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찬양: 우리 보좌앞에 모였네
https://www.youtube.com/watch?v=jibG3-wAqr0
주일학교 특별활동


올해 부활절도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서 맞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특별한 부활절이 한 해 더 연장된 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흩어져서 예배했기에 영상으로 예배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부활절을 맞고,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을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년을 기약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제자들 역시 흩어지고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연거푸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바울 자신의 전도도 헛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험과 당시 살아있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제자들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상과 세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역사이며 삶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개입하셔서 생긴 사건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올해도 흩어져서 부활절을 맞지만, 부활만이 갖고 있는 생명, 사실, 능력이 참빛 식구들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예배에서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는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면서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이민간
엘리멜렉의 가족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과 그의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고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만 살아남았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꿈을 갖고 떠난 이민길에
예상치 못한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와
10여년을 모압에서 이민자(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오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 지
당시 홀로된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모압 출신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에 옵니다.
어머니의 민족이 자기 민족이 되고
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기로 맹세하고 떠난 여정입니다.
나오미는 고향으로 역이민을 했지만,
모압 출신 룻은 베들레헴의 이민자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온 룻은 언제나
“모압 출신” “모압 여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습니다.
선민의식이 컸던 이스라엘에서 룻이 겪었을 나그네 서러움이 느껴집니다.
3.
룻과 나오미만 이민자로 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처음부터 나그네(이민자)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가나안 땅에 온 아브라함,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동네로 피난 갔던 야곱,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팔려간 요셉과 그의 후손들까지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나그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함께 특별히 나그네를
환대하고 대접하라고 부탁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셨습니다.
3년 공생애 동안 머리 둘 곳 없는 노숙자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사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대신, 당시에 나그네로 살았던 땅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나그네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나그네로 소아시아와 유럽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4.
요즘처럼 미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심정이
복잡한 때도 별로 없었습니다.
인종 차별은 미국의 고질적 문제라고 생각했고
1992년 LA 폭동과 소소하게 일어나는 유사한 갈등으로 경각심을 가졌지만
팬데믹 이후 아시안 혐오가 미국의 큰 사회문제가 되고 보니
우리의 이민 생활이 나그네 삶인 것을 실감합니다.
스스로 조심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타인을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오길 기도해야 합니다.
룻기의 보아스가
모압 여인 룻을 배려하고 돕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왔다가
본향인 하나님께로 가는 이민자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출23:9)
하나님,
참빛 식구들이 걸어가는 나그네 길에
주께서 꼭 동행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4.1 이-메일 목회 서신)
룻기의 세 가지 주제
그동안 룻기를 함께 읽으면서, 룻기를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예정과 섭리를 소개했습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온 것은 미리 짜인 각본을 뜻하는 예정보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함께 하신 섭리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룻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두루 발견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헤세드>입니다. 오늘 본문 속 나오미의 말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절)에서 “은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입니다.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신약의 <아가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룻기에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배려와 도움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압 여인 룻을 차별없이 존중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삭줍기를 돕고 넉넉한 마음으로 룻을 대접하면서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실천하였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는 보아스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 예수님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고 생계를 해결하는 룻의 모습도 하나님 사랑입니다. 나오미가 힘들어할 때 룻이 나섭니다. 모압을 떠날 때 나오미와 했던 약속을 룻이 모두 지킵니다. 나오미 역시 룻과 보아스 배후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이처럼 룻기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 즉 섭리가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룻기의 중요한 주제는 “기업 무를 자 (고엘)”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친족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고 구합니다. 행여나 종으로 팔리면 돈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등 친족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히브리어 <고엘>은 구원할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장차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삼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삼으신 것이 생각납니다.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연결되니, 성경에서 룻기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세 가지 주제, 하나님의 섭리, 헤세드, 고엘을 기억하고 룻기를 읽어 나가면 룻기를 통한 말씀의 은혜가 더욱더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미국 신문과 방송에 흥미로운 보도가 있었습니다.
