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대란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CDC(질병관리본부)에서
백신을 맞은 경우 산책, 야외 소그룹 모임에서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습니다.
안심할 정도는 아니지만, 백신 이후에 상황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작년 이맘때
미국은 마스크 대란을 겪었습니다.

 

마스크 착용이 일상이 아니었던 미국에서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 자체가 어색했습니다.
대통령이 마스크를 하지 않고 버젓이 공식 석상에 등장하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마스크 자체를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의료진들까지 마스크가 부족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마스크를 선물해주고 선물 받는 것이
생명줄을 얻는 것만큼이나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2
일 년이 지난 지금,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공공건물은 물론 작은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입장 불가입니다.

 

게다가, 이제 마스크가 남아돕니다.
웬만한 상점에 가면 쉽게 마스크를 구할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격세지감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명줄처럼 귀했던 마스크가
조금씩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것이 아쉽습니다.
지난 일 년 동안 마스크야말로 백신만큼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준 최고의 무기였는데 말입니다.

 

3.
작년의 마스크 대란이 엊그제 같은데
일 년도 안 돼서 마스크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첫째로, 어떤 일이 닥쳐도 초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마스크뿐 아니라 물과 휴지, 손 세정제를 두고도 전쟁을 벌였는데
지금은 넘쳐난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지천입니다.

 

우리가 조급하고 초조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언젠가는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차분하게 시간을 벌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둘째는,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들은 금세 사라짐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토록 귀하던 마스크도 공급이 늘어나면서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물품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마스크 업체들이 도산 위기에 처했다는 기사도 읽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애지중지 여기고
온 힘을 다해서 추구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허무하게 사라지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4.
금세 사라질 것들에 마음을 쏟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눈앞에 닥친 문제 앞에서
초조해하고 조급해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큰 그림을 볼 줄 압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붙들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추구할 것은 영원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앞으로 주일 예배에서
로마서의 첫 일곱 구절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들림 없이 꼭 붙들고 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깊이 생각하고
믿음의 길에 견고히 서는 시간이길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롬1:16)

 

하나님,
진실로 귀하고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마음에 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29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11

나오미의 기쁨

 

룻기 마지막 시간입니다. 룻기(1:1-6)는 베들레헴에 밀어닥친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내려간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족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켜서 10년을 살았는데 그들마저 죽었습니다. 깜깜했습니다. 빛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쳤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는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떠날 때는 두 손 가득했는데 돌아올 때는 빈손입니다. 나오미는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오미 (기쁨)가 아니라 마라(쓴디 쓴)로 부르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룻이 보리 이삭을 주으러 보아스의 밭에 가면서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을 보살핍니다. 결국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룻과 나오미의 삶에 햇살이 비췄습니다. 룻기는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오벳(섬김)이 태어난 것과 유다의 아들 베레스로부터 시작한 10대의 족보 끝에 오벳의 손자 다윗이 태어난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4:13-22)대로 보아스와 룻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룻기의 하나님은 뒤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을 돌보셔서 양식이 생기게 하신 것(1:6)과 보아스와 룻 사이에 아기를 갖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이었습니다. 모두 생산적인 일입니다.

 

룻기의 마지막에 보아스와 룻은 무대에 없고 나오미와 베들레헴 여인들이 본문을 주도합니다. 처음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마중 나왔던 베들레헴 여인들이 이번에는 나오미를 축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의 대가 끊이지 않게 하셨고, 아기가 이스라엘 중에서 유명해지길 기도합니다. “생명의 회복자” 즉, 나오미가 그동안 겪었던 모든 어려움을 보상해 줄 아기입니다. 회복이란 단어 속에 들어 있는 히브리어 동사 <슈브>는 돌아서다는 뜻입니다. 룻의 슬픔이 기쁨으로 돌아섰습니다. “노년의 봉양자”를 얻었으니 이제 나오미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품에 안고 그를 기르기로 작정합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곧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입니다.

 

이처럼 룻기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면서 쓰디쓴 과거가 새롭게 회복되고 다윗과 멀리 예수님까지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몸소 실천한 베들레헴 사람들과 뒤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이뤄낸 합작품입니다. 룻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선한 믿음과 삶도 장차 귀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河-

 

슈퍼리그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직은 섣부르지만
미국의 경우 백신 접종이 꾸준히 이뤄지면서
팬데믹이 조금씩 걷혀가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팬데믹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고 때로는 염려가 됩니다.

