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기도 (3)

– 기도의 장애물: 욕심과 의심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 여럿 있습니다. 욕심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욕심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속셈이기에 기도의 바른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1:15). 죄도 기도의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우선 죄는 기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기에 기도를 넘어서 신앙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고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의심도 기도에 장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디아크리노>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능동형으로 쓰이면 “분별하다”가 됩니다. 여러모로 살펴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에서 우리가 날씨를 분별하듯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분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동형으로 쓰이면 단어의 의미가 더 복잡해 집니다. 모든 것을 살핀 후에 결론에 도달하거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논쟁을 하면서 다투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보고하니 예루살렘의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행11:2). 서로 차별하고 판단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약2:4).

 

하지만 헬라어 <디아크리노>가 본문에서는 의심하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확신을 갖지 못해서 판단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모두 생각하다가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어중간한 상태를 취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의심하는 자를 가리킬 때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서 요동하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니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을 믿는 것, 산을 옮기는 기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산을 옮기시는 것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기도를 위해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심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인 셈입니다.

 

산이 옮겨질 것을 의심하거나 또는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의심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믿을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이 욕심이며 어떤 기도가 하나님 뜻에 맞는지 분별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살피다가 갈팡질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 하길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터를 넓고 깊게 잡고 신앙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河-

2019 기도 (2)

– 산을 옮기는 기도

 

기도는 혼자 말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이면 안되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일방적으로 우리의 소원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려야 합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닫는 하나님의 뜻(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듣고 싶어 하시는 기도를 준비한다면 멋진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되고 선한 주님의 백성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부요하고 평안하길 원하십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과 세상을 맑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 맞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기도의 시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처럼 더 이상 소용이 없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이 기도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사가 기도로 승화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기도할 때 산이 옮겨져서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도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연관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올리브(감람)산이 저 멀리 있는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이 완전히 소멸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 모든 것이 기도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산을 옮긴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 실제가 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훌륭한 랍비를 보면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이제는 우리가 산을 옮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마다 산이 옮겨진다면 신앙은 마술(Magic)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산이 옮겨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한없이 경험하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

2019 기도 (1)

믿음의 기도

 

매년 한 달 동안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눕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잘살고 있다면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빚을 진 셈이니 우리도 이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올해 기도에 대한 말씀은 성경의 식물들 가운데 무화과나무를 살펴볼 때 만났던 마가복음 11장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떠난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로 변한 성전에 분노하시고 직접 성전을 청소하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이튿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제자들이 보니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랐습니다. 다시는 열매가 없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뤄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말랐다고 전하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으라”(막11:22)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예수님 말씀대로 뿌리까지 마른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열매 없이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는 강도의 소굴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과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믿고 신앙의 열매를 맺어야 할 예루살렘 종교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변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르고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하셨듯이,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종교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쓰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신앙 시스템이 예루살렘은 물론 땅끝까지 펼쳐질 것입니다. 성전이라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중심의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랐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신앙이 필요할 뿐입니다.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었듯이, 이제부터 우리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후에 기도에 대한 교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이나 요청을 하나님께 말씀하는 것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5월 한달은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기도로 살아갑시다. -河-

성경의 식물들 (10): 겨자씨

성경의 식물들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떨기나무로 시작해서 오늘 함께 나눌 겨자씨까지 열 가지 식물을 나무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떨기나무는 광야를 지키는 잡목이고 쉽게 불에 타는 나무인데, 그곳에 하나님께서 타지 않는 불꽃으로 임하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살구나무로 번역된 <샤케드>는 아몬드 나무로서 봄을 알리는 희망의 나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약속의 나무였기에 히브리어 <샤카드(지키다)>와 더불어 성경에 등장했습니다. 성전을 장식했던 레바논의 백향목은 높고 고결한 자태를 자랑합니다. 우리 신앙도 백향목처럼 곧고 높이 자라길 기대했습니다.

 

사역과 삶에 지쳤던 엘리야가 광야로 나갔을 때 그에게 쉼터를 제공한 것은 로뎀나무였습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주의 천사가 공급하는 양식을 먹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에스라가 읽어주는 하나님 말씀에 커다란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는 느헤미야의 격려와 계속된 말씀 탐구를 통해서 신앙을 회복하고 감사의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감람(올리브)나무, 잎이 넓고 푸른 상록수인 화석류 나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종려나무, 그 밖에 여러 가지 나무로 지은 초막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인생을 돌아보았습니다.

 

이방 땅에서 삶의 터전과 안전을 확보한 아브라함은 수양버들처럼 잎이 늘어져서 그늘이 되는 에셀 나무를 심고 그 아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삶 속에서 감사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가 무화과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 것입니다. 봄철에는 설익은 무화과 파게를 가난한 사람들이 양식으로 삼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 하박국은 무화과 잎이 말라도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하겠다고 노래했습니다.

 

물을 잘 머금는 우슬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당시 양의 피를 묻혀서 문설주에 바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입에 신포도주를 적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큰 죄를 범한 다윗은 우슬초로 정결케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생명 나무는 성경의 처음과 끝, 그리고 중간인 잠언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는 겨자 나무는 작은 씨로 유명합니다.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을 품고  있으니 크게 자랍니다. 넓게 퍼진 가지로 인해서 새들이 깃들고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식물들처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께 쓰임 받은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성경의 식물들 (9): 생명나무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오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을 기억하며 예배하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절기입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듯이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과 맞물려 있어서 음력으로 지키는 부활절은 실제 달력과 맞습니다. 우리 지역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이스라엘과 기후가 비슷하니 이맘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셈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은 알고 있었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지만,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는 모습이 워낙 초라했기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백성들은 물론 제자들까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큰일을 하실 줄 알았다가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면서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모여서 예배했습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되돌아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로 기록했습니다.

 

부활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세력에 무너지지 않고 생명의 빛으로 우리 자신과 삶을 비추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안에 임할 때 죄로 인한 죽음, 낙심,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구약의 식물은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덴동산에 있었고, 나중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보게 될 생명 나무입니다. 에덴동산에서 네 개의 강물이 흐르고 한가운데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요한이 환상으로 본 하나님 나라에도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가 흐르고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서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하는데 쓰입니다. 말 그대로 생명을 주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 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생명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치료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날마다 생명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 삶의 처소가 생명 나무가 있는 동산이길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