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십자가 (1)

자기 십자가를 지고

 

우리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발생한 전염병 재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을 위협하는 가장 큰 재난은 지진입니다. 지진의 공포심을 늘 느끼고 살지만, 89년이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지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다음은 가뭄입니다. 몇 년 전 찾아온 극심한 가뭄으로 자동차 세차는 물론, 사업체 화장실의 물을 조절하고, 정원에 물주는 것까지 제한했습니다.

 

전염병은 금세기에 처음 찾아오는 재난 같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치사율이 높지 않은데도 우리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전염병으로 수 만명이 죽고, 전염병이 닥치면 온 백성이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주의 은혜를 구하던 것이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과학이나 의술이 매우 발달했다고 믿었는데 이번 경우처럼 바이러스를 쉽게 잡지 못하는 것도 의아할 정도입니다.

 

어려움은 안팎에서 찾아 옵니다. 우리 자신이 자초한 어려움도 힘은 들지만, 어떻게든 애를 쓰면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풀어나가면 됩니다. 혼자서 밤잠을 설치며 끙끙댈 지언정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우리 개인의 잘못으로 세상이 그릇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번처럼 밖에서 시작된 재난은 개인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잘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닙니다. 개인의 재량으로 풀어나갈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겪는 어려움이기에 위로가 되지만, 그 어려움의 끝에는 각 개인이 오롯이 담당할 몫이 기다리고 있기에 불안합니다.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묵상하고,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찾아 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십자가의 죽으심을 전제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도 부활의 능력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 듯이, 우리도 각자 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이 겪는 어려움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견디고, 그 속에서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우리가 지고 가야할 예수님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고통은 견디라고 닥치는 것이랍니다. 고통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됩니다. 함께 겪는 고통입니다.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견딥시다. 부활의 생명과 은혜가 우리 앞에 있음을 믿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7)

두 가지 기적

 

나병 환자,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첫 번째 기적 묶음, 갈릴리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 묶음에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아픈 자들과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깃든 세 가지 기적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중심에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기적들이 처음과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두 가지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자신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딸의 몸에 손을 대면 살아날 수 있으니 함께 자신의 집에 가시길 부탁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동안 살펴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서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집으로 가십니다.

 

많은 사람이 뒤를 쫓았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지역 유지의 부탁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궁금해서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을 것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 여인은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부정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옷깃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 같아서 인파를 무릎 쓰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살짝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손길을 감지하시고 여인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왔던 중풍 병자를 대하시듯이 이 여인에게도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고 선포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하혈을 하면서 부정한 병을 앓았으니 세상에서도 죄인 취급을 받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마음도 헤아리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과 대화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회당장의 집에 갔을 때는 피리를 불며 장례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 다급한 순간에도 재촉하지 않은 회당장의 성품과 믿음이 대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을 물리시고,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가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죽었던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심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6)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마지막 세 번째 기적은 중풍 병자를 고치고 그의 죄를 용서하신 사건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의 무덤 사이에 살던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만나서 병이 나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가복음 2장에서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병상에 메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가 누운 병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마가복음이 전하는 세세한 것을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지붕을 뚫었습니다. 큰 용기를 냈고 모험을 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맞아주지 않으시면 난감한 상황이니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이들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목격한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죄를 용서해주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서기관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가운데 어느 것이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두 가지 모두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중풍 병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고 명령하시니 병자가 실제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백성들은 죄를 사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젊은이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행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방 땅 데가볼리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딱딱하게 굳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기적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5)

    –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불어닥친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역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지내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온전케 해주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영적인 세력인 귀신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에 속한 마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막 5:1-20).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힘이 무척 세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을 갖고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군대(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대 조직 레기온)라고 불리는 큰 귀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귀신들린 두 사람이 몹시 사나워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자연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자신들을 괴롭히러 오셨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요한 계시록에서도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세력이 모두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소멸될 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돼지 떼에게 넣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향해서 “가라”하시니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나와서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는 비탈을 내리 달아서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돼지의 숫자가 2천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을에 알렸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께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곳은 유대 땅이 아닌 갈릴리 건너편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악한 귀신이 부정한 동물 돼지에게 들어가길 원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 2천 마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온전케 회복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통제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방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4)

–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9장을 중심으로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다음에 나오는 본문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연거푸 등장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서 (8:18-22) 알려주시고 실제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9-13).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마비된 로마 백부장의 종을 일으키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의 벽과 경계를 허물고 지우셨음을 배웠습니다. 나병 환자나 백부장의 경우, 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나병은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종교적 경계,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 있던 민족과 신분의 경계,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뿐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배에 올랐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여정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서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8: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무서워했습니다.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주무시고) 계신 것 같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통해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