 

세상의 변화 가운데 한 가지는 “격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빈부격차, 부자와 가난한 나라의 격차, 잘 나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격차 등등
세상이 하나가 되기보다 차이와 간격이 넓어지면서
더욱 치열한 경쟁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큽니다.

 

축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엊그제 발표된 유럽의 “슈퍼 리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현재 세계 축구를 이끄는 유럽의 강팀들로 구성된
말 그대로 슈퍼 리그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팀들은 최고의 선수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축구 팬들을 확보한 구단들입니다.

 

거기에 미국의 JP Morgan 금융 그룹이 6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고
슈퍼 리그에 참여하는 클럽들은 수백억 달러의 보너스를 받고 시작하기에
펜데믹 기간의 적자를 메울 수 있고,
앞으로도 TV 중계권료를 비롯한 상당한 자본이 슈퍼 리그에 투입되면서
참가한 클럽은 물론 선수들도 돈방석에 앉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자칫 축구판이 ‘자본(돈)’에 의해서 좌우될 가능성,
최고 구단들만의 리그가 되면서
풀뿌리 유럽 축구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 등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벌써 탈퇴하겠다는 팀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과 유럽 축구연맹의 전횡과 부정부패가
새로운 리그를 탄생시켰다고 해도
슈퍼 리그가 슈퍼 자본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께름칙합니다.

 

2.
어디 축구판만 그럴까요?
팬데믹 이후에 많은 경우, “돈”에 의해서 호불호가 정해질 가능성이 크고
잘 나가는 회사나 사람들은 슈퍼 리그로 올라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어도 뒤처지는 격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산다는 말, 희생이라는 덕목,
룻기에서 배운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과연 세상에 찾아볼 수 있을는지요!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 희생, 내려감, 손해, 공정, 분배를 바라시는데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함을 알지만,
워낙 세상 물결이 강해서 우리도 모르게 휩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쉽지 않고 고민이 깊어집니다.

 

3.
함께 대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이 길을 걷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셨을 것입니다.

 

세상 물결이 몰려오면 손에 손을 잡고 방어하고
더불어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근사한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모두 참빛 공동체 속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는 동지임을 확인하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살기로 격려하고 도전하고
‘하나님 나라 슈퍼 리그’를 만들어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하나님,

오늘도 제국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하시고 하늘의 지혜와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22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10

선한 사람들

 

룻기를 읽으면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같이 선하고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을 실천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입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각자 자기 좋은 대로 행하던 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없던 깜깜한 암흑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훗날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날 베들레헴에 살았던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룻기를 시작하면서, 로마서 8장 28절을 옆에 두고 말씀을 나누길 제안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정에 상상하기 힘든 재난이 밀어닥쳤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쳤다는 소식을 듣고 룻과 함께 돌아온 나오미는 완전히 빈손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더 이상 “나오미 (기쁨)”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 (쓰디쓴)”로 부르라고 했을까요!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맨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홀로 된 두 여성이 살아가는 것이 무척 힘들던 시대였기에 두 사람의 삶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보리밭에 가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오면서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양식을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룻기 3장 말씀대로 룻이 보아스에게 프러포즈 하면서 룻은 물론 나오미 가문이 보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설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빛이 비친 것입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일상을 살았습니다. 큰 그림을 볼 여유도 없었고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일상이 모자이크처럼 맞춰지면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복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섭리)이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셨습니다.

 

룻기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합니다. 서로 복을 빌어주고,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을 실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한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감사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예수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우리도 룻기의 주인공들처럼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원합니다. -河-

묻어가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마다 룻기를 읽어가면서
제 마음에 깊이 다가오는 것 가운데 하나는
룻기의 주인공들이 만들어가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꼭 붙어서
베들레헴에 돌아오고,
시어머니를 위해서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으로 나갑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행여나 자신이 죽은 후에 모압(이방)여인 룻이 홀로 사는 것이 염려되어서
그를 돌봐줄 안식처, 남편을 생각합니다.

 

나오미가 마음에 두고 있는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는
예수님을 닮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보리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까지 귀하게 여기고
일꾼들도 주인인 보아스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압 여인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민족이나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
차별없이, 아니 더 세심하게 룻을 챙깁니다.

 

룻에게 베푼 보아스의 사랑을
시어머니 나오미는 “헤세드”라고 표현했습니다.
보아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를 돌본 룻의 사랑을 “헤세드”로 칭찬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입니다.
신약의 헬라어 <아가페>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룻기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 축복하고, 헤세드(하나님 사랑)를 실천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섭리)을 경험했습니다.

