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3): 요한 웨슬리

10월 한 달 동안 “터닝 포인트”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미국 생활이 단조로워서 직장(또는 학교)과 집 그리고 주말에 교회에 오는 것이 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몸과 마음이 늘 쫓기는 나그네 인생이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챙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길목에 서곤 합니다. 완전히 돌아서는 경우부터 좌나 우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순간입니다. 알고 보니 우리만 그런 순간을 맞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도 전환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에게 닥치는 선택의 순간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계기가 되길 바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터닝 포인트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입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인 1703년 성공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아홉 형제 가운데 열다섯 번째였는데 어머니 수산나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고 자라서 일찍이 성공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가르치면서 동생 찰스 웨슬리와 친구 두 명과 함께 신성클럽(Holy Club)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3-4일 저녁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면서 신앙을 연마했습니다. 가난한 자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하는 등 신앙과 삶이 통합된 온전한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신성클럽은 하도 엄격하고 스스로 규칙을 잘 지키는 그룹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들을 규칙쟁이(Methodist)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현재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습니다.

 

웨슬리가 미국 조지아에 선교를 와서 미국 감리교회가 시작되었는데, 오고 가는 배 위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웨슬리는 행여나 죽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풍랑 속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독일 모라비안 교도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에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에게 배우고, 이성과 규칙에 치우친 자신의 신앙을 놓고 고민하다가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열린 부흥 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사회자가 말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을 때 마음에 뜨거움을 체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웨슬리는 이성적인 신앙과 더불어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웨슬리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물면 불안하고 신앙이 표류할 가능성이 큽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신앙이 내려오는 터닝 포인트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이유입니다.-河-

수요예배에서는

어르신들이 참석하시는 우리 교회 수요예배에서는 성경을 한 장씩 공부합니다.

 

지난 1년 동안은 예레미야서와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해서 죄의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화가 치밀 정도로 안타까웠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았습니다. 또한 예레미야서 한가운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위치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말씀이 너무 딱딱해서 중간에 마가복음을 읽었습니다. 복음서 말씀은 늘 은혜롭습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선포하시는 말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일대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묶인 사자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섬기는 종으로 한평생을 사신 예수님의 모습이 마가복음 전체에 잘 드러났습니다.

 

앞으로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읽습니다. 중간에 복음서를 읽고 오면 일 년 넘게 읽을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말 그대로 인류는 물론 세상의 기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과 이브로 인해서 낙원을 잃고 죽음과 노동, 관계의 단절과 소외가 인류에게 닥쳤습니다. 창세기 이후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노력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 사랑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역시 창세기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그립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 이삭을 낳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다는 뜻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갖게 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됩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고 야곱과 그의 가족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간 것이 400년 종살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는 이어지는 출애굽의 서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요 예배에 참석하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먼 거리와 바쁜 삶으로 참석하지 못하시면 안내석에 준비되고 이메일로 보내드리는 교재를 참고해서 함께 창세기 말씀을 읽어가기 원합니다. 말씀에 굳게 서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河-

터닝 포인트: 어거스틴 (1)

10월이 되면 결실의 계절이라는 말에 걸맞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종종 매너리즘에 빠져서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할 모멘텀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생은 물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교회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신앙의 위인들이 경험한 인생의 전환점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터닝 포인트, 즉 전환점을 경험한 신앙 선배들의 인생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올가을에 우리 역시 인생과 신앙에서 전환점을 경험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신앙의 인물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현재 알제리가 위치한 북아프리카의 다가스데라는 곳에서 이교도 아버지와 신실한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의 출세를 원했던 부모님은 어거스틴이 열두 살 때부터 카르타고를 비롯한  큰 도시로 유학을 보내서 고전과 수사학을 공부시켰습니다.

