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말씀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셨다는 것이 맞을 겁니다.

 

팥죽 한 그릇을 주고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샀고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가로채면서 형의 원한을 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가는 길입니다.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데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그 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꿈을 꿉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었던

땅에 대한 약속,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축복,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고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이 모든 일이 성취될 때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셨고

야곱에게 꼭 필요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

잠에서 깬 야곱이 탄성을 지릅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28:16)

히브리어 본문의 의미를 살려서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확실하게 여기 계셨네요. 그런데 내가 그것을 몰랐습니다”

 

왕관에 섞여 있는 순금의 비율을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고민하던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방법을 알아내고는

“유레카(깨달았다”)를 외치면서

알몸으로 욕탕 밖으로 뛰어나갔다는 사건이 생각납니다.

 

야곱에게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이상의 깨달음이었습니다.

눈이 활짝 열리는 새로운 발견입니다.

그동안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자각입니다.

돌베개를 베고 깜깜한 밤을 보내는 야곱에게 임한 선명한 빛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챈 야곱을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앞으로도 절대로 야곱을 버리지 않으시겠답니다.

그동안의 막막함, 절망, 경쟁심, 욕심, 힘겨움, 두려움이

두서없이 말끔하게 씻겨 나가는 처음 세례 예식과 같은 사건입니다.

 

3.

야곱은 일어나서 돌베개를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하나님을 만나는 깨달음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깨달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확대시킵니다.

 

야곱이 있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집이 없는 야곱인데 그의 믿음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닥다리를 보면서

하늘 문이 열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과 야곱 사이에 freeway가 개통되었습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깨어난 야곱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들은 말씀을 확장하는 야곱의 상상력이 대단합니다.

꿈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벧엘의 사건이

외삼촌 집에서의 20년을 버티는 뿌리 경험(root experience)이 됩니다.

 

이번에 함께 나누는 야곱에 관한 말씀이

우리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을 보고

그동안 묵혀 놓았던 고민이 풀어지는 유레카의 순간의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 하늘 문으로 승화시키는 깜짝 놀랄 상상력도 발휘되길 기도하겠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창28:17)

 

 

하나님

꿈을 있는 상상력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5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5)

하나님의 집, 벧엘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에서가 공공연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 야곱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에서의 말을 들은 어머니 리브가가 야곱을 자기 고향인 하란으로 피신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명목상으로 외삼촌 집에 가서 부인을 얻어 오게 하자는 제안입니다. 이삭도 리브가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이삭이 먼 길을 떠나는 야곱을 축복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8:3-4). 아브라함은 물론 창세기 아담과 이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최고의 축복입니다.

 

야곱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향합니다. 날이 저무니 길에서 노숙합니다. 돌베개를 베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잠을 청합니다. 야곱에게 의지할 것도 없고 당장 안전하게 거할 집도 없습니다. 외삼촌 집에 도착하는 여정도 염려가 되고 그곳에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야곱이 잠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야곱이 쳐다보니 하나님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3-15).

 

하나님께서 야곱과 언제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야곱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야곱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지금 야곱이 누워있는 땅을 그와 자손에게 주실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서 외삼촌이 사는 하란으로 피난 가는 야곱에게 꼭  필요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땅에 대한 약속은 아버지 이삭의 축복과 겹칩니다.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야곱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도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갖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그곳 이름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서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가는 길을 지켜 주시고 먹을 떡과 옷을 주셔서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될 것이고, 땅의 소산으로 십일조를 드려서 그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임을 증명해 보이겠답니다. 꼭 필요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 주셨고, 야곱 역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서원으로 표현했습니다. -河-

 

에이카

좋은 아침입니다.

 

1.

<생명의 삶> 순서에 따라서

아침에 읽는 성경 본문은 예레이먀 애가입니다.

 

앞에 예레미야라는 별칭이 붙은 것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인 칠십인역을 따른 것입니다.

정황상 애가서를 지은 저자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목도한

예레미야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반면, 히브리어 본문 성경에서 애가서는

예언서가 아니라 성문서에 속합니다.

메길롯이라는 다섯 두루마리(아가, 룻, 애가, 전도서, 에스더)와 함께

예루살렘 멸망을 기억하는 절기에 불리던 노래입니다.

 

“슬프다”는 뜻의 히브리어 <에이카>로 시작하는 애가서는

시편의 탄식시와 맥을 같이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조가(弔歌)의 형식도 갖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애가, “슬픈 노래”입니다.

 

2.

애가서의 특징은

1-4장까지 각 구절이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부터 Z로 각 구절이 시작됩니다.

 

이것을 두고 다음과 같은 입장이 있습니다:

1) 알파벳 철자를 차례로 나열해서 노래하는 것에

귀신이나 악령을 쫓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는 고대 사회의 전통을 수용한 것

2) 교육과 암기용으로 알파벳 순서로 기록했음

3) 예루살렘의 무너진 것을 목도한 저자가

자신의 슬픔을 절제하기 위해서 알파벳 순서대로 차분하게 써 내려갔음

4) 예루살렘의 슬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기 위함.

