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회

13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올 때, 베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이곳에 계신 지인들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새로운 임지로 보내신다는 믿음으로 무작정 샌프란시스코에 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보니 지역의 환경은 물론 목회 상황이 제가 생각하던 것과 매우 달랐습니다. 저의 부족함에 낯선 환경까지 더해지니 목회가 쉽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을 믿고 견디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걸어가는 여정에서도 예상치 않은 장애물을 만납니다. 그때는 누구나 지치고 낙심하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부르셨으니 함께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그 일을 성취하실 것을 믿고 걷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앞으로 살펴볼 빌립보서는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빌립보는 주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게도냐 왕 빌립 2세가 세웠습니다. 금광이 있고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살기 좋은 도시였습니다. 특히, 로마의 아우구스티누스 대제가 빌립보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에, 특별 구역으로 지정하였고 퇴역 군인들이 이주해서 살기도 했습니다. 빌립보는 이처럼 전통과 명성을 두루 갖춘 도시였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현재의 유럽인 마게도니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유럽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빌립보에 도착했지만, 복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빌립보라는 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환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도착한 임지였는데 그만 어려움을 만난 것입니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문을 두드렸고, 염색 산업이 발달한 두아디라에서 빌립보에 이주한 루디아라는 옷감 장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했음에도 계속해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다가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발에 쇠사슬이 매인 채로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렵게 열린 복음의 문도 닫히고 바울과 더불어 예수님의 복음도 갇힌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기도하고 힘차게 찬송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며 풀려나게 되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세워진 빌립보 교회였기에 바울은 그의 심장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서 교회를 사랑하는 바울의 심정과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원합니다.-河-

작은 자 하나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를 쉬는 지난주 토요일에는

예배 준비와 청소를 위해서 느지막이 교회에 갔습니다.

 

모든 정리를 끝내고,

본격적인 건기로 접어들었기에

호스를 연결해서 정원에 물을 주는데

아기 참새 한 마리가 물벼락을 맞고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으니 참새는 더 놀랐겠지요.

고의는 아니었지만

괜스레 미안하고 더욱 측은해 보였습니다.

날지도 못하고 기우뚱거리면서

옆집 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습니다

 

물을 모두 주고 호스를 정리하는데

나무 위에서 계속 참새가 울고 있습니다.

아마 어미 참새가 찾고있거나, 자신에게 오라고 신호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미와 아기가 상봉하기를 바라면서

얼른 호스를 정리해서 자리를 떴습니다.

 

다음날 주일 아침,

교회 계단을 올라가는데

참새 한 마리가 앉아서 울고 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만약에 아기를 찾지 못했다면 저를 원망하는 울음소리였겠지요.

제가 아기 참새를 해치지 않고 그대로 놓아주었으니

만약 둘이 만났다면 감사 인사였겠지요.

제게는 전자로 들려서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2.

오늘 새벽에 읽은 마태복음 18장은

“작은 자 중 하나”를 강조합니다.

어린아이, 잃은 양 한 마리,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을 포함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를 강조합니다.

 

세상에서는 하찮고 작지만, 천국에서는 큰 자들입니다.

그러니 작은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땅에서 두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은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작은 모임에도 함께 하심을 뜻합니다.

 

3.

올해 우리 교회 표어대로

작은 일, 작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가까이 있는 작은 자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나보다 작고 약한 자들은 모두 돌봄의 대상입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 지내면서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않거나, 존재감이 별로 없는 이웃이 눈에 띄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챙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For where two or three are gathered in my name, there am I among them. (Matthew 18:20)

 

하나님 아버지,

이웃의 작은 숨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6. 7이-메일 목회 서신)