 

어거스틴 역시 총명한 젊은이였지만, 청년의 쾌락에 빠져서 18세에 한 여인과 동거를 시작해서 아들을 낳을 정도였습니다. 매사에 열심을 냈던 어거스틴에게는 진리를 깨닫고 싶은 열망도 강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마니교와 점성술에도 빠져보고,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면서 궁극적인 진리가 무엇인지 탐구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청년의 쾌락과 세상의 학문과 관습을 쫓다 보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하지만 어거스틴에게는 밤낮으로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모니카는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한, 언젠가 아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며 기도했습니다. 당대 학식과 덕망이 높았던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어거스틴을 소개해서 신앙의 회복을 도왔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믿음 대로 어거스틴이 스스로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어거스틴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원 밖에서 “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경을 펼쳐서 읽었는데 로마서 13장 13절(“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라”)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이 어거스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훗날 그 순간을 회고하면서 “확실성의 빛”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상을 쫓던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순간입니다.

 

우리도 어거스틴처럼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기 원합니다. 크고 작은 전환점을 통해서 매너리즘을 벗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과 소망으로 살기 원합니다.-河-

일체의 비결

빌립보서 말씀을 공부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난 4개월여에 걸쳐서 빌립보서 말씀을 온 교회가 함께 읽었습니다. 특별히 마음깊이 다가오신 하나님 말씀이 있다면 잘 간직하셔서 앞으로의 신앙과 인생길에 생명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감옥에 갇힌 채로 자신의 안부와 헌금을 갖고 바울을 방문했던 에바브로디도 편에 편지를 써서 빌립보 교회에 전달했습니다. 바울을 방문하러 와서 에바브로디도도 죽음에 이를 정도로 아팠지만 회복되어서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립보 교회로 돌아갔고, 교회 앞에서 읽어주었을 것입니다.

 

편지 마지막에 바울을 자신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며 기도해 주었고, 헌금을 거둬서 바울에게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편지 첫 부분에 의하면 바울도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를 잊지 않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줄것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을 비난하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랑을 느낀 바울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물론, 바울에게 물질이 중요하지 않았고 헌금에 깃든 빌립보 교회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이 세상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고,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면 어떤 일도 가능함을 몸소 체험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는 유명한 말씀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해 낼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주는 말씀으로 읽곤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물질의 많고 적음, 죽음과 삶을 뛰어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이 그에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배설물로 여긴 바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신앙과 삶의 축을 그리스도와 교회로 옮기도 나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때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바울이 터득한 일체의 비결을 갖고 있다면 삶이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할까요! 세상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께 붙잡힌 멋진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참빛 식구들 되길 기도하겠습니다.-河-

평강의 하나님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지막 교훈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와 주께서 오실 때가 가까워 왔으니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알게 하라로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내적으로 항상 기뻐하고, 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염려입니다. 염려는 기쁨은 물론 감사까지 빼앗아 갑니다. 염려에 휩싸이면 앞으로 나갈 수 없고, 과거와 현재의 삶까지 요동칩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미래가 불안정한 현대인들에게도 찾아오기에 염려를 관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기도와 간구”라는 그리스도인의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몰아낼 수 있고, 기도할 때 염려가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감사를 제안했습니다. 또한 염려를 몰아내는 기도는 단순히 입술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귓전까지 배달되는 기도임을 배웠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염려를 몰아내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에 임합니다. 염려와 불안은 평강이 깨진 상태입니다. 염려가 물밀 듯이 몰려오니 우리 스스로 평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기 시작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는 “아무것도” “모든”과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모든 염려를 손에 들고 있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께 맡길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평강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면 염려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빌립보서 4장 4-7절에는 그리스도인의 네 가지 표지 (marks)가 등장했습니다. 기쁨, 기도, 감사, 그리고 평안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무엇이든지 참되고, 고상하며,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명예롭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을 세우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앞에 있는 네 가지 덕목이 구약 시대부터 전해지는 것들이라면, 위에 소개된 여덟 가지는 당시 로마 시민들도 지향하던 것을 성경적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근사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부탁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가르쳐주고 몸소 행한 대로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내적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고, 세상에서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