5) 하나님의 징벌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임했다는 입장.

 

애가서 외에도 시편 119편을 비롯한 성경에는

알파벳 순서대로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암기나 교육용으로 그렇게 기록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민족이 당한 고난과 슬픔을 낱낱이 헤아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슬퍼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가서의 또 다른 특징은

“키나(3+2)”라고 불리는 히브리 운율입니다.

처음 셋이 긴 운율이라면, 다음 둘은 짧습니다.

이것도 슬픔을 노래하는 전형적인 문학 기법입니다.

 

애가서 1-3장(3)은 탄식으로 시작해서 소망(3장)으로 끝이 납니다.

4-5장(2)은 탄식과 공동체 기도입니다.

각 구절뿐만 아니라, 애가서 5장 전체가 키나 운율입니다.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합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을 시인으로 만든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운율을 갖고 애가서를 써 내려가면서

예언자는 물론 후대에 애가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3.

<에이카> 슬프다!

시편의 탄식시와 더불어 애가서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포함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잘못으로 인한 어려움이든지

맥락 없이 닥치는 고난이든지

타인으로 인한 핍박이든지

우리 앞에 닥친 고통스러운 현실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슬퍼하고 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마다 애가서를 묵상하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응어리가 부서지고

혼란스러운 생각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정리되고

새롭게 시작할 힘을 얻기를 바랍니다.

 

참지 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애통합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껏 웁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하나님

애통하며 우는 자들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8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4)

에서

 

야곱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에서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서로 싸웠습니다. 장자가 되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정황상 야곱이 형 에서를 이기려고 애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에서는 장자의 자리를 뺏기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태중에서 먼저 나온 것을 보면 에서가 힘이 셌고, 야곱은 집념이 강했을 것 같습니다. 야곱이 힘으로는 에서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는 들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고, 어머니 리브가는 조용하고 장막에 있기를 좋아하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장자권은 아버지의 상속을 두 배로 받는 특권입니다. 이삭의 가정에서는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축복까지 얻게 됩니다. 그런데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눈앞에 보이는 먹거리와 바꾼 셈입니다. 가치보다 물질을 추구했습니다.

 

성경은 야곱을 “조용한 남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조용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완전한”이라는 뜻과 “단순한”이라는 뜻이 있고 대부분 번역자는 “단순한”을 택했습니다. 야곱에게 완전하다는 별칭을 붙여 주기에는 단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서가 야곱보다 단순해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의 계획대로 야곱은 형 에서로 분장하고 연기하면서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아버지의 축복을 놓친 에서는 아버지 앞에서 대성통곡합니다. 에서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버지 이삭이 축복을 해주지만, 에서가 자기 힘으로 살게 되고 그의 후손이 야곱을 앞설 수 없다는 예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절대 아닙니다. 그때부터 에서는 동생 야곱에 대한 원한을 품고 삽니다. 아버지만 계시지 않으면 동생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합니다.  쌍둥이 형제간의 우애와 사랑은 온데간데 없고 긴장만 고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에서가 세상에서 어렵게 산 것은 아닙니다. 에서와 그의 후손 에돔 민족은 하나님을 잊었을 뿐 세상에서 자기 영역을 탄탄히 구축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기준이 아니면 에서도 나름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도리어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 더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에서를 보면서 마치 오답 노트를 점검하듯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약삭빠른 동생에 치인 형의 모습도 발견되니 애잔함도 느껴집니다. 아버지를 속인 야곱에게 어려움이 연거푸 생기는 것도 아이러니입니다. 인생길은 다양합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가느냐가 중요한데, 야곱과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기에…-河-

속임수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야곱 내러티브에서 주목할 것은

속고 속이는 속임수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야곱에게

‘속임’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의 축복권을 가로챕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버지를 속이는 야곱을 방어할 이유도 없습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솔직합니다.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완벽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민낯을 발견하고

그런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 섭리(providence)를 구하게 됩니다.

 

2.

엊그제

미국에서는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이유로

연방 교도소에 수감된 엘리자베스 홈스에 관한 기사가 넘쳤습니다.

 

어릴 때부터 야망이 많았던

엘리자베스 홈스는 스탠퍼드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실리콘밸리에 <테라노스>라는 바이오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홈스가 스무 살이던 2004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엘리자베스 홈스가 세운 테라노스는

작은 양의 혈액만으로 250여 종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에디슨”이라는 키트를 발견했다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테라노스의 설립자 엘리자베스 홈스는

순식간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습니다.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5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존 케래이루(John Carreyrou)기자가

테라노스의 에디슨 키트가 거짓이라는 추적 기사를 보도합니다.

기사의 내용 그대로 엘리자베스 홈스의 연구는 거짓이었습니다.

