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사랑 나눔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연초에 표어를 정하면서 우리 교회에 사랑이 넘치길 원했습니다. 세대가 어울려 있고, 발걸음이 잦은 교회이니 늘 크고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교회 사역도 인생사와 비슷해서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베드로전서에서 배운 대로 우리 모두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나그네의 삶은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함께 걷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됩니다.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인생길을 걷는 신앙의 동지들보다 더 귀한 분들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올해 표어를 “서로 사랑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켠이 아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랑나눔>을 제안했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별로 20불 안에서 무명으로 헌금하고, 그것을 역시 무명으로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하기로 한 것입니다. 참빛 성도님들께서 제안해 주시는 곳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리치몬드에 있는 초등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워싱턴 DC를 다녀오는데 필요한 경비를 슬쩍 지원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두 번째 작은 사랑 나눔을 위한 헌금을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우리 성도님께서 추천하신 과테말라의 께찰떼낭고에서 사역하시는 강순진 선교사님과 사랑을 나눕니다. 해발 2,400m 고지대에 위치한 화산 지역이라고 합니다. 고지대이지만 과테말라 농산물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로 비옥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모여들고 있답니다. 강선교사님(72세) 께서는 2006년부터 과테말라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교회는 물론 장애와 극빈 가정을 도우시고, 거리에서 무료급식, 의료와 교육 등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사역하시는 분이십니다. 저희 작은 마음이 선교사님께 힘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번 정도 작은 사랑 나눔을 더 실천할 계획입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안내 데스크에 있는 제안함을 통해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작은 사랑 나눔입니다. 한 주간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사랑 나눔에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쏟아지는 물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끝내고 오늘부터 예레미야 애가에 들어섰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바벨론에 의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른 조가(lament)입니다.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과

하나님께서 계시던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던 예루살렘이 몹쓸 도시로 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낮에는 예루살렘을 돌아보고

밤에는 낮에 본 참상에 눈물로 주님 앞에 엎드려서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를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애타게 외쳤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예루살렘 왕들과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예언이 맞았으니 더욱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땅의 백성들,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참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애가를 지은 것입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애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자고 초대합니다.

 

깜깜한 어둠입니다.

쓰고 쓴 담즙을 씹는 것과 같은 세상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으니 더욱 절망적입니다.

 

그 순간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쏟듯 할지어다 (애가 2:19)

Pour out your heart like water before the presence of the Lord!(Lam 2:19)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잘못한 것들도 쏟아내고

어려운 상황도 그대로 쏟아내고

자신 안에 들어있는 찌꺼기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 또는 교만,

여전히 남아 있는 특권의식과 자존심도 물처럼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예레미야의 초청입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내야 합니다.

선별할 필요없이 물처럼 쏟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은혜로 가득 채우고

새 날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붓고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애가 3:22-23)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Lamentation 3;22-23)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고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성실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24이-메일 목회 서신)

                   

선한 청지기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청지기”에 비유합니다. 청지기라는 개념은 오늘날 널리 사용되지 않습니다. 영어로 청지기는 “스튜어드”이니 항공사 직원을 가리키는 말 정도로 쓰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청지기라는 직책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믿고 그의 재산을 위탁했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성실하게 관리했습니다. 반면에 악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거나 주인의 재산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재산이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은사대로 은혜를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은혜를 관리하고 그것을 공동체와 세상에서 나눠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혼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각각에 맞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입니다. 로마서 12장 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의 목록이 나옵니다: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사를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선한 청지기의 직무입니다.

주인은 때가 되면 청지기를 불러서 그가 행한 일을 보고받고 회계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7절)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면 청지기는 항상 허리띠를 동이고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청지기의 삶을 살기로 날마다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와의 일대일 관계라면, 사랑은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 감당하는 청지기직입니다.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수많은 죄를 덮어주고 서로 대접하며 환대합니다. 이처럼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정신을 차리고 기도와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은사를 갖고 주님의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河-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 미국 언론은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버지니아 샤롯츠빌 사건의 후폭풍을 연일 보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충돌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감싸는 듯한 애매한 발언을 하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느낌입니다.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

5년 동안 살았던 인디애나 블루밍턴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마틴스빌이라는 곳에

KKK지역본부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있었던 2000년 통계를 살펴보니

약11,000명 주민 가운데 흑인은 11명일 정도로

유색인종이 발을 붙이기 힘든 도시였습니다.

 

어쩌다가 그 도시를 지나갈 기회가 생기면

왠지 기분이 언짢고 얼른 빠져나오기 위해서

서둘러 엑셀러레이터를 밟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민 가운데 한 분은 그 도시의 약국에 근무하셨고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인종이나 피부 색깔 등에 대한 차별과

이것을 빙자한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을 지으셨기에

누구나 존중받고 공평하게 대우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평화가 깨지고

무고한 시민들을 위협하는 일이기에

경계하고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미국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갈라진 모든 것을 충만한 은혜로 통합시켜 주십시오

찢겨진 모든 것을 충만한 사랑으로 아물게 해주십시오

부활, 새로운 생명을 주십시오.

