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결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한국의 1호선 경인선 전철에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1974년에 경인선이 개통되었는데
고등학교 시절인 1978년부터 이용해서
대학과 직장 모두 20년 동안1호선 전철을 탔으니 말입니다.

 

제가 다니는 구간의 역 이름은 물론
각 역까지 걸리는 시간도 외우고,
혹시나 갈아탈 때 좋은 탑승 위치,
멀리 갈 때는 어디서 자리가 나는지까지 꽤 차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퇴근 시간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서
직장에 가면 와이셔츠가 땀으로 젖고 구겨질 때도 많았습니다.
지옥철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2.
한국에 올 때마다
여전히 1호선 전철을 이용합니다.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발전했지만,
전철과 지하철도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서울 시내 어디든 땅을 파고들어 가면 지하철이 나올 듯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리바리,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방인이지만
전철이나 지하철을 탈 때마다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특별한 국가인 것 같습니다.

 

3.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설치했습니다.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고
출발하고 싶은 시간 또는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면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앱입니다.
환승할 때 몇 번째 칸에 타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종결자”가 무슨 뜻이냐고
chatGPT에 물으니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습니다:
“종결자는 어떤 일을 끝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종결자 앞에 수식어를 붙이면
특정 분야에서 끝을 본 사람이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 종결자> 성경을 모두 마스터한 사람
또는 성경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
<사랑 종결자> 사랑에 목숨을 걸고 끝을 본 사람
사랑이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줄 알고
사랑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사람.

 

종결자라는 말은
교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지하철 종결자>라는 앱을 사용해 보니
교만보다는 섬김에 무게가 실립니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하는
말 그대로 종결자이기 때문입니다.

 

4.
누군가에게 종결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정보와 섬김,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섬김의 끝, 사랑의 끝, 하고 있는 일의 끝,
신앙의 끝에 이르는 종결자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죽음까지 이기신 최고의 종결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역시 그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전도서 7장 8절)

 

하나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0 이-메일 목회 서신)

우리

좋은 아침입니다.

 

1.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친근한 용어가 들립니다.

 

“우리 비행기는…”
이라고 시작하는 멘트인데
주기도문 첫 번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우리가 생각났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마음을 안심시켜줍니다.
함께 간다는 뜻입니다.
누구도 배제하거나 따돌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는
여러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눌 정도인데
그것도 혼자 여행할 때나 그렇지
대개는 함께 가는 가족이나 일행과만 소통합니다.

 

그런데도
비행기 승무원은 “우리 비행기”라고 했습니다.
목적지가 같으니 우리입니다.
비행기라는 큰 캡슐에 몸을 맡긴 사람들이니 우리입니다.

 

2.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our Father)”라고 부르셨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말 그대로 우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었으니 그리스도인들끼리
똘똘 뭉쳐서 우리 공동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재산까지 공유했고
어려운 교우들을 돕고
예수님 안에서 남녀노소는 물론 신분까지 초월하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부러울 때도 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그때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라기보다
한계를 가진 우리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3.
우리 교회는 다양함을 존중합니다.
다양함 속에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우리라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이지요.

 

유니폼을 입듯이 한 가지 색깔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들, 정말 중요한 것에서
“우리”를 찾고 그것을 기초로 공동체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으려는
목적이 같습니다.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처럼
하나님 나라라는 목적지도 같습니다.

 

주일마다 같은 공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 공동체는 서로를 많이 알고 친밀합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기에 혹시라도
외롭거나 배제되는 참빛 식구들이 없도록 서로 챙겨야 합니다.
“우리”라는 말을 쓰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늘위에서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리며 기도하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예수님의 기도가 실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넘어서 ‘우리’ 하나님이 되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시편 147:5)

하나님,
같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
참빛 식구들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13이-메일 목회 서신)

이렇게 기도하라 (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여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도 이뤄지길 기도했습니다.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다음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건강함을 위함이었고, 죄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영적인 건강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시험(temptation)에 들지 말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성경에서 악한 것들은 악한 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져 주시길 기도하는 것은 악한 세력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에 굳건히 서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순례길에 시험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적인 시험은 마음에 의심과 부정적인 회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약속에 시비를 겁니다. 교회 생활이나 가정생활에도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언행이 시작되고 자꾸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시험에 빠집니다. 악한 세력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외적인 시험은 유혹입니다. 요즘에는 세상의 유혹이 매우 큽니다. 관계가 깨지면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시비와 분쟁과 경쟁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험입니다.

