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성금요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에서
각자 정한 대로 경건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금식이 보편적입니다.
육신에 즐거움을 주는 식욕을 억제한 채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세상 것들에 매이지 않고
신앙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교만과 고집스러운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기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가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2.
영어로 성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인데
“Good”이라고 부르는 것이 약간 어색합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Good에 해당하는 영어가 옛날에는 holy와 유사하게 쓰였답니다.
그래서 Good Friday를 우리 말로 옮길 때는
“성 금요일”이라고 합니다.
Good과 하나님을 뜻하는 God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God’s Friday라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Good Friday를 의미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 생각하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이미 알고 있기에 마냥 슬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아니 온 세상을 향한
“선한 사역”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야 말로
악을 선으로 이긴 최고의 사건입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은
말 그대로 Good Friday입니다.
은혜가 임하고 힘이 생깁니다.
3.
올해 성금요일에는
지난 월요일
벨기에 폭탄테러에서
사랑하는 친지들을 잃은 분들을 마음에 품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며 보내도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온 세계가 하나님 앞에서 화해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활주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올해 부활주일에는
성만찬과 세례예식
찬양대가 준비한 특별찬양,
찬양팀과 온 성도님들이 함께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그 은혜를 묵상하면서
고난 주간을 마무리합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5)
But he was wound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upon him was the chastisement that brought us peace,
and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Isaiah 53:5)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안에 생명이 임했음을 깊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25 이-메일 목회 서신)
한국에 있을 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온 도시가 불을 밝히고 빨간색 십자가가 곳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의 높은 십자가부터 여기저기 크고 작은 건물 위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교회가 많이 있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일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친 이유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야만족들이 고안했고 나중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형틀이었습니다. 죄수를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형틀에 달린 그를 저주합니다. 죄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서서히 죽어가고 그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부서져 내립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야만족들을 죽이는 방법으로는 사용될 수 있지만 절대로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달린 사람을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가 국가가 행하는 형틀이었다면, 구약의 율법에서 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사람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율법을 따르면 저주받는 자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잡혀갔을 때,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절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조롱거리였습니다. 율법을 믿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곳이기에 거리끼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이 달리는 나무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오죽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무에 달려서 우리가 받은 저주를 몸소 받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기꺼이 그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자랑이요 능력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을까요? 예,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천 년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2016년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십자가를 건물 위에 높이 달 생각만 했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바꿨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살기로 재차 결심합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이 온 세상에 넘치길 기도합니다.(2016년 3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명성을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들고 “호산나 (구원하소서)”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줄 알았습니다. 영광과 승리의 주님을 기대한 것입니다. 며칠 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게 된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저주를 퍼붓는 폭도로 변했을 것입니다.
종려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의 기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을 묵상하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주간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경건의 훈련에 힘썼습니다. 특별히 기도에 힘쓰면서 사순절을 마무리했습니다. 고난 주간에 맞는 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금요일 (The Good Friday)입니다. 우리 교회는 따로 모이지 않지만, 샌프란시스코 교회 연합회에서 부활절 새벽예배와 함께 성금요일 예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2016년 사순절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부활주일을 맞이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예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세상에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 (He is risen)”라고 알려주는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먹을 때마다 자신들을 위해서 몸을 주시고 피를 흘리신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웃옷을 벗고 대야에 물을 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서로 섬기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자리에는 예수님을 팔은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 돈궤를 맡았습니다. 불과 며칠 전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자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낫겠다고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향유를 팔아서 돈을 챙길 생각을 했다고 알려줍니다. 심지어 가룟 유다를 도둑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이렇듯 돈에 밝은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 자신을 팔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떡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유다에게 주면서 경고하셨고, 그가 다시 돌아오길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탄에 조종을 받은 가룟 유다는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사탄의 간교함과 능력이 3년을 섬기던 스승을 팔아먹도록 유다를 유혹한 것입니다. 급기야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면서 포기하십니다.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떡 조각을 받고 뛰쳐나가서 예수님을 팝니다. 사탄에 넘어간 것입니다. 사탄은 가룟 유다가 가장 관심을 갖던 돈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강점이 약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곳에 사탄이 임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합니다. 깨어 있어야겠습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베이지역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참 좋습니다.
올겨울에는 엘니뇨의 영향으로
비가 충분히 왔기에
어느 해보다 만물에 생기가 돕니다.
아기 손처럼 연두색으로 나온 새싹들을
손끝으로 만져보면 촉촉한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저는 사계절 가운데
봄을 참 좋아합니다.
겨울잠을 깨고
새싹이 돋고, 새잎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살아 있었구나”라는 탄성과 함께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낮과 밤이 같다는 춘분(春分)이 지나고
첫 번째 보름까지 지난 후에
맞이하는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창문 틈으로
맑은 밤하늘에 반을 조금 넘긴 달님이 보입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봄이 주는 축복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부활절이 봄에 있다는 것이
커다란 은혜입니다.
3.
늘 그렇듯이
분주한 일상에 빠져있으면
봄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 잠시 시간을 내서
베이지역의 봄을 만끽하시면 어떨까요?
