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시는 예수님 (4): 대강절에

대강절(Advent)첫 번째 주일입니다. 마음속에 촛불 하나 밝히고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올해 대강절 기간 동안 참빛 식구들께 두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영적 일기를 쓰면서 한 달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큐티하고 그것을 경건의 일기로 기록하시거나, 편한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기를 쓰실 것을 추천합니다. 영적 일기(spiritual journal)는 신앙과 삶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겉으로 표출하는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깊은 내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줍니다.

 
둘째는 올해 세 번째 <작은 사랑 나눔>으로 지역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노숙자들에게 슬리핑 백과 점퍼를 나눠주는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12월 둘째 주에 예전처럼 가정별 또는 개인별로 헌금한 것을 이름 없이 돕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 한 번 식사비를 절약하는 마음으로 (20불 한도) 참빛 식구들 모두 참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음을 알려주신 후에 그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질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육체에 장애가 있거나 온전하지 않았을 때 몹시 업신여겼습니다. 질병이 주는 고통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판이 더 뼈아픈 시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온전케 되기를 원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이 마른 사람처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셨다고 그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대강절을 맞아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고 회복시켜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복음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기 원합니다. 행여나 우리 안에 굳은 마음이 있다면, 부드러운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기다리기 원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河-

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에서

다니엘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를 거쳐서

다니엘까지 왔는데

앞의 세 예언서에 비교하면 훨씬 은혜롭습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말씀이 나오니

권사님들과 읽기도 편하고 나눔도 풍성합니다.

 

그렇지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제국의 종교와 학문을 익히고

이름도 바벨론식으로 바뀌면서 살아가는

다니엘의 삶이 그리 낭만적이지 않음을 곳곳에서 느낍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섬겨야 하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교만하고

때때로 안하무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영광과 권력을 주셨다고 전할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말 그대로 당시 최고의 왕입니다.

 

2.

내일 나누게 될 다니엘서 4장을 묵상하면서

머리가 쭈뼛 서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서

바벨론의 모든 술사를 동원하지만 아무도 답변하지 못합니다.

결국, 다니엘을 불러서 해석을 부탁하고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는 본문입니다.

 

그 순간,

왕이 다니엘을

박수장 벨드사살아”라고 부릅니다.

 

벨드사살은 다니엘의 바벨론식 이름으로

“벨신이 왕의 생명을 보호하신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심판관”이라는 다니엘의 이름이

바벨론 신과 바벨론 왕을 찬양하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 다니엘을 보고 “박수장(the chief of magician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바벨론 신들의 이름으로 점을 치고

세상을 판단하는 술사들의 대장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그런 일을 하면서 살아남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3.

오늘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다니엘 정도는 아니지만

참빛 식구들 역시 하나님이 없는 세상 속에서

고군분투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상관없는 일을 앞장서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바벨론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을 떠올리면서

끝까지 살아남고

결국에는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조금 일이 잘 안 돼도 너무 상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힘내십시오!

그리고 주일에 함께 모여서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우리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하시고

보호자와 안내자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30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게네사렛 호숫가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한 해가 다 지나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12월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동시에 마음이 바빠집니다. 물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늘 아쉬움은 남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을 보면서 한 해를 알차게 마무리하려는 결심이 서는 것도 사실입니다. 남은 한 달 주님 앞에서 최고의 달로 만들기 원합니다.

 

우리는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한 달 남은 올해 우리를 찾아오신다면, 어떤 일이 생길지 생각해 봅니다. 요즘 세상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미움, 거짓, 폭력이 난무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힘없고 외로운 이웃들을 방문해서 힘과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계심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교회로 초대했을 때, 흐뭇하게 미소지으시며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시고 잠잠히 기뻐하시는 참빛 식구들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는 가나 혼인 잔치에 찾아가셔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감해할 때,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잔치가 더욱 풍성해진 것입니다.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예수님의 기적을 몸으로 경험한 하인들의 믿음이 특별했습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첫 번째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것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열어가실 새로운 세상을 예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의 베테랑 어부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이 되면서 고기 잡기를 포기하고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와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하필 고기를 잡지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을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말씀을 전하시더니,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물을 던졌고, 두 배가 물속에 잠길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육지로 나온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이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만선보다 귀한 인생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할렐루야! -河-

감사는 표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땡큐(thank you)”입니다.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웬만한 상황만 되면 “땡큐”를 연발하는 미국인들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마트에서 조금만 양보해도,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해도, 심지어 상대방의 호의를 점잖게 거절할 때도 앞에 노(no)를 붙여서 “땡큐”라고 말합니다. 어떤 때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시하기보다 형식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땡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20여 년 미국에 살다 보니 제 입에서도 땡큐가 저절로 나옵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땡큐가 나와서 겸연쩍을 때도 있었습니다.

