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차와 객차

좋은 아침입니다.

 

1.

샌프란을 떠나서 미국 대륙을 여행하다 보면

수십 량의 화물 객차를 매달고 철도 위를 달리는

화물열차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인디애나에 있을 때는

화물열차가 캠퍼스를 지나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자칫 건널목에서 열차를 만나면 수십 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미국의 철도 시스템은

동서 대륙은 물론 미국 전체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1860년대에

화물 운송을 위한 철도를 놓기 시작해서

동서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고속도로와 항공편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미국 화물의 30% 이상은 철도가 담당합니다.

석탄과 원유, 원목처럼

트럭이나 비행기로 실어 나르기 힘든 화물을 철도로 운송합니다.

 

화물수송 외에도

미국 전역과 캐나다 일부를 연결하는

승객 전용 철도 Amtrak도 있지요.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현재 미국에서 운행하는 기관차(locomotives)는 3만 대 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관차가 뒤에 달고 가는 화차(freight cars)의 숫자가 150만대에 가깝습니다.

기관차 하나가 평균 50량의 화차를 뒤에 달고 가는 셈입니다.

거기에 실은 화물의 무게를 합치면 어마어마한 힘입니다.

 

2.

저는 신앙이

우리 삶에서 기관차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객차가 아무리 많아도 기관차 한 대가 꼭 필요합니다.

기관차가 강력하면

얼마든지 화물 객차를 매달 수 있지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시편37:4)

Delight yourself in the Lord,

and he will give you the desires of your heart.(Psalms 37:4, ESV)

 

이 말씀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기관차에 해당합니다.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것들은 객차입니다.

 

예수님 말씀도 새겨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Mt 6:33, ESV)

 

우리 마음의 소원보다,

우리에게 더해 주실 그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먼저 기뻐하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라는 당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속사람(inner nature)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고후4:16)

So we do not lose heart. Though our outer nature is wasting away,

our inner nature is being renewed day by day. (2 Cor 4:16, ESV)

 

3.

세상에 살다 보면

정작 중요한 기관차보다

뒤에 매달린 화차(freight cars)에 정신을 쏟을 때가 많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성,

쫓기는 듯 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우리의 속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이끄는 기관차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삶을 이끄는 힘인

기관차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신앙에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뻐하기 원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시 37:5)

Commit your way to the Lord; trust in him, and he will act (Ps 37:5)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주님께서 저들의 힘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8 이-메일 목회 서신)

성찬에 대하여

우리 교회는 분기마다 성찬식을 행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찬을 대표적인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가운데 하나로 보았습니다. 웨슬리 자신도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성찬식에 참여했습니다. 다음은 성찬식을 규칙적으로 행하여야 할 이유에 대한 웨슬리의 설교를 요약한 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성찬식에 자주 참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행함으로 자신의 몸과 자신이 흘리신 피를 기억하라 (눅22:19)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몸과 피의 상징인 성찬을 받을 의무와 특권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의 몸을 내어 주실 때 직접 주신 명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은총이 임합니다. 무엇보다 과거에 지은 모든 죄의 용서와, 현재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며 강하게 하는 은총이 성찬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든지, 어떤 삶의 정황 가운데 있든지, 우리가 아프든지 혹은 건강하든지, 문제가 있거나 평안하거나 우리의 원수는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다는 생각이 들 때 또는 죄의 유혹에 빠질 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용서의 확신을 얻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이 은혜를 성찬에 참여함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의 성찬이 거룩하고 완전한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는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이 요청됩니다. 과거에 지은 죄를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삶의 궤도를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덕을 행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귀히 간직한다면, 죄의 용서함을 받기 원한다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순종할 힘을 얻기 원한다면 기회가 되는대로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있는 사람이나,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자는 할 수 있는 대로 성찬에 참여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돌봐야 합니다. 성찬을 통해서 자연스레 신앙이 강건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온전해질 것이고, 죄나 유혹을 이기고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능력주시는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6월 27일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앨빈 토플러에 대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 부모로부터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기자로 변신해서 언론인, 작가,

무엇보다 미래학자로 유명해졌습니다.

 

제가 직장 초년병이던1980년대 말

한국사회에 앨빈 토플러 열풍이 불었습니다.

<제 3의 물결> <미래쇼크>가 잇달아 번역되면서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앨빈 토플러의 책을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미래쇼크>를 읽으면서

“설마 이런 날이 오겠어”혼잣말을 하면서

책장을 넘기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앨빈 토플러가 말한 대로 변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무척 빨라서

개인이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성”으로 변해서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을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인터넷의 발달 등

정보가 힘이고 재산인 시대가 실제로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 살듯이

사람들의 터전은

농경 시대의 정착촌 개념을 벗어나서

지구촌으로 흩어지는 신유목민의 삶이 되었습니다.