Unite in full grace all that is divided.

Mend in full love all that is torn.

Resurrect us, we pray.

 

우리의 삶도 만만치 않지만

잠시 멈춰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길 기도하기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Matthew 5:9)

 

하나님 아버지,

분열된 세상이 화합하게 하시고

찢겨진 마음들이 하나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주의 평화, 샬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17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말합니다. 작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4%가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밝힌 것을 보면 맞는 말입니다. 물론 1970년대의 90% 이상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지만 여전히 다른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인이 주류입니다. 미국에서 경계하는 무슬림은 미국 전체 인구의 1%도 안 됩니다. 날씨가 좋고 즐길 것이 많아서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놀러 간다는 캘리포니아도 주일 예배출석률이 30%에 가깝습니다.

 

물론 세대별로 자세히 조사하면, 청년층의 기독교 인구 비율이나 교회 출석률은 급격히 떨어질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비율은 여전히 낮아도 종교가 없는 젊은이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미국은 기독교가 주류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고, 기독교 용어를 쓰고, 기독교인으로 행동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베드로전서의 배경인 소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정반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는 모세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이 주류였습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신전을 출입하는 다른 종교의 비율이 기독교보다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는 물론 삶의 터전이 무너질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래도 소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믿었기에 순교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은 성도들이 이런 신앙에 뿌리를 내렸고, 그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이라는 주제가 겹쳐서 나옵니다. 의를 위하여(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알려줍니다 (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도 배웠습니다(3:17). 이처럼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다. 앞서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닦아 놓으셨기에 우리도 그 길을 넉넉히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河-

세심함

좋은 아침입니다

 

뉴스를 검색하다가

아이슬란드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시계 제작소에 대한 짧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직접 손으로 시계를 만듭니다.

1970년부터 시계 수리공으로 일한 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JS Watch라는 브랜드와

자신의 이름을 딴 Gilbert라는 가게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만든 시계는 정확성과 독특한 디자인은 물론

1,000m 물속에서도 방수가 된답니다.

톰 크루즈를 비롯한 인기인들도 주된 고객입니다.

물론 값은 수 천 불에 이르는 고급 시계입니다.

 

2.

5분 남짓한 영상이었는데

제가 눈 여겨 본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시계를 만드는 모습입니다.

 

틀 위에 시계 원판을 올려놓고

오른쪽 안경에 덧씌운 돋보기와

핀셋을 사용해서 꼼꼼하게 시계를 조립합니다.

말 그대로 장인의 모습입니다.

 

단순히 시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신을 조립해 가는 듯합니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 엄숙했습니다.

 

2.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도

장인과 같은 모습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릎 꿇고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숭고합니다.

기도의 언어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할 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조용한 기도시간부터

마지막 축도와 찬양대의 후주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끝까지 사모하고 실제로 경험하면서 예배합니다.

 

3.

일터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일합니다.

가정을 세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품 하나하나를 정성껏 조립하는 시계공의 모습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신앙과 삶을 세워가면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게 기쁨과 자부심이 넘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웃 앞에서

우리의 삶을 정교하고 아름답게 세워가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 119:140)

Your promise is well tried, and your servant loves it. (Psalms 119:40)

 

하나님 아버지,

참빛식구들의 삶이 곧 예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10이-메일 목회 서신)

                   

선을 행함으로

베드로전서는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사도 베드로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흩어진 나그네의 삶이 쉽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근사하게 살 것을 부탁합니다.

 

우선,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당시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나 유대교에 비해서도 조그만 종파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세상을 축복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선교적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 자신들을 저주하고 까다롭게 대하고 심지어 박해하는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도록 초청하고 도울 의무와 특권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선교적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살아남기도 힘든데 세상을 축복하고 감싸 안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지켜보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힘을 더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큰 힘이자 소망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죽음이 판치는 세상을 견디고, 매사에 생명을 사랑하며 좋은 날 보기를 소망하면서 힘차게 살아갑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는 “선함(good)”과 관련된 말씀이 많이 등장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악을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합니다(11절). 세상에서 열심히 선을 구하면 해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13절). 무엇보다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16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선하게 사는 것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선한 마음을 갖고 변함없이 행동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도 다반사입니다(17절). 그것도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선한 길을 걷습니다. 선한 양심을 갖고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는 것은 선교적 삶을 살려는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히 요청되는 덕목입니다.

 

이처럼 세상 속에서 선하게 살다 보면,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호기심과 궁금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은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의 삶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할 것을 언제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부드럽고 신사적인 자세로 복음을 잘 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에서 고난 받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최후 승리를 믿고 살아갑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