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4)

부활절이 두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절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셨기에 탄생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태양신의 생일로 섬기던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대체한 것이 성탄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비교해서 부활절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과 맞물린 정확한 시간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을 고려하면 부활절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독교의 역사성이 확증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부활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의 실명이 등장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음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 빌라도였기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지만, 빌라도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실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려는 그릇된 시도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변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도 믿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2-23절에서는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을 저주받은 죽음으로 규정하고 그 날에 장례를 지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틀이었습니다. 반역이나 중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죽는 나무 위에서 그리고 로마 시대에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제물로 드려진 어린양처럼 세상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예고하신 구원에 대한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보잘것 없더라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성경 학개서를 읽었습니다.

 

스가랴와 말라기만 읽으면

구약을 모두 통독하고 신약성경에 접어듭니다.

새벽에 한 장씩 읽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구약의 끝에 왔습니다.

지루한 예언서 읽기였지만, 쉼 없이 꾸준히 읽은 결과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8월 말부터 12월까지 (성경에서는 여섯째 달부터 아홉째 달)

석 달 정도만 활동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자신의 집을 짓는 등

하나님보다 자기를 먼저 챙기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힘을 합쳐서 성전 건축을 끝낼 것을 권면 했습니다.

 

70년이라는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의 예언에 감동받고 서둘러 성전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입니다.

 

그런데 레바논산 수입 백향목과 금과 은으로 지은 솔로몬 성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백성들이 산에서 나무를 갖다가 지었으니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을 불러내서

이제 막 완공된 두 번째 성전에 관해서 묻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학개 2:3)

Who is left among you who saw this house in its former glory?

How do you see it now? Is it not as nothing in your eyes? (Haggai 2:3)

 

 

실제로 보잘것없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아예 “아무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원로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스룹바벨 총독, 여호수아 대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스스로 강하게 할지어다 (Be strong)”라고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아닐 만큼 초라한 성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

올해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연초에 교회 표어를 설교하면서 작은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말 그대로 하찮고 작은 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일.

 

실적주의, 자기 자랑, 겉치레 등이 중요한 시대에 살다 보니

작은 일에 충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보잘것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자신이 해놓은 일을 바라보면

아쉬움이 밀려오고 초라해 보이곤 합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의 위로와 권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 속에도 함께 하십니다.

행여나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 (학개 2:4)

Be strong, work, for I am with you (Haggai 2: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스스로 굳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15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3)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 전능하심, 창조주”로 정리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요약했습니다. 각각 세 가지 덕목으로 정리한 것을 보면서 사도신경이 우리 신앙의 첫단추요 시작점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 지고 삼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깊어지길 바랍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이단들도 생기면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구세주(그리스도, 메시아)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탄생부터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까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됨으로 세상에 오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전능하심”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일어난 모든 사역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지를 인간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대신에 “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은 역설적이지만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에서는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를 없애고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시면, 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성령으로 나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완벽한 사역에 참여하고, 우리 역시 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주님은 나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110번째 맞는

UN이 정한 여성의 날입니다.

지금은 여성의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110년 전 여성의 날을 제정할 때는

여성의 노동 착취는 물론 투표권도 보장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불이익,

미투(Me too)운동에서 보듯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

학창시절 햄릿을 배울 때,

교수님은 한 문단을 외워서 쓰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문단을 택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햄릿에 유명한 구절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그즈음을 외워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햄릿이

아버지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숙부의 품에 안긴 자기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이기에 얼른 포기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 햄릿이 세상에 끼친 영향이 꽤 큽니다.

마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약하다”는 편견을 심어주었다면

여성의 날을 맞아서 셰익스피어도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중요한 사안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창세기 1장에서 선포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여성(레헴)”으로 설명하고,

잠언의 지혜도 여성명사이고,

심지어 히브리어의 성령도 여성명사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여성 사사 드보라가 있었고,

예수님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요셉의 역할은 없지요)

열두제자들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현장과 무덤에 향료를 갖고 갔던 사람도 여성입니다.