다윗의 기도

올해 기도에 대한 말씀은 구약에 등장하는 네 명의 인물들이 각자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은 기도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약성경 속의 기도는 개인을 넘어서 이스라엘 전체의 외침이었기에 우리 기도생활에 도전을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처음 시간에는 아기를 갖지 못한 채 마음고생을 하던 한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깊은 내면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한나는 더 이상 참기 힘든 다급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에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먼 나라로 도망가던 요나가 극적으로 구원받은 후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요나가 갇힌 물고기 뱃속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그곳에서 기도할 때 물고기 뱃속이 하나님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세 번째 시간인 지난 주일에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외롭고 절박한 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임을 알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로 탄식했고, 하나님과 논쟁했고, 심지어 다시는 예언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다시 힘을 얻었고 선지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기도가 아니었으면, 예레미야 역시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힘겨운 상황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인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의 일생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베들레헴 목동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골리앗을 물리칠 때만 해도 다윗 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시기와 질투로 10여 년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왕의 자리에 올랐고 왕권도 견고해져서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을 때, 전쟁에 나간 신하의 아내를 범하면서 다윗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다윗 역시 기도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했습니다. 시편 3편은 아들 압살롬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서 밤중에 피난 가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그 비참한 순간에 다윗 역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 높여 기도합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처럼 구원은 주님께만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번에 살펴본 네 명의 구약인물들은 힘든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나와 요나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났고, 예레미야나 다윗은 그들의 일상이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남은 한해 기도로 살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의 일, 나의 일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주 설교 초반에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는 예수님 말씀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께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이 좋은 것을 두고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무임승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무시하고

혼자 힘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신앙과 삶이 둘로 나눠질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지점에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2.

  1. 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믿음”이라는 챕터에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발췌해서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게 해 주신다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거저 주신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모든 것을 거저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은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겼다면,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써 문제를 마무리짓습니다.(빌 2:12-13)

12절에서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두가지 말씀이 한 구절에 등장하는 것을 C.S. 루이스는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3.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이익만을 챙기지 않고

받은 구원과 은혜에 감사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에

모든 힘을 들여서 노력하고, 책임 있게 자신의 삶을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 일과 우리 일을 구분 짓지 말고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감당하기 원합니다.

 

매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심을 보기 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빌1:6)

And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Phil 1:6)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5. 31이-메일 목회 서신)

예레미야의 기도

구약의 인물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는 “하나님과 깊은 대화”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선지자 요나가 목숨은 구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듯이 우리도 각자의 상황에서 주님을 찾을 수 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체험할 수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대화하고 교제할 때, 다양한 방식이 있듯이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소리 내서 기도하고, 침묵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형식을 갖춰서 기도하고, 일상적인 대화식으로 기도합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혼자 기도하고, 공동체로 모여서 함께 기도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기도하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이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든지 기도합니다. 시작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일하는 중간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일을 끝낸 후에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며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신앙과 삶의 길을 걷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도는 말씀과 함께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살펴볼 예레미야 선지자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조국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무너지는 순간을 끝까지 함께 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 수 있다고 온 힘을 다해서 외쳤지만, 이미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나라와 민족이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달콤한 말로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까지 득세하면서 왕을 비롯한 지도자들까지 예레미야를 핍박했습니다.

 

선지자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나와서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과 씨름했습니다.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힘겨웠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히 토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얻고 예언자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다시 시작하고, 주어진 길을 끝까지 걸어갑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남은 5월을 기도로 마무리하고 기도로 새달을 맞이합시다.-河-

요나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를 함께 나눴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이자

당시에 제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왜 니느웨로 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단단히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니느웨 반대쪽 다시스로 향합니다.

누가복음의 탕자, 아니 꼭 청개구리 같습니다.

 

배 맨 밑에 내려가서 잠을 청합니다.

바다에 폭풍이 일어도 잠을 자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무감각과 무지를 발견합니다.

 

2.

죗값을 물어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바다 맨 밑까지 떨어집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추락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동원해서

요나를 구하십니다. 구사일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물고기 뱃속입니다.

불안하고 불완전한 실존입니다.

 

요나는 그 순간 기도했고,

그곳이 하나님 마음속이 되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리고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냈습니다.

정말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든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예언하라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합니다.

 

니느웨에 간 요나는 설렁설렁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는데

니느웨 백성들이 귀담아듣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일반 백성들부터 시작된 회개 운동이 왕에게 확대되고

심지어 하루만 굶어도 큰일 날 가축까지 금식하면서 회개합니다.

