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어거스틴 (1)/ 로마서 13:11-14
찬양: 내 맘에 주여 소망되소서
터닝포인트: 어거스틴 (1)/ 로마서 13:11-14
찬양: 내 맘에 주여 소망되소서
10월이 되면 결실의 계절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매너리즘에 빠져서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할 모멘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생은 물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교회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신앙의 위인들이 경험한 인생의 전환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터닝 포인트, 즉 전환점을 경험한 신앙 선배들의 인생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올가을에 우리 역시 인생과 신앙에서 전환점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신앙의 인물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현재 알제리가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다가스데라는 곳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신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의 출세를 원했던 부모님은 어거스틴이 열두 살 때부터 카르타고를 비롯한 큰 도시로 유학을 보내서 고전과 수사학을 공부시켰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총명한 젊은이였지만, 청년의 쾌락에 빠져서 18세에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해서 아들을 낳을 정도였습니다. 매사에 열심을 냈던 어거스틴에게는 진리를 깨닫고 싶은 열망도 강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마니교와 점성술에도 빠져보고,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면서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청년의 쾌락과 세상의 학문과 관습을 쫓다 보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에게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언젠가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도했습니다. 당대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어거스틴을 소개해서 신앙의 회복을 도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믿음 대로 어거스틴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원 밖에서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서 읽었는데 로마서 13장 13절(“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라”)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이 어거스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훗날 그 순간을 회고하면서 “확실성의 빛”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을 쫓던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순간입니다.
우리도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기 원합니다. 크고 작은 전환점을 통해서 매너리즘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소망으로 살기 원합니다.-河-
빌립보서 강해 (16, 마지막): 일체의 비결/ 빌 4:10-20
찬양: 주와 함께 가리라
빌립보서 말씀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4개월여에 걸쳐서 빌립보서 말씀을 온 교회가 함께 읽었습니다. 특별히 마음깊이 다가오신 하나님 말씀이 있다면 잘 간직하셔서 앞으로의 신앙과 인생길에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감옥에 갇힌 채로 자신의 안부와 헌금을 갖고 바울을 방문했던 에바브로디도 편에 편지를 써서 빌립보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바울을 방문하러 와서 에바브로디도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팠지만 회복되어서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립보 교회로 돌아갔고, 교회 앞에서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편지 마지막에 바울을 자신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며 기도해 주었고, 헌금을 거둬서 바울에게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편지 첫 부분에 의하면 바울도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잊지 않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줄것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을 비난하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랑을 느낀 바울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물질이 중요하지 않았고 헌금에 깃든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면 어떤 일도 가능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는 유명한 말씀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해 낼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주는 말씀으로 읽곤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물질의 많고 적음, 죽음과 삶을 뛰어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이 그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배설물로 여긴 바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앙과 삶의 축을 그리스도와 교회로 옮기도 나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이 터득한 일체의 비결을 갖고 있다면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할까요! 세상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께 붙잡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참빛 식구들 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저는 그리 빨리 운전하는 편이 아닙니다. 제한속도를 지키거나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한속도에서 10마일 이상을 넘기지 않습니다. 차선도 자주 바꾸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같은 차선을 달립니다. 옆에 있는 아내는 제 운전습관에 익숙하지만, 종종 운전을 아주(?) 잘하는 분께서 옆자리에 타시면 답답해하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면 장난기가 발동해서 슬쩍 액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선도 바꿔봅니다. 운전을 못 해서 늦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안전운전을 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제한 속도를 지켜서 운전하는 것이 편합니다. 속도를 내면서 급하게 달려가도 나중에 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고 자칫 교통 티켓에 벌금 폭탄을 맞기 십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합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는 뜨거운 커피가 내려오는데도 손으로 종이컵을 잡고 기다립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저절로 닫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몇 번씩이나 “닫힘” 버튼을 누릅니다. 일종의 조급증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길을 걸으면서도 서두를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뒤처졌다고 느끼거나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기 위해서 경쟁심이 발동할 때 서두르게 됩니다. 지금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것 같은 초조감도 한몫 합니다.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면 실수하게 되고 자칫 서두른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때때로 속도를 낮출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합한 속도로 주어진 인생길을 가는 것입니다. 곁눈질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향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스 기니스라는 분은 그의 책 <소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쫓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 부르심을 쫓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스 기니스의 말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사람과 세상을 의식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은 사람의 칭찬처럼 귓전을 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뤄가는 소명을 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이신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곤 합니다. 무엇보다 조급할 때 그렇습니다.
조급하게 세상을 쫓아가느라 애쓰지 않고 자신의 속도를 유지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내적 성찰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말씀과 기도로 점검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삶의 속도를 낮춰보는 것입니다. 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자신을 돌아볼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인생의 엔진을 완전히 끄고 쉼을 가질 필요도 있습니다. 시끄러운 세상으로부터 차단된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가서 삶을 돌아보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깊은 침묵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힘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답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삶을 조율합니다. 침착하게 자신이 가야 할 인생길의 방향을 잡아가고 속도를 조절합니다. 속도를 낮추고 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스 기니스는 그의 다른 책 <인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이자, 기업가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소명의 핵심이다.”
