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간구로

빌립보서의 마지막 네 번째 단락(4:4-20)에서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큰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데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3:20). 하늘에 속했다는 생각을 하면 땅에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반드시 오실 것이고 그날이 가까워 온다는 사실입니다 (4:5). 우리 삶에 끝이 있고 세상에 종말이 있음을 인식하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하늘나라 시민인 것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살아갈 때, 비로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두 가지를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지(mark)입니다. 모든 사람을 신사적으로 대하고, 참아주고, 경우에 맞게 대하는 관용이 필요합니다. 기쁨이 그리스도의 내적 덕목이라면, 관용은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인의 외적 표지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데 방해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염려”입니다. 염려가 찾아오면, 기쁨도 사라지고 관계도 위축됩니다.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일을 꾸준히 행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실 정도로 염려는 기쁨은 물론 우리 신앙과 삶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교인들에게도 염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핍박과 박해가 찾아오니 염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거짓으로 복음을 전하고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으니 교회를 생각해도 염려가 생겼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두고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개인은 물론 교회가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기도와 감사입니다. 특별히 간구는 염려를 일으키는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기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염려가 찾아오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속해서 기도할 때 염려가 쉽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기도와 더불어 감사도 염려를 몰아냅니다. 염려할 때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감사한다는 것은 염려를 통제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염려에 뺏기면 안됩니다. 다음 한 주간 감사함으로 기도하면서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주 안에서 기쁨으로 살기 원합니다.-河-

작은 사랑 나눔 (5)

우리 교회는 작년부터 작은 사랑 나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주변의 어려운 이웃이나 뜻있는 일을 하는 개인이나 기관을 돕는 일입니다.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무명으로 헌금하고, 무명으로 돕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금액도 상한선 20불로 정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외부 사역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편이 아니지만, 어려운 이웃을 실제로 돕고 뜻 있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훈련하고 습관화할 수 있는 시작점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작은 사랑 나눔 주일을 네 차례 지키면서, 과테말라 선교사님, 리치몬드에 있는 초등학교, 작년 연말에는 노숙자돕기, 올 초에 유엔난민기구에 참빛 식구들의 소중한 헌금을 보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 작은 사랑 나눔의 대상이 결정되었습니다. 지난 70여 년 동안 일본에서 힘겹게 살아온 우토로라는 조선인 마을에 평화 회관을 짓는 것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우토로 마을과 그곳을 지킨 조선인들은 매우 가슴 아픈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941년 일본 교토 비행장 공사를 위해서 조선인들이  끌려왔습니다. 2천명의 인부가 비행장 공사에 동원되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인이 절반도 넘는 1300명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최소한의 양식만 제공된 채 공사에 투입되었습니다. 함바라고 불리는 함석으로 만든 집에 살았는데, 지대가 낮아서 비가 오면 물난리를 겪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면서 비행장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우토로에 살고 있던 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올 돈이 없어서 그곳에 머물게 됩니다. 일본 정부는 한인촌이라는 핑계로 상하수도 공사도 해 주지 않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민족 학교를 강제로 폐쇄하는 등 핍박을 일삼았습니다. 급기야 1988년에는 예고도 없이 닛산 자동차가 한인들이 거주하는 땅을 매입했고, UN의 권고도 무시한 채 철거를 통지했습니다.

 

우토로 마을의 안타까운 이야기는 그들이 소송에서 패하고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2004년에야 알려졌고, 시민단체와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땅을 매입하고 주택단지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5년에는 MBC의 무한도전 팀이 우토로를 방문해서 우토로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우토로 사람들이 살던 마을은 이제 곧 개발되어서 사라진답니다. 대신에, 그곳에 평화 회관을 지어서 우토로에 살아남은 동포들의 삶을 기념하려는 사업이 진행 중인데 우리도 작은 사랑 나눔으로 힘을 보태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우토로를 돕게 된 것입니다.

 

현재 우토로 마을에 계시는 1세 생존자는 94세 된 할머니 한 분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이들의 구호는 “에루화 좋다”였답니다. 조국을 떠나서 미국에 사는 우리도 이왕이면 에루화를 부르면서 즐겁고 기쁘게 살기 원합니다.-河-

유오디아와 순두게

살면서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대부분의 관계가 처음에는 좋게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관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도 인간과 교감을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러니 처음에 좋았던 관계가 뒤에 가서 망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배웠듯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도 하나님과 지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과,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은 물론 성도의 관계까지 흩트려 놓은 사람들로 나누어졌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좋은 관계를 보여준 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관계는 사랑이 넘치는 살맛 나는 세상을, 깨지고 부서진 관계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과 공동체까지 추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을 도와서 빌립보 교회를 세웠던 여성들입니다. 유오디아라는 이름은 “행복한 인생길”이라는 뜻이고 순두게는 “풍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각자 형통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바울과 더불어 빌립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듯이 어느 순간에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서로 생각이 달랐고 자기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교회 공동체에 해를 입혔습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서 앞에서도 부탁하였듯이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3)고 권면합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도 이들이 하나 되는 데 도움을 주길 부탁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과 멍에를 같이하는 신앙의 동지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동지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글레멘드를 비롯한 바울의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인해서 갈라지고 혼란스러워진 교회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귀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고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게 멋진 공동체를 세워 가기 원합니다.-河-

주안에 서라

어릴 때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인전을 읽으면서 그분들처럼 값진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점점 느낍니다. 우리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고, 처음과 끝을 변함없이 살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본(本)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을 맑고 신선하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길 부탁하셨습니다(마5:13-15). 또한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6). 구약의 이스라엘 역시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선택하신 것을 보면(사4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본보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과 신앙에 만족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메신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개인주의화 됩니다. 남들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 혼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라는 말 자체에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외롭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이것저것, 여기저기를 배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일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삶과 신앙의 확신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3:17) 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바울의 자신감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 정도의 신앙이 부럽습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바울이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교회가 시험을 받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원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세상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교회를 흔드는 무리에게 현혹되지 않고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성도로 손색없이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우리 안에 바울의 고백이 있고,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는 물론 세상에서도 본보기가 되는 공동체로 자라 가기 원합니다.-河-

푯대를 향하여

우리의 삶은 물처럼 흘러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여서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빠르지 않더라도 꾸준히 자라가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 이력이 좋다고 해서 현재도 똑같이 좋으란 법이 없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더 불확실합니다. 따라서 인생이나 신앙의 여정을 지나면서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앞을 향해서 나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했습니다. 확정된 것이 없는 여정임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대인들은 몸에 받은 할례를 두고 자신들만 하나님 백성이며 그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교만입니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 할례는 물론 율법까지 완벽히 지킨 탁월한 유대인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귀한 것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두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일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잡힌 바 된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일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자신의 소명의식을 잊지 않고 하늘의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현재에 머물지도 않고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걷는 길을 달리기 경주에 비유했습니다. 달리기에서 모든 선수는 마지막 결승점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갑니다.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것도 시간 낭비입니다. 끝까지 달려간 선수만이 준비된 면류관을 머리에 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 여정을 경주에 비유하면서 과거에 도취되거나 현재에 머물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 가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갑니다. 달음박질하는 선수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있는 힘을 다해서 완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세워 두신 푯대(goal)를 향해서 달려가는 인생길입니다. 그 푯대는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이전 것에 미련을 갖거나 과거의 업적에 도취되는 것은 금물입니다. 이전 것은 거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 하나님 앞에서 돌을 하나 세워두고, 가장 고상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달려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자로서 우리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하루하루 달려가기 원합니다. 그 길에서 함께하시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