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뼈가 살아나다

좋은 아침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차례로 한 장씩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는 에스겔서를 읽고 있습니다.

 

예언서 말씀을 새벽에 읽기가 쉽지 않아서

거친 자갈길을 걷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주로 등장하니

거리감도 느껴지고 말씀에 은혜를 더하기가 솔직히 어렵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에스겔서의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37장을 읽었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가 살아나는 신비롭고 감동적인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환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리고는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3절)고 물으십니다.

 

난감한 질문입니다.

다윗이 갖고 있던 믿음의 상상력을 총동원해도

워낙 엄청나고 불가능한 일이니 답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에스겔이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최고의 답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살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에 에스겔을 초청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 마른 뼈들(dry bones)에게 명령하니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뼈들이 맞춰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복원되었습니다.

정말 신비로운 환상입니다.

(에스겔서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등장한답니다)

 

잘 맞춰졌고 복원은 마무리되었는데

그냥 “물체”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대로 생기를 향해서 명령하니

사방에서 생기가 들어와서 마른 뼈가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은

나라를 잃고 망연자실,

절망 가운데 이곳 저곳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일으키시고

주님의 군대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새벽에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벅차 오르는 감동과 은혜가 임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씀을 전하고 기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커졌습니다.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 속에

마른 뼈처럼 내동댕이쳐진 것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죽음이 되살아나는 부활의 역사,

그 생명의 기운이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 가정과 교회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새 달을 맞이합니다.

올 해도 두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맞춰 주시고, 돋아나게 하시고, 복원시키시고

마지막에 사방에서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역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

무한한 믿음의 상상력을 갖고 힘차게 새 달을 살아갑시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에스겔 37:14절 중에서)

And I will put my Spirit within you, and you shall live…

Then you sha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iel 37:14)

 

하나님 아버지,

마른 뼈가 살아나는 역사가 우리 안에 있게 하시고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불어넣으신 생명의 기운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 이-메일 목회 서신)

다윗: 물맷돌 다섯 개

교회를 처음 방문하신 분들이 교회에 정착하는데 첫 번째 인상이 매우 중요하답니다. 심지어 처음 10분 동안 갖게 된 느낌이 교회를 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는 조사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마음이 느껴지면 저절로 발길이 머물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임원회에서 교회의 사역을 의논하면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시는 발걸음이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전도하는 편이 아닌데도 교회를 찾아주시니 더욱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에 마음을 두고 등록하기까지 강권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리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종 처음 오신 분들께 무심하게 보일 수가 있다는 지적이 임원회에서 있었습니다.

 

크게 강요하지 않더라도 따뜻하게 맞이하고 예배 중에 인사하는 시간이나 친교 시간에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방문하시고 새로 참빛 식구들이 되신 분들께 조금 더 관심을 보이고 진심으로 환영하기 원합니다. 조그만 관심과 친절이 감동을 주고 처음 오신 분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환영팀이라는 마음으로 새로 오신 분들을 안내하고 환대하기 원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일곱째 시간입니다. 드디어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사울이 입혀주었던 군복과 갑옷 그리고 놋 투구와 칼은 다윗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일상복을 그대로 입었습니다. 양을 지킬 때 사용하던 방식대로 시냇가에 가서 물 맷돌 다섯 개를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골리앗을 향해서 나갑니다.

 

분명히 다윗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물 맷돌 다섯 개를 골랐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라도 골리앗을 맞춰서 쓰러뜨려야 합니다. 골리앗이 워낙 커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물 맷돌로 도저히 쓰러뜨릴 수 없음을 누구보다 다윗이 잘 압니다. 그러고 보면 다윗은 철저하게 살아계신 하나님 즉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가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하기 위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사울 왕을 비롯한 이스라엘 군대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다윗 자신도 무척 긴장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길이지만 골리앗은 강합니다.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건져 주실 것을 믿지만 그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골리앗에게 나갑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갑니다. 전쟁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믿고 나가는 다윗의 발걸음입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무너뜨렸습니다. 할렐루야!-河-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예레미야 읽기를 잠시 쉬고

마가복음을 시작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를 읽다가

신약의 복음서를 읽으니 더욱 은혜롭습니다.

 

지난주에 읽은 마가복음 2장에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유명한 말씀을 만났습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전하는 복음을,

새 부대는 복음을 간직한 그릇, 즉

새롭게 예수님을 믿은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세워질 교회를 가리켰을 것입니다.

 

특별히, 금식을 놓고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셨으니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금식과 그것을 장려하는 유대교를

헌 포도주와 헌 부대에 비유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차 실천하게 될 금식과

그 금식에 동참할 교회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되겠지요.

 

2.

이번 주는 종교개혁 주일이고

10월 31일은 말틴 루터가 당시의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비텐부르크 성당에 게시한 지50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500년 전 말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말 그대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은 사건이었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캐치프레이즈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개신교라는 새 부대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부대가 많이 헐었고,

포도주도 맛을 많이 잃었습니다.

다시 새로운 개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3.

사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새 날을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새 날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헌- 것이 되지 않도록

새 날을 주시고

새 복음으로 채워 가길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직하기에 적합한

새로운 부대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헌 것은 과감히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새롭게 변화되고, 개혁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새롭게 됨은 물론

새로운 세상까지 꿈꾸면서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도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하루가 되길 원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예레미야 애가 3:21-23)

But this I call to mind, and therefore I have hope: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Lamentation 3:21-23)

 

하나님 아버지,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담기에 충분한

새롭고 신실한 새 그릇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26 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자유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재직하던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는 95개 조의 반박문을 게시하였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말틴 루터 역시 운명적으로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1520년 세 개의 논문을 연거푸 발표합니다. 첫번째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유명한 만인 제사장설을 피력합니다. 교황이나 성직자들만 제사장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대로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사제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독점하고 있는 성례전을 비판하면서 그 이후로 뜨겁게 전개된 성만찬 논쟁에 불을 붙였습니다.