어느덧 올해도 석 달 남았습니다. 세 달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조급해집니다. 그동안 최고의 속도로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남은 석 달은 속도를 낮추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마음껏 즐기고 음미해 봅시다. 유일하신 청중이신 하나님 앞에서 소명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창의적이고 아름답고 알찬 인생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018년 9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빌립보서 강해 (15): 평강의 하나님/ 빌 4:6-9
찬양: 누가 주를 따르려는가
봉헌송: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지막 교훈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주께서 오실 때가 가까워 왔으니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내적으로 항상 기뻐하고, 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염려입니다. 염려는 기쁨은 물론 감사까지 빼앗아 갑니다. 염려에 휩싸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과거와 현재의 삶까지 요동칩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미래가 불안정한 현대인들에게도 찾아오기에 염려를 관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기도와 간구”라는 그리스도인의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몰아낼 수 있고, 기도할 때 염려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감사를 제안했습니다. 또한 염려를 몰아내는 기도는 단순히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귓전까지 배달되는 기도임을 배웠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몰아내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임합니다. 염려와 불안은 평강이 깨진 상태입니다. 염려가 물밀 듯이 몰려오니 우리 스스로 평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는 “아무것도” “모든”과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모든 염려를 손에 들고 있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맡길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염려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빌립보서 4장 4-7절에는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표지 (marks)가 등장했습니다. 기쁨, 기도, 감사, 그리고 평안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무엇이든지 참되고, 고상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명예롭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을 세우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앞에 있는 네 가지 덕목이 구약 시대부터 전해지는 것들이라면, 위에 소개된 여덟 가지는 당시 로마 시민들도 지향하던 것을 성경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근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부탁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쳐주고 몸소 행한 대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세상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감사함으로…
[모든 염려 거리를] 하나님의 귀까지 배달하라”(빌4:6)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많은 분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익숙한 말씀인데
한 주간 설교에 할애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그만큼 염려하면서 살아가기에
빌립보서가 알려주는 <염려 관리법>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는] “기도”
모든 염려에 대한 구체적인 “간청”
그리고 “감사”였습니다.
특히, 쉬지 않는 기도는
기도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염려가 습관이 되면, 기도가 무너집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 자리를 염려가 차지합니다.
염려한다면,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기도뿐만 아니라 기쁨과 감사도 잃어버립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 그토록 염려하던 바로 그 내일입니다.
Today is the tomorrow we worried about yesterday. (Author unknown)
어제와 오늘을 비교하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으면,
작년 이 맘때 우리가 무엇을 염려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렇게 꿋꿋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
내일은 내일이 염려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마6:34).
염려가 생기는 그 자리, 그 순간에
주저말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기도가 염려를 다스리는 힘임을 우리 모두 경험합시다.
기도는 염려를 물리치는 하늘의 묘약입니다.
2.
염려는 나쁜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상상(imagination)입니다.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추한(ugly) 상상입니다. 소비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상상력을
기도와 감사 가운데 선하게 사용합시다.
산이 옮겨지는 것을 상상하고,
아기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늑대와 이리가 함께 지내는 세상을 상상하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이 이뤄질 것을 상상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제로 느끼는 영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 감사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히 염려를 다스리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근심과 염려 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살리는 선한 말을 건넴으로 주님의 나라가 세상 속에 임하는 것을 보기 원합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잠12:25)
Anxiety in a man’s heart weighs him down, but a good word makes him glad.
하나님 아버지,
기도로 염려를 다스리고
염려 속에 있는 가족과 이웃을 격려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 20 이-메일 목회 서신)
빌립보서 강해 (14): 기도와 간구로/ 빌립보서 4:6
찬양: 한 노래 가지리라
빌립보서의 마지막 네 번째 단락(4:4-20)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큰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데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3:20). 하늘에 속했다는 생각을 하면 땅에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이고 그날이 가까워 온다는 사실입니다 (4:5). 우리 삶에 끝이 있고 세상에 종말이 있음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 시민인 것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살아갈 때, 비로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두 가지를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모든 사람을 신사적으로 대하고, 참아주고, 경우에 맞게 대하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기쁨이 그리스도의 내적 덕목이라면, 관용은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인의 외적 표지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데 방해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염려”입니다. 염려가 찾아오면, 기쁨도 사라지고 관계도 위축됩니다.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일을 꾸준히 행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실 정도로 염려는 기쁨은 물론 우리 신앙과 삶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염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핍박과 박해가 찾아오니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거짓으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교회를 생각해도 염려가 생겼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두고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인은 물론 교회가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와 감사입니다. 특별히 간구는 염려를 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염려가 찾아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속해서 기도할 때 염려가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기도와 더불어 감사도 염려를 몰아냅니다. 염려할 때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감사한다는 것은 염려를 통제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염려에 뺏기면 안됩니다. 다음 한 주간 감사함으로 기도하면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주 안에서 기쁨으로 살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