 

2.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 시대는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하던 때인데
룻기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매우 인격적이고 서로를 배려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갑니다.

 

룻기를 읽으면서
저 자신이 당시의 베들레헴에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보아스 기업의 종업원이었다면
기쁜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하고
모압 여인 룻을 도왔을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이 속한 친족이었다면
홀로 된 여성 룻과 나오미를 돌보는데
조그만 힘이라도 보탰을 것입니다.

 

이렇게 룻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선한 사람들의 배려와 격려를 통해서
저 역시 저절로 선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3.
공동체의 힘입니다.

 

좋은 공동체가 세워지면
그 속에 속한 구성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한 길을 갑니다.
서로 ‘묻어가는 것’입니다.

 

흩어져서 예배한 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든 시간을 함께 겪고 있는 참빛 식구들,
신앙의 동지들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서로 묻어갈 정도로 힘 있는
주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함께 그 길을 갑시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 4:12)

 

 

하나님,
서로에게 격려와 도전을 주는
참빛 공동체로 자라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 15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 9

타작 마당에서

 

4장으로 이뤄진 구약성경 룻기는 1장에서 모압으로 피난 간 나오미 가족에 닥친 재난을, 2장은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보아스라는 유력한 자를 만나서 살아남는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처음 만나는 장면부터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보리 이삭을 줍기 위해서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왔습니다. <우연히 – 마침>이라는 공식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하나님의 섭리를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하는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서 예수님이 생각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룻은 보리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보아스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우면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3장은 룻기의 절정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을 불러서 안식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룻이 홀몸으로 평생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있지만, 앞으로 이스라엘 태생도 아닌 모압 여인 룻이 혼자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매우 특별한 이야기를 합니다. 보아스가 밭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을 때, 보아스를 찾아가서 먼저 프러포즈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룻이 보리 이삭을 주워 올 때마다 보아스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전했고, 그때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름대로 확신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룻을 보아스에게 보내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시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누구냐고 물으니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9절)고 또박또박 이야기합니다. 옷자락을 덮는 것은 보아스가 룻을 처음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날개깃으로 룻을 덮어주실 것을 바라면서 축복했는데, 룻이 그 일을 지금 보아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친절하게 룻을 맞이합니다. 행여나 룻에게 피해가 생길까 염려되어서 아침까지 자신과 함께 있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줍니다. 보아스도 룻이 마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대로 일이 성사되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가 인연을 맺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두 사람 위에 매우 구체적으로 임했습니다. -河-

염려와 불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 성경 공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공부할 주제 중에
두려움과 염려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두려움(fear)은 사람, 상황,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느끼는 말 그대로 공포입니다.
적당한 두려움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하지만
지나친 두려움은 그 자리에서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듭니다.

 

꼭 필요한 두려움도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敬畏 the fear of God)라고 부릅니다.

 

두려움과 달리
염려(worry)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상황을 미리 걱정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안이 없기에 두려움보다 강도가 작을 수 있지만
생각이나 삶을 어수선하게 하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면서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서 생기는 염려의 대부분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들임을 알면서도
연약한 우리 마음이 염려에 휩싸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부탁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두려움과 염려가 우리를 억누르고 신앙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가 “불안(anxiety)”입니다.

 

불안은
마음과 생각이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면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입니다.
불안하면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2.
팬데믹이 길어지고
앞길에 대한 막막함, 맥락 없이 닥치는 어려움 등이 닥칠 때
두려움, 염려, 불안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우리가 진작 두려워할 대상이 하나님임을 다시 기억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해야 합니다.
피난처와 방패 되시는 하나님 품으로 달려들어야 합니다.

 

소리 없이 침투하는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소리 없이 침묵하면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염려를 물리치는 길은 기도입니다.
염려가 생기면 그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던지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훈련해서 습관이 되면 어느 정도 염려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불안과 염려는 비슷합니다.
대신 불안이 심해지면
상담을 받거나 의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습니다.

 

일상적인 불안이라면
그 순간에 소리 내서 기도하거나 찬양하실 것을 권합니다.
찬양은 어두운 세력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질 때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찬양하면 불안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번에 끝날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염려, 불안이 찾아올 때마다
실천해야 할 신앙 훈련입니다.

 

3.
부활절 이후를 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과 능력,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 안팎에서 밀려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부활의 능력으로 극복하기 원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부활의 주님을 따라서 주어진 인생길, 신앙의 길,
일상을 살기 원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부활을 살게 하소서.
찾아오는 두려움, 염려, 불안을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