 

우버와 에어비앤비처럼

소비자가 서비스도 동시에 제공하고

너도나도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일종의 “프로슈머(prosumer)”시대가 되었습니다.

 

토플러는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의 예측력이 놀랍습니다.

 

2.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앨빈 토플러도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복잡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

개인은 물론 세상에 먹구름처럼 드리워 있습니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일회용으로 변하고 있으니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고민이 되고

전도서 기자가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되다”는 말씀이 실제로 다가옵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영원하신 하나님,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지혜와 힘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신앙의 소중함을 실감합니다.

 

하나님 앞에 꼭 붙어 있어야지요!

 

세상을 분별하는 명철(understanding)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wisdom)

세상을 이기는 능력 (power)을 주님께 구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견디고, 뚫고 나갈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주님께 구합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2-13)

I know how to be brought low, and I know how to abound.

In any and every circumstance,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facing plenty and hunger, abundance and need.

I can do all things through him who strengthen me. (Phil 4:12-13)

 

하나님 아버지

미래에 어떤 상황이 닥치든지

주님의 능력으로 능히 대처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7.1 이-메일 목회 서신)

                   

숨은 영웅들 8: 바나바

지난 8년 동안 우리와 함께하셨던 친전도사님(Pastor Chinh)께서 8월부터 트레이시에 있는 큰 미국 교회 청년부 담당 사역자로 부임하십니다. 20대 중반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중고등부 아이들과 친구처럼 때로는 형처럼 지내신 분입니다. 중간에 결혼해서 레이철 사모님이 주일학교를 맡아 주시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가 지난 8년여 걸러온 역사에 묵묵히 동참하고 기도해 준 고마운 분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임지에서 목사 안수도 받으시고, 무엇보다 주님의 종으로 귀하게 사용되시길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 영어부와 주일학교를 이끌어갈 좋으신 전도사님이 오시길 기도해 주십시오.

 

지난주에 살펴본 갈렙 역시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맡겨진 일에 충실했던 신앙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45년 동안 간직했고, 그 약속이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몸과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러 올라갑니다. 그는 45년 전과 같이 힘도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약속대로 훗날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받은 헤브론을 차지합니다. 이처럼 갈렙은 말없이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고 주님의 일에 참여한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바나바 역시 주인공은 아닙니다. 바나바는 대부분 “바울과 바나바”라는 식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였기 때문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의 그늘에 가려있었다면, 바나바는 바울 뒤에 숨겨진 인물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자” 라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출신이었고 히브리식 이름은 요셉입니다. 키프로스 섬 출신으로 초대교회에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갖다 놓기도 했습니다(행4:36).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서로의 재산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이것을 통해서 공동생활이 가능해졌는데 그 일에 앞장선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습니다(행11:24). 바나바의 성품과 믿음,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 성령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고 교회를 굳게 세웠습니다. 말없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바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때 바울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소개한 사람도 바나바였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로서 바울과 함께 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나중에는 중간에 선교를 포기했던 마가를 놓고 바울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갈라서지만, 이것 역시 복음이 세상에 골고루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자라는 그의 이름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서 성실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처럼 바나바는 신앙과 성품 그리고 행동이  통합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나바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河-

날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청년 시절부터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주님 앞에 이 몸을 맡길 때 슬픔 없네 두려움 없네.

주님의 그 자비로운 손길 항상 좋은 것 주시도다

사랑스레 아픔과 기쁨을 수고와 평화와 안식을”

 

1절만 소개했지만

조용한 멜로디에 가사가 참 좋습니다.

 

날마다 아니 숨 쉬는 순간마다

어려운 일을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마다 몸과 마음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구합니다.

 

2.

정호승 시인은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에서

“풀을 베는 사람은 들판의 끝을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풀을 베다가 중간에 일어나서 앞으로 보면

“아이구,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았나!”

“아직 요것 밖에 못했나!”

지금 하는 일이 힘들어지거나

기운이 빠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풀을 베다가 일어나서 끝을 바라본답니다.

그리고는 “아, 벌써 많이 베었구나”고 생각하지 않고

“너무 많이 남았구나”고 말하면서

자신을 더욱 힘들게 한답니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입니다”

.

수요예배 잠언과 전도서에서 줄기차게 배웠던 교훈이기도 한데

실제로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추억에 젖거나, 아쉬움으로 마음 상해하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꿈도 꾸지만 동시에 불안해하고 염려합니다.

