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13): 선을 행함으로
Author: 참빛
성경읽기
좋은 아침입니다
8월 1일 자 워싱턴 포스트에는
펜스 부통령과 법무장관을 비롯한 백악관의 주요 인물들이
매주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초대를 받았지만
참석 여부는 확실치 않고,
성경공부 모임과 인도자 목사님을 적극 지지하고 있답니다.
자신들은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비공식적이고 순수한 의도를 가진 성경공부 모임이라고 주장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에서는
과연 그 모임에 정치적 의도나 영향력은 없는지 질문했습니다.
기사 밑에는
백악관의 성경 공부를 비꼬는 댓글들이 길게 달렸습니다.
2.
트럼프 내각의 주요 인사들 가운데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트럼프의 어깨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사진도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백악관에서 매주 모이는 성경공부가 제대로 진행된다면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에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자를 위하는 정치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런 변화를 체감할 수 없습니다.
오바마 케어를 비롯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점점 더 구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그 높으신 분들이 매주 모여서
무슨 성경을 공부하고 무엇을 기도할지 궁금합니다.
신앙이 좋고 순수한 분들이라고 기사에서 소개했지만
과연 “신앙이 좋고 순수한”것이 무엇인지도 다시 생각해 봅니다.
3.
성경은 누가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하나님 말씀도 분명한 의도가 있을 텐데
읽는 사람이 각기 다르게 성경을 이해하고
심지어 성경을 이용합니다.
성경을 올바로 읽기 위해서
성경이 과연 어떤 책인지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수 있는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하는 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혼란스럽고,
아전인수격 성경 읽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4.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올바로 읽고 잘 다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내 마음대로 읽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음성과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여러분과 성경에 관해서 얘기하고 함께 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잘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왕 백악관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니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정치인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Open my eyes, that I may behold
wondrous things out of your law.(Psalms 119:18)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서 주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안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4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을 같이 하여
오늘 본문은 “마지막으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나눴던 말씀에 대한 마무리임을 알리는 표현입니다. 육체의 원하는 바를 버리고 이방인 중에서 선하게 살라고 권면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제국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시민의 의무를 다하길 부탁했습니다. 주어진 자유를 갖고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도 배웠습니다. 종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부부는 서로를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고, 핍박과 역경 속에서 지내지만, 최후 승리를 믿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저주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도리어 선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복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도 사랑으로 섬겨서 그들 역시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함께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더불어 꼭 필요한 것이 공동체 의식입니다. 공동체는 같은 지역 또는 같은 관심사를 갖고 생각과 삶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에서는 헬라어 “코이노니아(성도의 교제)”가 공동체의 특성을 잘 설명해 줍니다. 믿음 안에서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신앙과 삶을 나누고, 하나님 사역에 함께 참여하고,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것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공동체 속에서 서로 격려하며 함께 걷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 동정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섬김과 겸손함이 있다면 저절로 근사한 공동체가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그 안에서 공동체의 힘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큰 복입니다.
그렇다고 공동체 안에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공동체가 주는 힘으로 세상에서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며 화평케 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야 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서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혼자 이 길을 걸으면 외롭고 쉽게 지치지만, 공동체 속에서 지체들과 함께 가면 해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능력을 구하면서 걷는 길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로 자라가고, 참빛 식구들께서 서로에게 의지와 힘이 되기 원합니다.-河-
2017년 7월 5주 말씀과 찬양
베드로전서 (12): 마음을 같이 하여
에벳멜렉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이스라엘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심판이 임했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든지 멸망의 순간이 닥치면, 무능한 왕이 들어서고 그를 보좌해야 할 관리들은 파당을 짓고 권력 다툼을 하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우유부단했습니다. 신하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체포해서 데려왔을 때, 자기 생각을 말하지도 못한 채 예레미야를 신하들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신하들은 예레미야를 진흙 웅덩이에 던졌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였습니다.
