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아래 개들도

좋은 아침입니다

 

1.
그동안 주일 예배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에 “개(dog)”가 등장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개 취급하셔도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도와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개”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자녀”에 반대되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험한 표현입니다.

 

물론, 본문의 개는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라기보다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작은 개)에 가깝습니다.
주인의 식탁 앞에 앉아서 기다리는 강아지를 떠올리면 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자녀)의 잃은 양을 위해서 오신 것을 인정합니다.
대신, 식탁에서 개에게 던져주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태15:28)고 말씀하시니
그 시각에 험한 귀신에 들려 있던 딸이 회복되었습니다.

 

2.
개는 인류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숙한 동물입니다.
사냥은 물론 운송 수단, 양몰이를 비롯한 경비견으로 사용되었고,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의 역사도 제법 깁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개를 신의 형상으로 사용하고
주인이 죽었을 때 함께 무덤에 묻을 정도로 거룩하고 친숙한 동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은 가족처럼 대우받는 최고의 애완동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개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선, 식습관에 대한 구약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을 개에게 던지라고 하니
개는 부정한 음식을 먹는 동물이고 개 자체가 부정합니다(출 22:31)

 

엘리야 시대의 가장 악랄했던 왕 아합과 그의 왕비 시돈 출신 이세벨이 죽었을 때
개들이 그들의 시체와 피를 핥아먹을 것이라고 했으니
죽은 것을 접촉하는 개 역시 부정합니다(왕상21:23-24).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도
구약과 같은 맥락입니다. 부정한 이방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개를 비교적 좋게 묘사한 것은 경비견인데
그것도 짖지 못하는 경비견이라고 했고(사56:10)
욥기에는 양을 지키는 개라는 표현이 나오는 정도입니다(욥 30: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들어와서
복음의 정신을 흐리고 교회를 헤치는 사람들을
거리를 배회하는 들개에 비유했습니다(빌3:2).

 

요한계시록에서도 개들은
점술가, 음행하는 자, 살인하는 자, 우상숭배하는 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성 밖에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3.
그러니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 “개”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심하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여인의 신분, 자존심, 가능성을 모두 망가뜨린 말씀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을 개에 대입해서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대답했으니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을 것입니다.

 

그만큼 다급했고, 그 정도로 예수님을 신뢰했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한길만 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닮고 싶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끝까지 예수님을 쫓기 원합니다.

 

다급한 기도 제목을 갖고
예수님을 찾고 부르는 참빛 식구들에게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참빛 식구들이길 기도하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태 15:28)

 

하나님,
저희도 큰 믿음을 갖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1. 9. 23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