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시는 예수님: 엠마오로 가는 길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늘 그렇듯이 우리 개인은 물론 교회로도 감사와 아쉬움이 교차하면서 마지막 주일을 맞이합니다. 그렇지만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삶의 구비구비에서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셨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표어를 갖고 한 해를 보냈습니다. 가족 같은 교회로 함께 세워가고, 받은 사랑을 서로 나누면서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길 원했습니다. 완벽할 수는 없지만 참빛 식구들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한 해를 지내셨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기도해주고 배려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올해는 작은 사랑 나눔을 세 번에 걸쳐서 실천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조국에 있는 30여 명의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있지만, 꼭 필요한 곳에 은밀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참빛 식구들께서 많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내년에도 작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우리의 마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대강절과 성탄절을 맞으면서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가신 말씀을 나눕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을 두루 만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신비로운 몸을 입으셔서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시지 않으면 제자들이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직후의 상황입니다. 열두제자에 속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동행하시는 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슬며시 말을 거시니 사흘 전에 있었던 예수님의 죽으심과 최근에 들은 부활 소식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자신이 메시아이고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알리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실 때 비로소 이들의 눈이 떠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길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거웠던 순간을 회고하면서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마지막 주일을 맞으면서 한 해 동안 우리를 찾아오시고 동행하신 예수님을 떠올리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河-

성탄절에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을 보내고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성탄절은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에서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물론 부활절이 유대교에서 지키는 유월절과 맞물려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실제 날짜에 가깝지만, 성탄절은 로마 시대에 태양을 섬기던 날과 관련이 있습니다.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가 지나고 낮이 길어지는 시점이 태양을 섬기던 절기였는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뀐 후에는 빛 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바뀌었습니다. 태양을 섬기던 날을 태양은 물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바뀐 뜻 깊은 날입니다.

 

요즘은 성탄 인사가 많이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했습니다. 영어의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를 예배 (Christ’s mass)”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로 인사하는 것은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예배하고 기억하자는 제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빠르게 바뀌면서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예배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성탄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산타클로스입니다. 어린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양말에 선물을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는 진짜로 산타 할아버지가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산타클로스의 유래를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타 할아버지가 정말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주후 300년 경에 오늘날 터키에 해당하는 곳에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니콜라스는 재산이 많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산타클로스의 원조가 된 사연이 있습니다. 니콜라스가 사는 지역에 세 명의 딸을 둔 가난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고 싶었지만, 신랑에게 챙겨줄 지참금이 없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는 금덩어리를 주머니에 넣어서 굴뚝으로 내려보냈고, 그것이 집안에 걸어놓은 양말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직접 전해주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은밀히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처럼 세 명의 딸을 결혼시킬 수 있는 자금을 굴뚝을 통해서 전해 준 것이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온다는 전통이 되었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은밀하게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산타클로스가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올해도 여선교회에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굴뚝을 통해서 양말에 넣어주지는 않지만, 선물을 받는 아이들의 마음은 똑같이 기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맞아서 모든 참빛 식구들 위에 하늘의 기쁨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찾아오시는 예수님 (7): 삭개오

힘들고 지쳐서 하나님께 나올 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나인성 과부가 좋은 예입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여인을 향해서 불쌍한 마음이 동하시니 관에 손을 대시는 등 율법을 파괴하시면서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도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믿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걷는 구도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닮기 위한 순례길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손잡고 함께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을 찾아갈 힘이 있을 때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예수님과 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발전하고 성숙합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의 최고 관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기에 자기 백성으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또한 대부분 세리들은 로마가 책정한 세금보다 많이 걷어서 여분을 자기가 착복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세리들도 있었습니다. 삭개오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삭개오라는 이름에는 그의 직업과 달리 “의롭다”는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멀리서나마 바라보면 답답함과 삶의 무의미함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아서 군중 틈에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열정이 삭개오로 하여금 옆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뽕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시고 그를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시면서 그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삭개오 역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착취한 것을 보상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먼저 뽕나무에 올라갔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원하는 자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그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을 찾는 구도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河-

찾아오시는 예수님 (5): 나인성 과부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주제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십자가가 맨 앞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은혜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사랑도 기독교의 대표적인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어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우리도 세상에 나가서 이웃을 사랑합니다. 생명과 구원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던 옛 자아를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갑니다.

 

또 한 가지 기독교에 있는 특별한 개념이 “성육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모두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께서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스스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성육신 신앙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누군가 찾아 나서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약한 자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처지에 들어가서 같은 마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생명의 길을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육신 신앙이 있을 때, 세상 속에서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사역하시면서 많은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특별히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소외되고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도움이 되셨고 그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에 불쌍히 여기시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인성에 사는 과부가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들의 장례를 위해서 성문을 빠져나오는 광경을 보신 예수님 안에 측은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눅7:13). 그리고 장례 행렬에 다가 가셔서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과부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먼저 다가 가셔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 사랑의 특징입니다.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河-

찾아오시는 예수님 (4): 대강절에

대강절(Advent)첫 번째 주일입니다. 마음속에 촛불 하나 밝히고 성탄절에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올해 대강절 기간 동안 참빛 식구들께 두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 영적 일기를 쓰면서 한 달을 보내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큐티하고 그것을 경건의 일기로 기록하시거나, 편한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면서 일기를 쓰실 것을 추천합니다. 영적 일기(spiritual journal)는 신앙과 삶에 깊이를 더해줍니다. 겉으로 표출하는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깊은 내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채워줍니다.

 
둘째는 올해 세 번째 <작은 사랑 나눔>으로 지역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노숙자들에게 슬리핑 백과 점퍼를 나눠주는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12월 둘째 주에 예전처럼 가정별 또는 개인별로 헌금한 것을 이름 없이 돕도록 하겠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서 한 번 식사비를 절약하는 마음으로 (20불 한도) 참빛 식구들 모두 참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찾아가십니다. 그리고 그를 가운데 세우시고,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과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음을 알려주신 후에 그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질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특히 육체에 장애가 있거나 온전하지 않았을 때 몹시 업신여겼습니다. 질병이 주는 고통보다 사람들의 시선과 비판이 더 뼈아픈 시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온전케 되기를 원했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고쳐주셨습니다. 때로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손이 마른 사람처럼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가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안식일에 그것도 회당에서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셨다고 그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향해서 분노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대강절을 맞아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고 회복시켜 주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복음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기 원합니다. 행여나 우리 안에 굳은 마음이 있다면, 부드러운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기다리기 원합니다. 어려운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