 

시험에 대비하고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막14:38).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시험을 견디고 극복해야 합니다(고전10;1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있듯이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시험이 닥치면 마르고 맙니다. 좋은 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신앙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앞에 나오는 “다만”이 눈에 띕니다. 헬라어 본문은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한 모든 것에 더해서 악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통한 자유와 해방입니다. 악에서 선으로 옮겨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악에서 구해주시길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여섯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썼습니다: “주님,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피할 길을 마련하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소서.” -河-

안목

좋은 아침입니다.

 

1.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인 1463년
이탈리아 피렌체 대성당은
아고스티노 두치오 라는 조각가에게
성단 바깥쪽 벽을 장식할 다윗상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습니다.

 

아고스티노는
채석장을 직접 찾아가서 5.5미터 길이에
11톤이 넘는 돌을 선정했습니다.
이 돌을 피렌체까지 옮기는 데 자그마치 2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돌을 갖고 다윗상을 만들기로 한 아고스티노는
돌의 모양만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중간에 해고됩니다.

 

11톤이 넘는 큰 돌은 애물단지가 되어서
1501년 스물여섯 살의 청년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나타나기까지
40년 가까이 성전 뜰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3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각상 가운데 하나인
5미터가 넘은 다윗상을 완성합니다.

 

2.
미켈란젤로의 다윗상은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투에 나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외에 믿을 것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벌거벗은 다윗을 조각했을 것입니다.

 

왼손으로 물매를 어깨 뒤로 감추었고,
오른손에 물맷돌이 든 주머니를 꼭 쥐고 있습니다.
다리는 당시의 기법을 살려서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극대화했습니다.
긴장한 다윗의 표정에서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다윗이 준비한 물맷돌만 효력을 발휘한다면
다윗의 승리는 떼놓은 단상이었습니다.
칼을 들고 있는 골리앗이 근접 전투만 가능했다면,
다윗은 거인 골리앗에게 접근하지 않고도 물맷돌을 던져서
커다란 과녁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기발한 전투 방식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골리앗은 다윗의 적수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골리앗을 향해서 나가는
다윗의 비장한 모습을 조각했습니다.

 

3.
채석장의 큰 돌이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다윗상으로 거듭나기까지
수십 년이 필요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산처럼 큰 돌을 보고 지나쳤을까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벌였다고 한마디씩 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십 대 중반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커다란 대리석 속에서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는
다윗의 모습을 상상했고 그것을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시 부활이라는 엄청난 자원이
피렌체의 큰 돌처럼 우리 신앙과 삶에 방치되어 있지는 않은지요?

 

말과 생각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고
그 꿈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까요?

 

부활 속에 숨겨진 놀라운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행2:32)

 

하나님,
부활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6 이-메일 목회 서신)

이렇게 기도하라 (5)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이어서 등장하는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절)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후에 다섯 번째 기도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용서라는 실제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연결되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뜻 없는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에 그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를 헬라어 본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시고(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죄를 빚으로 표현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빚을 모두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천국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노동자 한 명의 6천만 일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가족들 모두 종이 되고 남은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빚진 자가 모두 갚을 테니 조금만 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백 데나리온(100일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오면서 그 사람을 고소해서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원래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서 감옥에 가둡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우리에게 빌려 간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고서 작은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꼭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河-

 

일용할 양식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를 향한 첫 번째 기도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를 공부했습니다.

 

출애굽 할 당시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같이
하루분 양식인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매일의 양식을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매일같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로마 시대 군사들에게 지급된 하루분 식량에 해당하는
일용할 양식은 오늘 꼭 필요한 것입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니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2.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시고
필요한 양식만 공급해 달라는 잠언 말씀도 나눴습니다.
가난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잊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난은 ‘상대적’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가난한 것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느끼는 상대적 빈곤이 더 큽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곧 가난이네요.

 

살아가는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욕심껏 더 가지려다 보니 가난을 느낄 뿐입니다.

 

재물의 많고 적음도 ‘상대적’입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만족하지 못하면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재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면 큰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일용할 양식만 필요합니다.
모자라는 것과 남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맞지 않습니다.
그 기준은 지금 자리에서 “감사”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떡 한 덩어리를 놓고 감사기도를 드리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전혀 가난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아도 감사가 없다면, 어리석고 안타까운 인생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감사가 자리 잡고 있는지요!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한다면 최고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은혜로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한 발짝 더 나가면, 조금이라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사순절은 금식해서 남은 양식을 갖고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는 기간임도 기억합시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실
하나님을 꼭 붙들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언 30:8-9)

 

하나님,
오늘 하루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3. 3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