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우리 예수님 (8)

눈을 뜨게 하시다

 

팬데믹이 오기 전에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차례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자택 격리가 시작되면서 마지막 두 본문을 다시 모였을 때 나누기 위해서 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안에 대면 예배로 모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곱게 싸두었던 귀한 물건을 꺼내서 듯이, 지난봄에 아껴두었던 “예수님, 우리 예수님”의 마지막 두 본문을 앞으로 두 주 동안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9장을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5-7장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신 산상 수훈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8-9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기적들이 연거푸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과감히 없애셨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하인도 고침을 받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부정한 여인도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면서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이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폭풍을 다스리신 예수님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거나 경험했던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이 보인 반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면하고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까지 쫓아와서 고쳐주시길 간청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외침을 보니, 이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긍휼(compassion)인데 맹인 두 사람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눈을 뜨게 했습니다:“너희 믿음대로 되라”.

 

눈이 밝아지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육체의 눈은 물론 우리 마음의 눈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밝히 볼 수 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보기 원합니다.-河-

2020 기도 (7)

인도하셨나이다

 

기도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의 끝은 기도한 것이 응답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응답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기도의 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 역시 처음에는 개인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과 자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쉽게 응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만만하고 순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훈련이고 삶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끝이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닌 것을 시편 77편이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슬픔, 아픔과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기도의 큰 결실이지만, 기도의 끝은 아닙니다. 시편 77편이 알려주는 기도의 끝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 마르둑을 비롯한 세상의 그 어떤 신보다 위대하다고 찬양했습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자랑했습니다. 야곱과 요셉 같은 자신의 조상을 속량(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도 찬양합니다. 주의 백성이 바닷길을 따라서 건너니 다시 물이 들어와서 주님의 발자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 옛날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대부분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기자가 걸었던 기도의 여정을 우리도 따라 걷기 원합니다. -河-

2020 기도 (6)

물들이 주를 보고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시편 77편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10절(“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입니다.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켰습니다”)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었습니다.

 

전반부는 밤에도 손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씨름한 시인의 기도였습니다. 좀처럼 응답되지 않아서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졌지만,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전에는 힘겨웠던 일이 이제는 찬양과 감사로 변합니다. 깊은 은혜를 경험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노래하면서 마음에 채웠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시인의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움(wonders)을 고백합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작은 것도 기적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속량(redemption)”이라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도 함께 묵상했습니다. 우리 역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우리와 세상을 구하고 속량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했습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두려는 욕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경이로움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사에 초대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별것 없는 우리 일상과 인생이 하나님 역사의 한 부분으로 승격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 시대에 인류를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다의 폭풍입니다. 폭풍이 불거나 해일이 닥치면 속수무책이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에서 폭풍을 다스리는 신이 최고였습니다. 본문 속에서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시인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최고라는 뜻입니다(16절). “깊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홈>에는 당시 제국인 바빌론의 여신 티아맛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깊음을 제거하십니다. 회오리바람, 우렛소리, 번개와 땅이 흔들리는 지진 등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어떤 신보다 가장 위대하다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모든 물들을 이기신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고백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님의 크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2020 기도 (5)

속량하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터닝 포인트를 경험한 시편 기자의 입에서 찬양이 나옵니다. 앞에서 드린 기도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씨름이었다면, 후반부의 찬양은 공동체와 함께 드리는 간증과 고백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편 77편은 탄식과 찬양은 물론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룹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관심사가 바뀝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시야를 갖게 됩니다. 시편 기자도 주님께서 행하신 옛날 일을 읊조리고 주님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노래했습니다(11-12절). “작은 소리” “낮은 소리”라는 우리 말 번역처럼 시편 기자가 받은 은혜를 자기 내면에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문제는 온데간데없고 시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가득 찼습니다. 1-10절에는 “나”라는 단어가 주어로 사용되었는데, 후반부로 오니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문제가 자신을 얽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도해도 하나님은 온데간데없고 자기에 닥친 문제만 보였습니다. 문제가 하나님과 시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나중에는 하나님의 존재,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먹구름이 거치고 파란 하늘이 드러나듯이 하나님이 보입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분이 없습니다. 크게 다가온 문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도(말씀)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채웠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깃들어 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시인이 경험하는 기도의 신비(mystery)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온 민족 중에 알리길 기도합니다. 요셉과 야곱으로 시작된 주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능하신 팔로 속량(redemption)하심을 믿습니다. “속량”은 하나님께서 대신 값을 치르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하나님의 커다란 계획 속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자신을 인식(self-awareness)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니 하나님께서 베푸신 속량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은 물론 상황까지 변화시킵니다. 속량(贖良) –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무슨 일이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신 경이(기적)로 만드는 것도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의 끝에 찬양이 있습니다. 기도를 넘어서 찬양에 이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河-

2020 기도 (4)

기억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살던 곳, 만났던 사람들, 그때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잊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지워지지 않아서 마음고생도 합니다.

 

성경에도 “기억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 400년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기억하고 지켜야 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와 미래를 구축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세상에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성경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재를 살고 미래를 소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억하며” “기억하리이다” “읊조리며” “되뇌이리이다”와 같은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시편 77편의 전반부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고, 어려울 때 불렀던 노래를 기억했습니다(3, 6절). 그런데 그 기억의 결과는 불안함과 한숨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경험한 후에 새롭게 변화됩니다(10절).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합니다. 읊조리듯이 그 은혜를 입으로 고백하기를 반복합니다. 앞에서는 과거의 기억이 불안으로 이어졌다면, 오늘 본문의 기억은 찬양으로 발전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전과 후의 차이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전환점을 수시로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되돌아보고 다시 기억하는 순간입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지나온 옛길을 기억하면 찬양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느껴집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소원을 쏘아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차분히 앉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읊조리는 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