봄 길을 걸으면서
자연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입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봄길을 걸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려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You mak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in your presence there is fullness of joy;
at your right hand are pleasures forevermore. (Psalms 16:11)
하나님 아버지,
봄 길을 걸으면서
부활의 주님을 묵상하고
우리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17 이-메일 목회 서신)
작년에는 캘리포니아에 심각한 가뭄이 찾아와서 주지사까지 나서서 물 절약을 권유하고 물을 낭비하면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법규가 발표되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연일 가뭄으로 말라가는 캘리포니아 내륙의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고속도로에는 가뭄이 심각하니 물을 아껴야 한다는 게시판들이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하도 심각하게 염려를 하니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엘니뇨가 찾아온 올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지난 십여 일 비바람이 치는 폭우까지 내리고 덕분에 가뭄이 많이 해갈될 것 같습니다. 가뭄이 들 때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올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인간의 예측이 자연현상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일이 힘들 때는 다시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잠잠히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도 자연을 통해서 배웁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어려움이 찾아오면 신앙 안에서 견디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소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도 다시금 되새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찾아오면 지나치게 극단적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심을 믿고 꿋꿋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순절 막바지에 마음을 살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신앙과 삶을 바르게 정돈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기 원합니다. 우리 마음은 말 그대로 전쟁터입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울 때가 그리 많지 않고 맞바람이 치고 성난 파도가 이는 거친 바다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애써 평안함을 추구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 안에 두 가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속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행동은 악으로 치달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악을 다른 말로 죄라고 설명합니다. 죄는 사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이 우리 안에 죄라는 세력으로 찾아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을 심어주고, 선한 마음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즉 사탄의 방해는 어느 곳에나 침투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사탄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 활동하고,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은 선한 것인데, 여기에도 침투해서 갈등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의 모습을 설명하는 성경적 방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우는 것을 두고 비참하다고 고백합니다. 악한 세력의 활동을 몰아내는 것을 두고 고민합니다.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롬8:1-2). 우리에게도 마음의 전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림은 물론 맑은 영혼으로 부활의 주님을 맞기 원합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이틀 동안,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AI) 컴퓨터 프로그램 알파고와
지난 10여 년 정상을 지켜온 한국의 이세돌 9단과의 바둑 시합이 있었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알파고가 두 번 모두
대국에서 승리했습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앞으로 남은 세 번의 대국에서도
이세돌 구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입니다.
두 번 모두 패하면서
이번 대국 자체에 대한 반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됩니다.
거대자본 구글이 지원하고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바둑의 기보를 학습시킨 알파고를
이세돌 구단 혼자서 대항하는 것은 불공평한 게임이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알파고(Alpha-Go)라는 이름대로
이제 “첫 번째로 시작하는 바둑”이라면
앞으로 어떤 인공지능의 시대가 펼쳐질지
솔직히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듯이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 같아 염려되고,
앞으로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의료는 물론 지구환경과
세계평화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니 기대도 됩니다.
2.
호기심에
국내외 기사를 검색해보니
아직은 그리 위험할 단계는 아니랍니다.
게다가
기계는 사람이 장착해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그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의적인 의도나 목적을 갖고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만드는 것은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일을 로봇이 대신하게 되면
사람들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청년 실업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데
로봇까지 뛰어들어서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을 고스란히 로봇의 주인들인 초대형 회사들이 가져간다면
서민들의 삶은 한없이 피폐해 질것입니다.
직업윤리는 물론
부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원칙들도 세워놓아야겠습니다.
이런 일에도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많은 묘책을 만들어낼 수 있겠네요.
3.
어제 수요예배에서 전도서 3장을 읽었습니다.
만사에 때가 있으니 때에 적합하게 행동해야 하고
세상일은 수고의 연속임을 인정하고
현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도서 3장 1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
(Ecclesiastes 3;12)
앞으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악이 아니라 선을 베푸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be joyful)
선을 베풀면서 (do good)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본분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급하게 변하는 세상에 살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꼭 붙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10 이-메일 목회 서신)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특별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의 커다란 주제는 <마음 전쟁>이라는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저서에서 가져왔습니다. 3년 전에 존 스토트 목사님의 <새>라는 책을 갖고 말씀을 나눴던 것과 비슷한 형식입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저 자신의 묵상과 우리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설교가 구성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신앙과 삶을 단지 이 세상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세상살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죽음 이후의 세상은 말 그대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적인 문제에 직면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도 뱀으로 가장하고 나타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아담과 이브 이전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정확히 알려주지 않지만 사단의 기원은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서 시작한다고 전통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수종 들던 천상의 존재이니 인간보다 앞서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갔고, 그 이후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치시는 말씀이기에 영적인 세력인 사단의 활동이 뜸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사탄은 신약성경에서 알려주는 사탄에 비해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악한 세력의 유혹으로 규정합니다.
신약성경의 사탄은 구약성경보다 강력한 힘을 행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대적하는 영적인 세력을 알고 계셨고 그들을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public life)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 계실 때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마귀” “사탄” “악한 영” “공중권세 잡은 자”등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세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대적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등 사탄을 완전히 제압하셨습니다.
사도바울과 복음서 이후의 말씀에도 사탄의 활동이 나옵니다. 특히 바울은 마귀를 공중권세 잡은 영적인 세력으로 설명했고 우는 사자처럼 먹잇감을 찾아 헤맨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만들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등을 돌려서 다시금 원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요.
스탠리 목사님은 <마음 전쟁>이라는 책에서 사탄의 활동을 우리 실생활과 연결합니다. 사탄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예를 들어서 알려주십니다. 사탄의 유혹과 활동이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까지 지나칠 정도로 사탄의 활동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고 신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무장하길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