 

언제나 회개는 하나님 마음을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내리시려는 심판을 거두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 국가 니느웨까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시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하나님께 대항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천막을 쳐 놓고 감시합니다.

요나가 하나님 머리 꼭대기에 앉은 느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요나를 설득하시지만 (요나 4장)

요나의 마지막 반응은 독자인 우리에게 남긴 채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요나서가 끝납니다.

 

3.

요나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우리도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금방 잊어버립니다.

자기 생각에 꽉 들어차서 열린 사고가 불가능합니다.

나만 잘 되어야 합니다.

종종 하나님 머리 위까지 올라갈 정도로 교만합니다.

하나님 속을 엄청 썩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도긴개긴 현대판 요나들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그토록 좋은가 봅니다.

 

그런데, 은혜에만 머물면 조금 감상적일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위선도 있지만, 은혜에 숨는 위선도 문제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닮은 제자로,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기 원합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요나 4:11)

And should not I pity Nineveh, that great city, in which there are more than 120,000 persons

who do not know their right hand from their left, and also much cattle? (Jonah 4:11)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근사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채워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5. 24이-메일 목회 서신)

 

해시태그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새로운 단어나 용어들도 생깁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해시태그”입니다. 해시태그라는 말은 1970년대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에서 사용되던 용어입니다. 2007년에 크리스 메시나라는 사람이 자신의 트위터에 “#표시를 사용해서 (필요한 정보를) 묶어보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하면서 일반화되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에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해시태그는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종의 의사소통 기호입니다. 파운드로 알려진 # 기호를 맨 앞에 쓰고 강조하고 싶거나 반복되는 단어나 표현을 붙여 쓰는 일종의 표기법입니다. 소셜 미디어에서 해시태그를 사용한 단어나 표현을 클릭하면 그와 유사한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검색되는 편리함도 제공합니다.

 

2007년 가을, 남가주 일대를 뒤덮었던 샌디에이고 산불을 알리는데 해시태그가 사용된 것이 유명합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는 단순히 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 사회적인 이슈를 알리거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알리는데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캠페인 역시 해시태그를 통해서 소셜미디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해시태그 할 수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해시태그하면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고, 관련된 정보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관심사를 주제어에 맞춰서 분류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마태복음 10장을 읽는 중에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를 부르시는 말씀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부터 시작된 열두 제자의 이름은 가룟 유다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에게는 “곧 예수를 판 자라”는 부연설명이 붙었습니다. 가족과 친지는 물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건만 마지막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예수님을 팔아버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자라는 가장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달았습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하며 “#예수를판자”라는 해시태그를 붙일 수 있습니다. 영어나 한글이나 해시태그에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를 해시태그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임”이라는 해시태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조그만 이민 교회 목사로서 교회의 살림부터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언제나 막중한 책임을 느낍니다. 여기까지 목사의 자리를 지킨 것도 책임감이 제일 컸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책임이 꽤 크게 다가옵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을 근사하게 감당한 것이 아니기에 책임 다음에는 “#언제나부족”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저를 두고 해시태그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를 사용할까도 생각해 보니 흥미롭고 꽤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다른 분들의 해시태그가 거울을 보듯이 저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아니 저에 대한 하나님의 해시태그도 궁금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물론 이웃과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해시태그를 받는 것이 행복한 인생일 테니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서도 해시태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조국에서 진행 중인 남북대화가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로 이어지길 우리 모두 바라고 있습니다. 지뢰밭처럼 여러 가지 변수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서 그 결과를 속단할 수 없지만, 이번처럼 좋은 기회가 없기에 “#평화” “#민족통일” 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이고 싶습니다.

 

지난주에는 텍사스의 한 고등학교에서 또다시 총격 사고가 나서 여덟 명의 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2월 플로리다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격 사고 이후 학생들까지 나서서 총기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정부의 대처는 느리고 총격 사고는 계속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조속한총기규제”라는 해시태그를 아주 큰 글씨로 여기저기 달아놓고 싶습니다.

 

이처럼 해시태그를 사용해서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펼 수 있고 세상의 변화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나쁜 꼬리표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기분 좋은 해시태그들이 줄지어 생겨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018년 5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