동부 코네티컷 뉴헤이븐 근처에서
어떤 사람이 연꽃 모양의 도자기 그릇을
거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도자기에 조예가 깊은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6 인치에 불과한 도자기 그릇 하나가 35불에 나왔으니
우리가 알다시피 거라지 세일치고는 비싼 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흥정하지 않고 35불에 도자기를 삽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진을 찍어서 진품 여부를 알아보았고
이 도자기는 세계에서 여섯 개밖에 없는
15세기 명나라 영락 황제 시대의 유물로 밝혀졌습니다.
결국 소더비 경매에서 이 도자기 그릇 한 개가
무려 $721,800에 낙찰되었습니다.
소더비에서 중국 유물을 담당하는 맥카티어(McAteer)라는 분은
자기도 생전에 이런 고대 유물을 볼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면서
고대 유물들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숨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
중국 도자기를 야드 세일에서 산 사람은
귀한 유물을 알아보는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35불이나 주고 “연꽃 그릇 (lotus bowl)” 한 개를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리어 다른 물건에 눈길을 주었겠지요.
신앙에도 안목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서둘러 집에 와서는 모든 것을 팔아서
보화가 숨겨진 밭을 사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숨은 보화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지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선입견, 자기주장, 자기 생각이 가득 차서
진작 중요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3.
팬데믹이라고 하지만
어느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물질만 있으면
하나님 나라도/신앙도 내팽개칠 기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꼭 붙들고 삽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보화와 같은 복음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입니다.
오늘도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 신앙의 보물을 찾아내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 13:44)
하나님,
예수님 한 분으로 기뻐하고 행복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25 이-메일 목회 서신)
룻과 보아스의 만남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합니다. 보통 내러티브(이야기)에는 악한 인물이 있게 마련인데, 룻기의 주인공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중에 최고의 인물은 보아스일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이쉬 깁보르 하일) 보아스는 자신의 재력이나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서로 축복하면서 인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이라고 보아스가 인사하니 일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이라고 응답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보고 일꾼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일꾼들이 대답합니다. 룻이 모압 출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와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어쩌면 룻이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다른 밭으로 옮겨가는 순간에 보아스가 룻을 부른 것 같습니다. “내 딸아,” 룻을 딸이라고 부른 것은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룻이 모압 출신인 줄 알면서도 룻을 친근하게 대하는 보아스입니다.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기 소녀들과 함께 보리 이삭을 주우라고 말합니다.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 역시 이방 여인 룻을 보호하는 보아스의 마음입니다.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는 것은 룻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특혜입니다.
깜짝 놀란 룻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이방 여인인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묻습니다. 룻 역시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에솃 하일/용맹한 여인>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신과 룻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가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인 것은 당연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말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긴 것과 부모와 조국을 떠나서 생면부지 베들레헴에 온 것을 높이 샀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선한 일에 보답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룻이 “내 주여”라고 자신을 낮추면서 보이스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아스는 룻을 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함께 먹고, 마음껏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모압 출신, 여인, 그리고 남편이 없는 룻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보아스의 성품이 특별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한 자를 보살피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깜깜한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보아스와 같은 인물이 시대의 등불이요 희망이 되었습니다. -河-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설교에서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온 사건을 두고
예정과 섭리를 비교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찌 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보아스가 밭에 온 것이
처음부터 예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만남을
운명적으로 계획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룻이나 보아스의 행동은
하나님에 의해서 프로그램화된 것이 되고 맙니다.
룻이나 보아스의 의지가 사라집니다.
예정(predestination)이 갖고 있는 맹점입니다.
룻이나 보아스나 엄연히 자신의 의지로 결정해서
보리밭에 왔고 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2.
섭리(providence)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보리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왔습니다.
그것은 룻의 결단이고 룻이 스스로 행한 것입니다.
그 시간에 보아스도
베들레헴에서 밭에 나왔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각자 자기의 생각대로
보리밭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룻의 발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를 보리밭에 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룻과 보아스에게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일어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그 순간’에 임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룻과 보아스가 각자 밭으로 왔을 때
하나님도 그들과 함께 하셨고
두 사람의 발걸음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섭리(providence)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대로/욕심대로 행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성경의 자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서로 섬기면서 세워줍니다.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행하기에 자유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셔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3.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리는지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주목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결정을 하고 어떤 인생길을 걷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오늘 하루 참빛 식구들 위에
세심하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하나님,
참빛 식구들의 마음과 삶에 함께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21. 3. 18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