그때 왕궁에 에벳멜렉이라는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가 있었습니다. 에벳멜렉은 “왕의 신하”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이주해서 왕을 섬기는 신하가 된 것 같습니다. 신하들 간에 암투가 심하니 시드기야 왕이 외국인을 고용해서 이름을 바꿔주고 시중들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에티오피아 출신입니다. 게다가 환관인 내시였습니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두 가지 커다란 결격 사유를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왕궁에 있던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혀서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왕까지 쥐고 흔드는 신하들이 꾸민 일입니다. 에벳멜렉이 용기를 내서 시드기야 왕 앞에 나갑니다. 신하들이 예레미야에게 악한 일을 한 것이고, 성안에 먹을 것이 없으니 웅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는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알립니다. 보통 용기가 아닙니다. 가만히 왕의 시중만 들면 되는데, 자기와 상관도 없는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서 소위 총대를 멘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벳멜렉을 예비해 놓으신 듯합니다.
에벳멜렉이 왕이 보낸 군사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웅덩이에 갇힌 예레미야를 구해냈습니다. 예레미야가 완전히 석방되지 못한 채 왕이 관할하는 감옥으로 이송되었지만, 그곳은 비교적 안전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 에벳멜렉의 도움이 없었으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신하들이 파놓은 웅덩이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인물인 에벳멜렉이 나선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구레네 출신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도 생각납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 준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인 것도 떠오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하는 의외의 인물을 통해서 일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에벳멜렉의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해도 에벳멜렉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행한 의로운 행동만이 그를 살린 것은 아닙니다. 에벳멜렉이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에티오피아 출신 내시 에벳멜렉은 예루살렘에서 몇 안 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조롱할 때,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임을 확신하였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구해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신과 성분 등 차별없이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쓰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심을 봅니다.
우리 역시 시시때때로 돕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믿을만한 지인이 나서서 도와주길 은근히 기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곤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입니다.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꼭 필요한 순간에 에벳멜렉과 같은 은인을 만나길 기대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에벳멜렉이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서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에 참여합니다. 예레미야를 구출한 에벳멜렉처럼 우리 역시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은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에벳멜렉들이 사방에서 일어나길 기대하시고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들에게 능력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2017년 7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느긋함
좋은 아침입니다.
야구나 골프든지
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선수들을 보면 자랑스럽고
특별히 관심을 갖고 응원하게 됩니다.
엊그제 화요일에는
LA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가 오랜만에 경기에 나와서
서너 개의 실투로 점수를 주었지만
부상에서 회복되는 과정을 고려하면 그런대로 잘 던졌습니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였는데
“바톨로 콜론”이라는 선수가 상대편 투수였습니다.
올해 44세인 바톨로 콜론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노장입니다.
일본인 타자 이치로와 동갑이지만 생일이 앞섭니다.
여러 해 전에 은퇴한 박찬호 선수와 동갑이랍니다.
1997년에 데뷔해서 아직도 투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20여 년 동안 10개의 팀을 옮겨 다녔으니
“저니맨”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그래도 싸이영 상도 받고,
지난해에는 메이저리그 최고령 홈런타자가 되면서 올스타에도 뽑혔습니다.
도미니카 공화국 출신의 바톨로 콜론은
운동선수답지 않은 체격을 가진
말 그대로 매우 느긋한 선수입니다.
류현진 선수도 만만치 않게 느긋한 성격이지만
콜론에 비하면 조급증에 시달리는 젊은 투수일 뿐이었습니다.
유연한 몸동작으로
공을 쉽게 던지는데
요즘 잘 나가는 다저스 타자들이 잘도 속아 넘어갔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여유를 느꼈습니다.
야구 자체를 즐기는 모습도 발견했습니다.
말 그대로 노장이었습니다.
2.
주일 말씀에서 배우듯이
우리는 세상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저니맨”입니다.
물론, 나그네로 사는 것이 좋을 때도 많습니다.
불안한 만큼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을 더욱더 의지합니다.
세상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여유를 갖고 자신의 삶을 즐기고
마음껏 여러 가지를 시도해 봅니다.
세상에 뿌리를 내리려는 사람들과 경쟁하지 않고
하나님 마음에 합하고,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세우고,
설령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여유 있게 웃어넘기면서
선한 길을 걸어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저니맨, 하나님 백성이 갖는 여유입니다.