 

종종 바울 서신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 등을 갖고

여성의 지위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자세히 읽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올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4.

미국에 와서 구약 성경의 <아가서>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교수님은 아가서에서 한 문단을 정해서

자기 사무실에 와서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피부 색깔이 검은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남녀의 사랑만큼

친밀하고 은밀해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때 저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고백을 암송했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가서 2:10-12)

 

여성의 날 110주년을 맞아서

그동안 여성들 위에 드리웠던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치고

꽃피는 봄날이 오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똑같이 봄날이 찾아오길 원하면서

오늘 새벽에 읽은 하박국 3장 19절 말씀을 나눕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슴” 역시 여성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3: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tread on my high places.(Habbakuk 3:19)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존중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8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2)

어느덧 2018년 세 번째 달을 맞이합니다. 새해를 맞은 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순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시는 참빛 식구들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일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가정과 세상으로 흩어져서 보내는 6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특별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삶이기에 예측할 수 있고 일상을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사건을 만드는 카이로스를 추구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참빛 식구들이 각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이 튼튼히 세워지면 성도들의 모임인 우리 교회는 저절로 강해질 것입니다. 누군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바르고 굳센 믿음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모습도 요청됩니다.

 

남은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보에 있는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본문을 따라서 말씀과 기도가 있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도전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친밀한 교제 속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중에 홈페이지나 목요 서신에 첨부된 주일 설교를 한 번 더 들으시면 각자의 자리에 임하는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실 것입니다. 물론 새벽 기도회나 수요예배에 참석하실 것도 추천합니다. 예배 참석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함께 예배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매우 귀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에는 금식했고 절약한 양식을 어려운 이웃과 나눴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순절은 “나눔의 절기”입니다. 쓰고남은 것이 아니라 절약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만 보내는 사순절을 넘어서 이웃과 세상을 마음에 품기 원합니다.

 

이처럼 일년 중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순절에는 신앙훈련을 실천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합니다. 2018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이 견고해지고, 각자 주님 앞에서 실천하시는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들어가고, 신앙과 삶 특히 일상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귀한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삼일절

좋은 아침입니다

 

미국 날짜로 오늘은

삼일절 제99주년입니다.

 

삼일절은

점점 거세지는 일제의 군부 통치에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된 독립 만세운동입니다.

 

3개월여 계속되면서

백만이 넘는 국민이 만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평화적인 비폭력 독립 만세운동이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절반에 가까운 16명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조약에 참여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각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하자는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힘을 얻은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제기된

고종 황제의 장례식날 (3월 1일)을

D-day로 삼아서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입니다.

 

2.

3.1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자신만 아는 개인적인 신앙을 떨치고

조국과 일제 치하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겨레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36년 일제강점기 내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본 천황을 향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온 몸을 던졌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한 문단을 가져왔습니다.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수 있으나 오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수 있으나

한달 두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다미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은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겯디어 배기겠습니가?

다못 주님께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삼일절을 보내면서

조국 대한민국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을 넘어서

“세상을 맑고 명랑하게” 만드는 빛과 소금이 되기 원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느헤미야 1:6)

Let your ear be attentive and your eyes open,

to hear the prayer of your servant that I now pray before you day and night

for the people of Israel your servants, confessing the sins of the people of Israel,

which we have sinned against you. (Nehemiah 1:16)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기시고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1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1)

우리가 매주 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따라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 “전능하신” “창조주”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고백하는 표현과 방식이 많이 있지만, 신앙의 첫 단추를 올바로 채우기 위해서 사도신경의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주로 오실 것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도신경의 고백 가운데 아쉬운 부분은 예수님의 3년 공생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 없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처음 구절 속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요셉의 약혼자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고 의로우신, 즉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을 알려줍니다. 마리아에게 태어나심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뜻합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과학은 물론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역설이고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거역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났고 세상에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댓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운명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기에 죄지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이심이라”(1:21)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세상의 왕이 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우리 인생을 주님께 맡깁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