투자자와 세상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입니다.

 

작년 11월,

엘리자베스 홈스는11년형을 선고받고

엊그제 5월 30일 텍사스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감옥살이가 엘리자베스 홈즈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수용소 부엌에서 접시 닦는 일을 시작한 답니다.

모범수가 되면 9년여 만에 석방될 수 있고 항고도 계획하고 있다지만.

투자자들과 종업원, 세상을 속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 같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입니다.

 

세계가 주목하는 자본주의의 첨단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이기에 더 관심이 갑니다.

욕망의 끝이 어디 인지도 다시 깨닫습니다.

 

3.

아버지를 속인 야곱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도 나름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성경의 인물이어도

잘못한 것을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맑아지고 정직해지길 바랍니다.

 

이웃에게 팔든지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 (레25:14)

And if you make a sale to your neighbor or buy from your neighbor,

you shall not wrong one another. (Lev 25:14)

 

하나님

 

정직한 사람의 편이 되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6. 1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3)

이삭의 축복

 

이삭이 나이가 들어서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이삭은 맏아들 에서를 축복할 작정입니다. 고대 사회에서의 축복은 대개 장자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창세기에서 축복은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후대에 전수하는 사건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고 세상에서 복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약속이 이삭에게 전수되었고, 이제 이삭은 자신이 사랑하는 맞아들 에서에게 전하려는 순간입니다.

 

이삭이 에서를 불러서 사냥해서 별미를 가져오면 자신이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부인 리브가가 들었습니다. 리브가는 에서가 사냥을 나간 틈에 서둘러 야곱을 부릅니다. 염소 두 마리를 갖고 오면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준비할 테니 에서인 척하고 아버지 이삭에게 가서 축복을 가로채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두워졌어도 자신을 알아 볼 것입니다. 게다가 형은 털이 많고 자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발각되면 야곱은 저주받고 집에서 추방될 수도 있습니다. 리브가는 모든 책임을 자기가 질 테니 서둘러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가서 축복받으라고 재촉합니다.

 

야곱이 리브가가 준비해 준 음식을 갖고, 에서의 옷을 입고, 목과 팔에 염소 털을 붙이고 이삭에게 갑니다. 자기가 에서인 척하면서 아버지를 속입니다. 눈이 어두워진 이삭은 의심하면서도 에서라고 생각하고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산 야곱이 실제로 형 에서에게 가는 축복까지 가로챈 것입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아버지 이삭을 찾아 가지만, 축복은 이미 야곱에게 돌아갔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만큼 축복이 중요했습니다. 에서가 분노합니다. 아버지 이삭은 몸을 떨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의 목숨을 빼앗겠다고 말합니다. 축복은 기쁜 일인데 그것이 이삭의 가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습니다.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은 불편한 사건입니다. 게다가 네 식구의 입장이 제각각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부인 리브가와 둘째 야곱에게 철저히 속았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서 장자권을 팔아버렸던 에서는 장자에게 돌아오는 축복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아버지를 속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리브가는 창세기 본문에서 등장해서 활동하지 않습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외삼촌 집으로 몸을 피하고 험한 세월을 삽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이 불편할 수 있고, 작은 자가 큰 자를 다스릴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에 전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삭과 에서, 리브가와 야곱의 입장이 되어서 본문을 꼼꼼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라는 질문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것 같습니다. -河-

조금만 더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올해도

다섯 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른 지 해마다 실감합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뭔가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자신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우리 인생이 생각처럼 펼쳐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는 조급해집니다.

 

인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고흐는

동생 테호에게 의존하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명해지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자

자기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등

굴곡의 삶을 살다가 37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고흐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작품이 세상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되고

20년 후에는 동생 테오와의 편지가 책으로 출판되는 등

우리가 알다시피 세계적인 화가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조금만 더 견디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면

자신의 진가를 알아주는 세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2.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오면서 물이 부족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흘 길을 갔지만 물이 없었습니다.

마라(쓴물)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쓴물만 나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고 모세에게 나와서 불평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뭇잎을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열두 개의 우물과 일흔 그루의 종려나무가 있는

사막의 오아시스였습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렸으면

불평하지 않고 엘림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3.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인생길을 걷기에

미래를 생각하면 늘 불안하고 조급해집니다.

급한 대로 임시변통을 하는데 그 행동이

고흐나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보듯이 안타까운 결정일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조금만 더 라는 말이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조금만 더 견뎌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가보는 겁니다.

조금만 더 노력하는 겁니다.

조금만 더 기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인생의 오아시스 엘림이 눈앞에 있음을 믿고 걷는 것이지요.

 

오늘 하루도

올해 우리 교회 표어 그대로

<푯대를 향해서> 한 걸음 더 나가는

‘조금만 더’의 발길이 되길 바랍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곁에 장막을 치니라 (출15:27)

 

 

하나님

중간에 멈추지 않고

조금만 더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25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