과거는 현재가 지나간 기억이고

미래는 현재가 장차 이룰 기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포착하고 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지요.

 

2016년도 절반이 훌쩍 갔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이곳(here and now)의 중요성을 되새깁니다.

 

내일 아침 새벽기도회에서 나눌 시편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가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라 (시편 68:19)

Blessed be the Lord, who daily bears us up; God is our salvation. (Psalms 68:19)

 

하나님 아버지

주님 말씀대로

날마다 순간마다 참빛 식구들의 짐을 져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6.23 이-메일 목회 서신)

사랑의 하나님

 청년들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심판)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 사랑으로 포용해주고, 어떤 지점에서는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라는 속성이 함께 있지만, 하나님의 속마음은 사랑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증오와 죽음이 판치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을 빛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온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입니다.

 

한 청년은 요즘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회의가 든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고, 아무 연고 없이 목숨을 잃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신학적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의로우면서도 고난받은 욥이 있지만, 욥기를 수없이 읽어도 뒤죽박죽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흡족한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연대하면서 함께 울 뿐입니다. “언제까지이니까?”라고 그들과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청년들에게는 세상의 그릇된 모습을 바로잡고, 의와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데 참여하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로 많은 희생자를 낸 총기 참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슬람과 관련된 테러인 줄 알았는데, 동성애까지 관련된 증오범죄라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동성애자들이 가는 클럽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수사당국에서는 사건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원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끝에 총기규제에 대한 법안을 만든다니 이번에는 꼭 통과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50명의 희생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종교나 인종, 성적 지향을 떠나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미워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동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누구이든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화들짝 놀랄 소식이 새크라멘토에 있는 한 미국교회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는 젊은 목사가 올랜도 참사를 놓고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희생당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고, 총기를 휘두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것이며,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목사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막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1년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총기 참사가 생각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흑인 교회에 백인 청년이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말미 기도시간에 이 청년은 흑인들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으니 돌아가라고 외치면서 총격을 가해서 아홉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희생자 가족들은 총격을 가한 청년을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증오와 그에 따른 범죄를 막는 방법이 사랑과 용서 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은 희생자 가족들이 표한 사랑에 감동받고 그들의 신앙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청년의 질문,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기는 신앙의 회의,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안타까운 총기 참사를 보면서 이 모든 것을 푸는 열쇠는 찰스턴 교회의 성도들이 몸소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녹입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답입니다.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6년 6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숨은 영웅 7: 갈렙

오늘 우리가 살펴볼 숨은 영웅은 갈렙입니다. 갈렙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갈렙 역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발해서 가나안 땅을 미리 살펴보게 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대표들이 백성들 앞에서 보고회를 갖습니다. 열 지파의 대표들은 가나안 땅에 거인들이 살아서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합니다. 그곳 주민들에 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뚜기와 같다고 스스로 비하합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합니다. 비록 종살이를 했지만 이집트에서 잘 있었는데 괜스레 광야로 데리고 나와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말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충동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함께 정탐하고 온 여호수아와 갈렙이 자신들의 옷을 찢으면서 백성들 앞에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매우 아름다운 곳이고, 그 땅의 주민들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돌을 들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치려고 대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40년 동안 광야를 배회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스무 살 이상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렙에게는 그가 정탐하고 온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 14:24). 그때 갈렙의 나이가 마흔이었습니다.

 

갈렙은 그로부터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마음에 품고 꿋꿋하게 견뎠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두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약속에 대한 확신도 흐려집니다. 시간이 흘러 지체되면 약속을 포기하거나 낙심합니다. 갈렙은 40년이라는 광야 생활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마침내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 명령대로 각 지파에게 공평하게 땅을 분배합니다. 갈렙이 속한 유다 지파의 차례가 되었을 때, 85세가 된 갈렙이 여호수아 앞에 나갑니다. 45년 전에 약속하신 땅을 자신에게 줄 것을 요청합니다:”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수14;12). 자신이 친히 가서 그 땅을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자신이 45년 전과 똑같이 강건하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싸워서 그 산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렙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체력은 물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행여나 자신이 준비되지 못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겁니다. 여호수아가 갈렙을 축복하고, 갈렙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산지를 차지합니다.

 

갈렙이라는 이름은 “개”라는 뜻입니다. 충성스러움의 표시였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갈렙이 여호수아에 가려서 성경에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그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참빛 식구들께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길을 끝까지 걸으시고,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시는 믿음의 장부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