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1)

아버지와 아들

 

지난 두 달여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은혜가 우리 교회와 참빛 식구들께 깊이 스며들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으로 우리 삶을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 힘으로 가정과 교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길 원했습니다. 자신들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요즘 세상을 가슴에 품고 돌보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랐습니다.

 

9월 한 달 동안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 동생이 돌아왔을 때 화를 내면서 아버지의 입장을 거부했던 첫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빈손으로 돌아온 둘째를 사랑으로 맞아 주신 아버지 –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인물들을 차례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탕자의 비유하면 그 제목처럼 아버지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히브리어 <헤세드>, 헬라어 <아가페>로 표현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탕자의 비유 속에는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돌봄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재산을 갖고 먼 나라로 떠난 둘째 아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탕자(prodigal son)입니다. 둘째는 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것이 지루했고 불만족스러웠습니다. 열심히 아버지 재산을 돌보는 형이 껄끄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신에게 돌아올 상속분을 요구합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모은 재산이 아니라, 아버지 재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상속분을 미리 요구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아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아버지입니다. 아들이 재산을 갖고 가서 어떻게 사용할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어떻게 하든지 끝까지 그를 기다리시고 돌보실 참입니다. 둘째가 잘났거나, 재산을 갖고 가서 성공했을 때만 그를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일을 벌이든지 상관없이 둘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재산을 팔아 주었습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둘째에게 자신의 재산을 팔아준 아버지만큼 우리를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잘못할 줄 아시면서도 재산을 팔아 주신 것은 우리의 잘못을 책임지시겠다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한 주간 오늘 비유 속의 하나님을 이모저모로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8)

돌보는 교회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보는 교회>에 맞춰서 지난 7월부터는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 안에 충분히 임했을 때 자연스레 교회와 세상을 돌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정성껏 아담을 만드시고, 그의 갈빗대에서 아담의 돕는 배필 이브를 만드시는 모습 속에 하나님의 세심한 돌봄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당혹스럽고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면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양치기 목동 다윗을 찾아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챙기고 돌보신 것입니다. 왕위에 오른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큰 죄에 빠집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지만, 그가 치를 죗값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둘째 솔로몬을 주시고 “여디디야(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던 다윗을 위한 돌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경계를 뛰어넘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악독한 왕비의 고향인 시돈으로 가서 한 과부의 돌봄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종교의 본산지인 시돈 땅 사르밧에 갔습니다. 마지막 음식을 만들고 생을 마감하려는 과부를 만나서 그의 돌봄으로 가뭄을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르밧 과부를 돌보셔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시돈 땅 사르밧 과부를 찾으신 하나님의 돌봄이 특별했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온 백성이 회개한 니느웨를 돌보신 하나님의 사랑도 성경 전체에서 특별했습니다. 아무리 니느웨가 회개해도 그곳 백성은 물론 짐승까지 하나님께서 돌보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도 돌보셨습니다. 요나는 물론 우리의 선입관까지 뛰어넘은 돌봄입니다. 우리의 돌봄의 넓이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는지 새롭게 느꼈습니다.

 

시편 142편 말씀은 돌봄을 실천하려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원통함과 상한 심령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을 때, 피난처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주의 구원을 볼 수 있고, 주의 백성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도 돌봄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교회는 물론 세상과 나누기 원합니다 -河-

하나님의 돌봄 (7)

다윗의 동굴 기도

 

<돌보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춰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돌봄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돌봄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듯이, 우리의 돌봄도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 가운데 세상으로 펼쳐집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돌봄이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42편에는 다윗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지은 기도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다윗은 사울의 시기와 질투 속에 10년 이상을 광야에서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사울은 집요하게 다윗의 목숨을 노렸고 다윗은 동굴에 숨는 것은 물론 미친 척도 하고, 때로는 이웃 나라에 몸을 숨기면서 살아남았습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돌봄을 더 크게 느낍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서 느낍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다른 것을 돌아볼 틈도 없이 하나님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기회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다른 이에게 기도를 부탁할 겨를도 없습니다. 4절에 있듯이 다윗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다윗을 돌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와서 단독자로 기도할 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원통함을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자기 앞에 닥친 어려움도 하나님 앞에서 차근차근 진술합니다. 육체와 마음만 힘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도 지쳤습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찾는 것도 힘겹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윗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피난처가 되셨습니다. 어려울 때 피할 곳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피난처는 마지막 순간에 찾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말 그대로 깜깜한 동굴에 피해 있으니 다윗에게 하나님만이 빛이 되십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분깃(몫)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견딜 수 없고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돌봄을 구하면서 살아야 할 인생입니다. 피난처되시고 분깃되시는 하나님께서 참빛 식구들을 돌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할렐루야! -河-

하나님의 돌봄 (6)

요나와 니느웨

 

구약성경 요나서는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당시의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회개했습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러한 소식이 왕에게 들리니 왕은 조서를 내려서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 물도 마시지 말고 회개의 자리로 나올 것을 명령했습니다. 폭력과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은 줄을 누가 알겠느냐”(9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니느웨의 회개는 백성으로 시작해서 왕까지 올라간 독특한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니느웨의 회개를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취소하셨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이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회개입니다. 개인적인 회개도 중요하지만, 국가 또는 공동체에 닥치는 재앙을 놓고 온 백성이 함께 회개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니느웨가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리려던 심판을 취소하신 것 자체가 특별한 일입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분노해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간신히 살아난 요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어도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에만 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방 나라 니느웨는 하나님 구원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제국 앗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화를 냈습니다. 니느웨가 살아나면 자신은 죽는 편이 낫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니느웨가 망하는 것을 보겠다며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습니다. 햇볕이 따가웠습니다. 그때 박넝쿨이 나와서 그늘이 되었습니다. 요나는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합니다. 이번에는 벌레가 나와서 박넝쿨을 갉아 먹었습니다. 요나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하나에도 미련을 갖는데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있는 12만 명의 사람들과 가축을 돌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매우 파격적인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지난주 사르밧 과부에 이어서 하나님의 돌봄이 우리가 생각한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독점하려던 요나와 진정으로 회개한 니느웨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이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고 돌보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가진 선입견을 넘어서 돌봄을 실천하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의 돌봄 (5)

사르밧 과부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7월부터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돌봄으로 나타납니다. 8월에도 계속해서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를 위한 하나님의 돌봄, 다윗을 찾으셔서 왕으로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 십계명을 다섯 가지나 어긴 다윗을 변함없이 사랑하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은혜 속에서 우리의 삶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모든 사람을 품을 만큼 넓어집니다.

 

오늘은 엘리야 시대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합이라는 못된 왕이 통치했습니다. 아합은 시돈 사람 이세벨을 왕비로 맞았는데 바알 종교를 무차별 수입했습니다. 왕부터 하나님을 떠나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최악입니다.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서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가뭄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월하심을 입증하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강 그릿 시냇가로 피하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보내십니다. 사르밧은 항구도시로 무역이 번성했던 곳입니다. 왕비 이세벨이 시돈 출신이고 하나님을 믿는 지역이 아닌데 그곳으로 엘리야를 보내셨으니 엘리야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바알신을 섬기는 지역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야가 찾아간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한 번 먹을 기름을 갖고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서 함께 먹자고 제안합니다. 한 번 먹을 음식인데 엘리야를 줄 떡을 먼저 만들면 자신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르밧 과부에게 곡식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르밧 과부를 언급하셨습니다. 많은 과부가 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돌봄이 지역이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성품(마음)속에 임함을 배웁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한 주를 시작합시다. 돌봄의 은혜를 경험하고, 돌봄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