메이저 리그의 노장 투수가 갖는 여유와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느긋함입니다.
성경통독에서 전도서를 지나고 있기에
더욱 하나님 백성의 느긋함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고
그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7:29, 새번역)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esiastes 7:29)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서
믿음 안에서 여유를 갖고 하루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7.27이-메일 목회 서신)
그리스도인의 고난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서 형편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어려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잠시 머무는 거류민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그들의 뿌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으로 옮겨졌습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길을 갈 것을 명령합니다. 거짓된 것을 버리고 산 돌이신 예수님을 모퉁이도 삼아서 집을 지을 것을 요청합니다.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포할 것을 부탁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면서 한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데 하나님을 전파하라는 명령이 힘겨워 보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피 뿌림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힘든 길을 기쁨으로 걸어갑니다. 그 길의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로 살기 위한 구체적인 교훈도 제시합니다.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육체의 욕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악하다고 비방하는 세상 사람들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시민의 의무를 다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자유를 악한 곳에 쓰지 말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데 사용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심지어 악하고 까다로운 상전을 만났어도 그에게 순복하면서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습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다반사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고난 받는 것을 모두 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어떤 고난이 닥쳐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도리어 선을 행해야 합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필수입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고난과 더불어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아무 죄없이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간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을 받으시면서 그 길을 닦아 놓으셨으니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가면 고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슬픔을 견딥니다.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전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기 원합니다.-河-
2017년 7월 4주 말씀과 찬양
베드로전서 (1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사는 동안에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이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예언서를 지나면 신약성경에 도착하게 됩니다.
통독할 때 마다 느끼는데
전체 성경 가운데 구약의 분량이 꽤 많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구원의 역사가 그만큼 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생의 시계추를 맨 끝에 갖다 놓고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말씀입니다.
“너의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12:1)
– 전도서 말씀의 주제입니다.
저는 여기서 “청년의 때”를
누구에게나 가장 젊은 “지금 이 순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2.
전도서 3장 12절은 짧지만
마음에 깊은 울림과 실제적인 도전이 있었습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새번역)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Ecclesiastes 3:12)
주일에 살펴보는 베드로전서 말씀도
“우리가 누구인가”로 시작해서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전도서는 그 가운데 한 가지 비결로
“기쁨”과 “선행”을 제시합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얻은
신앙의 기쁨을 생각했습니다.
그 기쁨이 우리 안에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는 것이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선행일 것입니다.
역시 신앙과 삶의 통합이자 연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기뻐하고
주님 주신 은혜 속에서 기쁘게 살기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좋은 일을 하면서 하루를 살기 원합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새번역)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Ecclesiastes 3:12)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
기쁘고 선하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7.20이-메일 목회 서신)
거류민과 나그네
베드로전서 첫 구절에 나왔던 나그네라는 말이 오늘 본문인 2장 11절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거류민”이라는 표현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나그네와 거류민은 정착민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로서 본토에 대한 소속감이나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소아시아에서 낯선 사람들 취급 받으며, 본토인들 사이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베드로의 애틋한 심정에서 우러나온 표현입니다. 소아시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유대인들만 모이는 회당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는 유대인 공동체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동족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도리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당했을 것입니다. 매우 외롭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로마 시민으로 살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사정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공동체에서 퇴출당하고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세상에서 일상의 삶을 살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생업에서도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서 신앙과 인생의 집을 세워갔습니다. 세상 속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가기를 자처했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세상 속에서 거룩한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거류민과 나그네”는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자 막벨라 굴을 묘지로 구입하면서 헷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던 표현입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창23:4). 삶의 터전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 역시 거류민이자 나그네였습니다. 이밖에도 성경에 속에는 하나님 백성을 나그네로 소개하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백성은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 삶이 쉽지 않아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육체가 아닌 영혼을 쫓아 살기를 권면합니다. 구별된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것을 요청합니다. 장차 얻게 될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산소망을 가슴에 품고 힘차게 살라는 부탁입니다.-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