 

감사는 표현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않은 감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감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토다”인데, 이 단어는 “던지다” “고백하다”는 동사에서 발전했습니다. 감사는 던지고 고백하는 것이라는 뉘앙스가 깃들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해 감사를 표출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할 때 감사가 완성될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30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여보/당신을 못합니다. 처음부터 호칭을 정리하지 않으니 저는 아내를 “아무개 엄마”로 큰 애 이름을 앞에 넣어서 부릅니다. 미국 사람들의 애정 어린 호칭이나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보수적(?)입니다. 사랑은 물론 감사의 표현도 서툽니다. 미국에 살면서 많이 향상되었지만, 아직도 더 연습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감사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속에 간직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웠기 때문입니다. 말보다 마음이 중요하다고 배웠고, 말로 표현하는 순간 진심이 연기처럼 사라진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을 왠지 경망스럽게 느꼈습니다. 그에 비하면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하고 자신감 넘치는 표현력에 탄복할 때가 많습니다. 허물없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는 젊은 세대가 솔직히 부럽습니다.

 

물론, 감사의 마음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감사는 속이 빈 강정과 같습니다. 아이작 월튼이라는 영국 작가는 하나님께서 두 개의 처소를 갖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있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속에 있답니다.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축복이 이미 다가오고 있다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속담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감사하는 마음을 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우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마음의 감사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 스쳐 지나간 인연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사람들에게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말이 진리일 정도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손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늘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 식구들, 꼭 필요할 때 함께 해 준 이웃의 도움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한두 번의 도움을 받았어도 감사할 일입니다. 지속되던 관계가 아쉽게 끝났어도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신세진 것이 많아서 저절로 감사가 나옵니다. 세상에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이웃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감사절을 맞습니다. 지난 주간에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면 추수감사절인 오늘은 가까운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하기 원합니다.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이름도 없이 도움을 준 손길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마운 분들을 기억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는 복된 하루가 되기 원합니다. 해피 땡스기빙! (2017년 11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CNN인터넷판에

흥미로운 기사가 떴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도시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콜로라도 볼더가 가장 행복한 도시였고,

우리 지역인 산타크루즈와 동부 버지니아의 샤롯츠빌이

각각 2위 3위를 차지했습니다.

산호세는 6위였고 샌프란시스코는 25위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댄 뷰트너라는 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갖고 행복지수를 매긴 결과였습니다:

만족도 (pride), 즐거움(pleasure), 삶의 목적 (purpose).

 

만족도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1-10의 수치로 표시하게 했답니다.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측정한 것입니다.

 

즐거움을 측정하는 방법이 흥미롭습니다.

지난 24시간 동안 얼마나 자주 미소 짓고, 깔깔 웃고,

기쁜 감정을 느꼈는지 물었습니다.

 

마지막 삶의 목적은

바로 전날 흥미로운 일을 행했거나

재미있는 삶을 위해서 배운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콜로라도 볼더에 사시는 분들이

위의 세 가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셈입니다.

 

샌프란에 사시는 분들의 경우

렌트비와 생활비가 너무 비싸서

첫 번째 행복지수에서 밀렸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지 않으면

웃음의 숫자나 빈도도 줄어들겠지요.

삶을 향한 목적 지수는 샌프란도 높았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2시간여 떨어진

산타크루즈가 2위가 되었다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2.

세 가지 기준을 우리 각자에 적용해서

행복도를 생각해 보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자부심, 행복감, 그리고 삶의 분명한 목적 추구.

 

여기에 한 가지

“감사”라는 덕목이 들어가면 더욱 좋겠습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어느 정도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감사를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감사야말로

우리의 삶의 행복지수를 가늠하는 최고의 기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

가족에 대한 감사,

이웃과 주변 환경에 대한 감사,

거기에 한 해를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준 자신에 대한 감사!

