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9): 경쟁/ 창세기 30장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9): 경쟁/ 창세기 30장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함께 나눈 본문은
야곱의 첫째 부인 레아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본문은 레아와 그의 동생 라헬의 외모를 비교했습니다.
라헬은 외모가 탁월했고,
레아는 시력이 약했다고 우리 성경이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눈이 부드럽다(Leah’s eyes are tender)”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레아가 라헬에 비해서 약하고 뒤처지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외모를 갖고 비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에서와 야곱의 반대입니다.
레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의 첫째 부인이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원했는데 아버지 라반이
그 지방 풍습대로 맏딸인 레아를 야곱에게 준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이 조카 야곱을 속였고
레아는 속고 속이는 상황에서
주체적인 의지나 생각을 상실한 객체일 뿐이었습니다.
2.
야곱이 14년을 일하고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라헬만 사랑합니다.
지독한 편애(favoritism)입니다.
야곱은 외삼촌에게 분풀이하듯이
레아를 미워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는 감정을 갖고 라헬과 레아를 대한 것입니다.
이처럼 레아는
야곱이 새로 꾸민 가정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심지어 미움받는 연약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챙기셨습니다.
미움받고 소외된 레아를 보셨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셔서 네 명의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제사장 지파의 조상 레위,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유다가
레아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레아를 향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위로였습니다.
3.
우리 모두 인생을 살다 보면
레아의 시간을 살 때가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은 사랑받고 사는데 자기는 덩그러니 홀로된 느낌,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사는 시간,
외톨이 또는 왕따를 경험하는 시간,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 던져진 것 같은 심정 등등…
자존심이 상하고
자기도 모르게 동굴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는 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레아의 시간은 힘겹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레아를 보시고
레아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말씀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약한 자, 외로운 자, 무력한 자를 향합니다.
아무도 챙기지 않을 때, 하나님이 챙기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 가시는 곳을 가고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세상의 레아들, 레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이웃을 챙기는 것이지요.
멋지고 근사한
그리고 하나님 사랑을 듬뿍 경험하고 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시 41:1)
하나님
레아의 시간을 사는
세상 모든 사람의 편이 되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7. 6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8): 레아 / 창세기 29장 31-35절
레아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14년 동안 일해서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었습니다. 어렵게 얻은 라헬이었기에 레아와 라헬 중에서 라헬을 특별히 더 사랑했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가정에서 한 명의 부인이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있을 때,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던 것도 생각납니다.
야곱의 가족 가운데 레아는 늘 소외된 인물입니다. 야곱의 마음은 언제나 라헬을 향했습니다. 레아의 삶이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시켜서 야곱을 속이고 결혼했습니다. 레아의 의지와 상관없는 그 지방의 관습을 따른 결과였습니다. 눈이 연약하다고 했지만, 실제로 레아의 마음이 연약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고 보니 레아는 늘 주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라헬은 하나님이 돌보지 않으셔도 야곱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레아를 향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마음은 외롭고 약한 사람을 향하심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의 태를 열어 주셨습니다. 레아가 임신해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고 지었습니다.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레아가 아들을 낳았으니 커다란 경사입니다. 야곱의 장남이 태어난 것입니다. 레아가 너무 기뻐서 이제는 자기 남편 야곱이 자신을 사랑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여전히 라헬만 사랑합니다.
레아가 둘째를 낳고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지었습니다.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했다는 한탄을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셋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레위라고 짓습니다. “연합함”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에게 아들을 셋이나 낳아주었으니, 이제는 라헬을 떠나서 자기와 연합할 것으로 생각해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유다라고 짓습니다. “찬송함”이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내가 이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니 남편 야곱의 사랑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으로 들립니다.
야곱이 무시한 레아를 하나님께서 돌보셨습니다. 그에게서 맏아들 르우벤은 물론 훗날 제사장 지파의 조상이 된 레위가 나왔습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최고의 왕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님의 조상인 유다가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레아는 잇사갈, 스불론까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여섯 명의 아들을 낳고 딸 디나까지 낳았습니다. 그래도 야곱은 레아를 무시한 것 같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에 있을 때,
휴전선 임진강 근처 폭포 어장에 가곤 했습니다.
잉어를 키워서 직접 요리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음식점 앞에 있는 어장에서 잉어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수많이 잉어 떼가 몰려들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며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먹이에 무관심하고 저 멀리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는
특이하게 행동하는 잉어들이 꼭 있었습니다.
대부분 모든 잉어가 먹이에 집착하고 서로 싸우는데
세상을 초월한 듯이 자기 삶을 즐기는 잉어들입니다.
2.
임진강 폭포 어장의 잉어들을 예로 들었지만,
세상을 거슬러 살거나 구별된 삶을 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들만의 삶을 창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성경 용어로 말하면 “거룩”입니다.
수요일 에베소서 성경 공부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주신 이유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saints)”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성도답게 사는 것이 요청됩니다.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인데
이것을 성화(sanctification)라고 부릅니다.
겉으로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칫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예루살렘 지도자들 같은 위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됩니다.
3.
요즘은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한 방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고
자기만족의 무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조그만 손으로
작은 먹이 하나만 던져주어도
떼로 몰려와서 먹이를 갖고 서로 싸우고
허덕대는 잉어 떼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금 떨어져서
그리스도인 특유의 여유를 갖고 세상을 헤엄치기 원합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보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거슬러 가는 묘미를 즐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거룩이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일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예수님을 닮아봅시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엡5:1)
Therefore 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Eph 5:1)
하나님
세상을 거스를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9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7): 야곱의 결혼/ 창세기 29장 15-30절
야곱의 결혼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사는 하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우물가에서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납니다. 어쩌면 야곱에게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벧엘의 약속대로 야곱과 함께하시고 인도하신 결과였기에 매우 감사했을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도 우물가로 와서 야곱을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야곱은 자초지종을 모두 외삼촌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14절)는 외삼촌의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외삼촌과 야곱이 유전적으로 뼈와 살이 같다는 뜻이니 외삼촌 역시 야곱의 성품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하란으로 피신 온 야곱이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난 것입니다.