 

말틴 루터의 세 번째 논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자신을 파문시키려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대한 말틴 루터의 사상을 잘 담고 있는 주옥같은 글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행함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율법의 틀에 가둬두고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성경에 반하는 신앙을 주입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주장했습니다. 말틴 루터 자신도 탑의 경험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자신 안에 의롭게 될 가능성이 없고 단지 손님처럼 밖에서 찾아오는 하나님의 낯선 의, 즉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논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죄와 율법 그리고 행위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논문에서 밝힌 첫 번째 명제 대로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자유로운 만물의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니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말틴 루터가 논문에서 밝히 두 번째 명제는 “그리스도인은 더할 수 없이 충성스러운 만물의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만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종으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는 억지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경고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에 합당한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억지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랑입니다.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면서 믿음을 사랑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말씀대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내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외적으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뤄진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말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길 원했습니다:“나는 자신을 하나의 그리스도로 나의 이웃에게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이웃 안에서 산다”라고 그의 논문을 마무리합니다. 자칫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도외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틴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알려주듯이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되어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종교 개혁 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한 걸음 나가서 믿음에 사랑이 더해지길 원합니다. 자발적인 섬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실천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고귀한 신앙을 갖기 원합니다. (2016년 10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다윗: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기 멋대로”라는 말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웬만한 유혹이나 세상 풍습에 흔들리지 않고 줏대 있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방식만 고집하는 예의가 없는 모습입니다. 후자라면 문제가 있지만, 주관과 소신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박수를 보낼 만합니다. “멋”이라는 말이 주는 여유도 느껴집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배웠듯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좋은 의미에서 나름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자기 정체성,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피차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의 삶, 세상 속에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선을 행하고 약한 자를 돌보는 선교적 삶까지 독특하고 멋있는 생활방식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나름의 방식이 있습니다. “멋”이라는 말을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행사가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 자주 오는 것보다, 각자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흩어지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둘째로, 교회 사역을 놓고 강권하거나 꼭 해야 하는 의무조항이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지 않아서 소외당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손길이 부족하면 자원하시는 분이 생길 때까지 뒤로 미루거나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그냥 넘어갑니다. 셋째는, 자원하며 섬기는 손길로 교회가 세워지길 바랍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섬기고, 새로운 사역을 제안해서 주도권을 갖고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갖고 있는 은사를 알려주시면 교회를 세우는데 잘 활용하도록 돕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더 하나님 마음에 맞게 세워지길 원합니다.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다윗과 골리앗의 말씀에서 다윗이 사울 앞에 가서 양을 치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간증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도록 허락하면서,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갑옷까지 입혔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옷이 다윗에게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다윗은 갑옷을 벗고 일상복 차림으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갑니다. 역시 다윗은 일상에 강했습니다. 양을 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모습 그대로 골리앗을 맞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방식대로 각자의 골리앗을 마주합니다. 세상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河-

아하 Aha

좋은 아침입니다.

 

주로 권사님들께서 정기적으로 참석하시는

새벽기도회와 수요예배에서는

에스겔서와 마가복음을 한 장씩 읽어갑니다.

 

마가복음 읽기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

수요 예배에 참석하지 못해도 첨부한 <내용 요약>을 각자 읽으시면서

우리 교회의 성경 읽기와 성경공부에 동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에스겔서는 대부분의 예언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Lord)이심을

이방 나라에 대한 심판 예언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에 이르는 제국부터

가까운 거리에서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국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언합니다.

 

엊그제 읽은 에스겔서 2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인 암몬과 모압에 대한 예언을,

26-28장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커다란 교역을 하면서 풍요를 누리던

두로에 대한 예언이 등장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도 무너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바벨론이라는 제국 앞에서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더 늦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말을 무시한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2.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본

주변국가들은 깨소금 맛이라고 아주 좋아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가는 것을 본 암몬 사람들은

“아하(Aha) 좋다”라고 쾌재를 부릅니다.

 

모압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나 별 차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두로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틈을 타서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로다”라며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주일설교에서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하다고 느끼는 심술궂은 마음”을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을 보고 주변국들이 똑같이 샤덴프로이데하고 있습니다.

 

아하(Ahah

– 남을 조롱할 때 쓰는 히브리어 감탄사입니다.

 

“아하 잘됐다”

“아하 하나님 백성도 별 것 아니구나”

“아하 이스라엘이 망했으니 이제 내 세상이 되었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식의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마음이 힘들지만 그럴수록 주님을 바라보면서

씩—웃고 신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행여나 우리 마음속에

남의 불행을 보고 저런 마음이 들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런 생각을 밖으로 내쫓아야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니 하나님께서는

암몬, 모압, 두로 사람들의 생각과 말을 모두 듣고 계셨고

결국 이들을 심판하실 것을 예고하시기 때문입니다.

 

3.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삶이 마음처럼 펼쳐지지 않고

때로는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샤덴프로이데의 잘못을 범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십자가에 죽으시며 세상에 생명과 화평을 주신 우리 주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함께 연대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힘냅시다!

 

내가 주 여호와인 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25:7)

Then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Ezek 25:7)

 

하나님 아버지,

아름다운 믿음과 선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0.19 이-메일 목회 서신)

축복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라희,준우, 시진이가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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