 

남은 한 주간 넘치는 감사로 보내시고

주일에 기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시편 95편 2절)

Let us come into his presence with thanksgiving;

let us make a joyful noise to him with songs of praise! (Psalms 95:2)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23이-메일 목회 서신)

찾아오시는 예수님: 가나 혼인잔치에서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앞에 “추수”가 들어 있는 것은 추수감사절이 농경 사회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찾는다면 가을에 지키는 장막절일 것입니다. 일년 동안 이모작이상이 가능한 팔레스타인에서 마지막 포도와 올리브 추수를 끝내고 감사절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감사절은 옛날 출애굽한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텐트 생활한 것을 기억하면서 일주일 동안 장막에서 지내는 것으로 대신 했습니다. 과거의 어려움을 되새기는 특별한 감사절이었습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 11월 21일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어려움을 이기고 첫해 수확한 것을 갖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인 것에서 추수감사절이 유래했습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1800년대 말, 한국은 전형적인 농경사회였습니다. 여름에는 보리를 수확해서 “맥추감사”를 지켰고, 가을에는 벼를 비롯한 채소를 수확하면서 “추수감사”를 지켰습니다. 선교사들의 영향과 추수가 끝난 후에 지킨 감사절이었기에 11월 셋째 주에 지켰습니다. 이처럼 농경사회의 영향으로 영어 “감사절(Thanksgiving Day)”앞에 “추수”가 붙어서 추수감사절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영어 표현 그대로 일년에 한번 지키는 “감사절”로 부르는 것도 좋겠습니다.

 

감사절은 한 해 동안 크고 작은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민 교회 풍습 그대로 여선 교회가 정성껏 준비한 칠면조 고기와 더불어 감사절 만찬을 갖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잔칫날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말씀 역시 혼인 잔치가 배경입니다. 갈릴리 가나라는 동네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대를 받아서 참석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혼인 잔치는 날씨가 선선해 지는 밤에 며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예수님께서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표적을 행하십니다. 요한 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첫번째입니다. 자칫 멀쑥할 수 있었던 잔치 자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고 계신 곳에 은혜가 임하고 기쁨의 축제가 계속됩니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니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갖는 감사절 만찬에 우리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은혜가 임하길 바랍니다.-河-

더불어 살기

좋은 아침입니다.

 

며칠 전, 한국과 미국에서는

짧은 영상 하나가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아시안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일화였습니다.

회의를 마치면서 참석한 정상들이

서로 교차해서 팔짱을 끼고

우정과 하나 됨을 보여주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교차에서 손을 잡는 대열입니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은 맨 끝에 위치해서

한 손은 한가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간에 섰습니다.

아시안 정상들이 많아서인지 체격이 눈에 띠게 컸습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서로 교차해서 손을 잡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당황했다기보다는

평생 그런 의식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정상이 트럼프의 손을 먼저 가져갔더니

트럼프 대통령은 자기 손을 가져오려고,

아니면 자기 손만 잡으려는 듯 왼손을 갖다 댑니다.

자연히 왼쪽에 서 있던 분은 한 손이 놀면서 머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중에는 팔짱을 꼈지만

난생처음 왼편과 오른편 사람의 손을 잡은 듯이

어색하고 심지어 괴로운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어쩌면 이 분은 독불장군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과 손에 손을 잡아 본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악수할 때도 상대방을 확- 끌어당기는 습관이 있어서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곤 하는데

역시 자기 위주의 행동 방식입니다.

 

2.

홀로서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홀로서기 못지않게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손을 엇갈려 잡으면서 하나가 되고

마음과 삶을 나누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신앙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나 혼자만의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절반의 성공입니다.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서로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가정, 교회, 그리고 일터와 만남이

우리 신앙의 훈련소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우리같이 조그만 교회는

공동체의 삶을 훈련하는데 안성맞춤입니다.

 

3.

손에 손을 잡는 방식과 행동이

어색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대통령이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고 독불장군식이니

우리가 사는 미국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올해도 감사절을 맞습니다.

함께 하는 가족, 교우들, 이웃들, 잠시 잠깐의 돕는 손길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더불어 살아간 우리가 누리는 혜택이고 감사입니다.

 

손에 손을 잡고

더불어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Behold, how good and pleasant it is when brothers dwell in unity! (Psalms 133:1)

 

하나님 아버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

주안의 형제 자매를 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16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