외삼촌 집에 무사히 도착한 것 만도 감사하고 기뻤기에 야곱은 한 달 동안 열심히 일을 도왔을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밥값을 해야 합니다. 야곱은 빈둥거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태중에서 형 에서와 싸웠듯이 목적 지향적이고 전투적인 면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 식구가 한 명 늘어나는 것은 가장에게 큰 부담이었으니 야곱은 외삼촌 마음에 들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한 달을 살았을 것입니다.
외삼촌 라반에게는 딸이 둘이 있었습니다. 첫째 레아는 시력이 약합니다.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가 불확실한데, 라헬보다 레아의 외모가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레아는 야곱이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물가에서 처음 만났던 라헬이 야곱 마음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라헬은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외삼촌이 품삯 이야기를 하니 야곱은 예상외의 요구를 합니다. 우물가에서 처음 만났던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아내로 달라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으니 7년 동안 공짜로 일해서 신랑이 신붓집에 지불하는 선물로 대신하겠답니다.
야곱이 라헬을 얻기 위해서 일했던 7년이 며칠처럼 느껴질 정도로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가 외삼촌 집에 가서 며칠만 있다 오라고 했으니 이제 7년이 지나면 라헬과 결혼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해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하고 저녁이 되니 외삼촌 라반은 라헬이 아닌 큰딸 레아를 야곱에게 들여보냈습니다. 신부 지참금에 해당하는 그의 종 실바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인 사건과 겹칩니다. 큰형 에서 대신 둘째 야곱이 아버지께 들어갔는데, 외삼촌은 큰딸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에게 따집니다. 속으로 아버지 이삭을 속인 것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외삼촌의 새로운 제안대로, 야곱은 7일 후에 라헬과 그의 여종 빌하를 아내로 얻고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야곱에게는 두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여종이 생겼습니다. 야곱의 후손이 동서남북으로 퍼져 나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된다고 하셨습니다(막 12:29-32).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할 때도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때도
곁에 두고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점검할 말씀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된다면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셈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신앙의 본질은 없습니다.
2.
C S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에서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을 구분합니다.
필요의 사랑은
배가 고픈 아기가 엄마 품을 찾듯이
필요에 의해서 성립되는 사랑입니다.
선물의 사랑은
선의로 베푸는 호의이고 말 그대로 선물(gift)입니다.
필요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 중심이라면
선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람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선물의 사랑에 가깝습니다.
C S 루이스는
두 가지 사랑의 경중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필요의 사랑을 이기심의 발로라고 단정하지 말라고 부탁합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필요할 때 누군가의 사랑을 요청하는 것도 정상입니다.
우리 역시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선물의 사랑도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이웃에게 공짜로 나눠줄 때
필요의 사랑과 선물의 사랑이 통합되고 완성됩니다.
3.
우리 모두에게 두 가지 사랑이 모두 요청됩니다.
대부분 사람이 사랑을 받기만 할 뿐
주는데 인색하다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주는 사랑만 진짜라고 주장한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보고 지치고 말 것입니다.
기운이 쏙- 빠진 사람들만 세상에 넘치겠지요.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하나님을 찾고, 이웃을 찾아갑시다.
우리를 필요로하는 이웃이 생길 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선물을 전달합시다.
미리 맛보는 천국,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22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6): 우물가/ 창세기 29장 1-14절
우물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은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길을 떠나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에 도착했습니다. 개역 성경은 야곱이 동방 사람의 땅에 도착한 것에 초점을 맞췄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일어서서 길을 떠나는 행동을 강조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야곱이 그의 발로 서서, 동쪽에 사는 사람의 땅을 향해서 길을 떠났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 하시고 반드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으니, 야곱의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외삼촌이 사는 하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도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야곱도 벧엘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신앙과 삶이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하란에 도착하니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무리 세 떼가 누워있습니다. 목자들이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입니다. 큰 돌로 덮여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아버지 이삭의 부인을 얻어 오라고 아끼는 종 엘리에셀을 하란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여인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 줍니다. 아브라함은 낙타 열 마리도 선물로 보냈습니다. 하란에 도착한 엘리에셀도 우물가로 가는데, 하나님께서 장차 이삭의 아내요 야곱의 어머니가 될 리브가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유모와 함께 가나안 땅으로 왔고 이삭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도 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단지 야곱은 빈손일 뿐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채 우물가에서 하란의 목자들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물으니, 하란에서 왔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을 아느냐고 물으니 그의 딸 라헬이 양을 끌고 온다고 대답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구체적인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돕고 계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드디어 라헬이 양 떼를 몰고 옵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던 큰 돌을 단번에 옮기고 양에게 물을 줍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렇게 했을까요? 또한 살아남기 위한 처세였을 수도 있습니다.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내서 웁니다. 400마일이 넘는 길을 왔습니다. 외삼촌 라반을 만날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의 딸 라헬을 만났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동안의 힘듦과 안도의 울음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이 달려가서 이삭과 리브가의 아들 야곱이 왔다고 아버지 라반에게 알립니다. 라반도 달려 나와서 야곱을 맞이하고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야곱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합니다. 야곱이 갖고 온 선물은 없지만 반가운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라반이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야곱을 받아줍니다. 야곱에게 거할 곳이 생겼습니다. 살 길이 열렸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