have I in heaven but you? And there is nothing on earth that I desire besides you.

My flesh and my heart may fail, but God is the strength of my heart and my portion forever.(Ps 73:25-26)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게 하시고

시편 말씀의 은혜에 깊이 잠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7이-메일 목회 서신)

 

 

용서 (4)

우리의 용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서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성미가 급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전에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스스로 답변했습니다. 베드로나 당시의 관습상 일곱 번도 꽤 많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세 번 정도 용서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엄청난 금액입니다. 상황을 파악한 주인은 종에게 갚을 능력이 없으니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능한 만큼 변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종이 엎드려서 모두 갚을 테니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사정합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이 딱하게 여겨서 큰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 큰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천문학적인 빚을 탕감받은 종이 밖에서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석 달 정도 일하면 갚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런데 주인에게 큰 빚을 탕감받는 종은 자신의 것에 비하면 아주 조금 빚을 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고발해서 감옥에 가둡니다. 이것을 주인이 알게 됩니다. 주인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던 종을 불러들이고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주인이 한 말은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3절)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킬 것입니다. 큰 빚을 탕감받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죽을죄에서 살아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빚을 대신 갚아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를 입었다면, 자신에게 손해를 입힌 이웃을 너그럽게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야박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웃이 있다면 그를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해서 받아주고, 그의 잘못을 없애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체험한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무한대로 베풀어주신 용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용서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그대로 적용하기 원합니다. -河-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버에서는 2023년에

날아다니는 택시를 운행하겠다면서

6월 초 그 모습을 공개했습니다.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겠지만

이러다가 영화 스타트렉에서 보던 세상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지 의아해집니다.

 

때로는 인류문명이 적당한 속도로 발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

땅따먹기하면서 놀던 옛날도 그립습니다.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때때로 고민이 깊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이

구식 취급 받을 것 같은 위기의식도 듭니다.

 

2.

예전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니

한 손에 성경을, 다른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 몸 어디에 신앙을 간직하는 것이 좋을지

저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한 손에 신앙을 들고 다른 손에 세상일을 쥐고 살면

워낙 빨리 변하는 세상 때문에

신앙을 들고 있는 손이 뒤에 쳐질 수 있습니다.

 

신앙을 한쪽 발에 두고 산다면,

세상을 쫓아가려는 다른 쪽 발에 비해서

신앙을 간직한 발이 따라가지 못하면 큰 부상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을 머리에 둔다면 어떨까요?

자칫 세상을 쫓아가려다가 신앙을 제쳐 놓거나

신앙을 생각하다가 역시 세상에서 뒤처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서 신앙을 어디에 간직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요?

우리 각자의 “심장(heart)”에 두는 것이 제일 좋아 보입니다.

 

우리 몸에서 심장은 일정하게 박동합니다.

성경에서도 심장은 생명을 간직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심장에 간직하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리듬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장에 우리의 신앙을 간직한다면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할 것입니다.

 

3.

우리는 정말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살아갑니다.

세상에 뒤처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올 정도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랑”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도 없습니다.

 

사랑, 생명, 그리고 신앙이 한꺼번에 만나는

우리 마음 한가운데 주님을 모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세상에 끌려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칫 세상에 빠져들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챙기지 못하는 것도 조심할 일입니다.

 

행여나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각박해지기 쉬운 세상이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서로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1:8)

For God is my witness, how I yearn for you all with the affection of Christ Jesus.(Phil 1:8)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빠르게 발전해도

주님 믿는 신앙이 우리의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6. 2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