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6): 부활절에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나누는 부활절 인사입니다. 부활절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고 드디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춘분(春分)과 보름이 지난 후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에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에 맞춰서 부활절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부활절을 지키게 된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봄철에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겨우내 땅속에 있던 씨가 싹을 틔우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이 임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생명이 임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과 일치합니다(요한 12:24).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부르는 것도 봄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이스터”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탄절이 긴 밤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冬至)에 태양신을 섬기던 전통을 갖다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켰듯이,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부른 것도 세상에서 지키던 봄의 축제를 기독교가 갖고 왔습니다. 부활절과 토끼를 연결하는 것도 북유럽 튜턴족의 이스터 축제와 관련됩니다. 토끼는 그들이 섬기던 이스터 신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갔고, 세상의 풍습을 기독교 절기로 거침없이 변환시키면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습니다.

 

부활절 달걀에 대한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생명을 품고 있는 달걀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달걀 장수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전해 내려오는 전승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 토끼보다 달걀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습니다. 부활 신앙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썩어질 육의 몸이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도 믿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고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셨습니다(He is Risen)! -河-

예수 그리스도 (5)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신앙과 삶의 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세로 목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갑니다. 십자가의 가로 목을 통해서 이웃에게 나갑니다. 세로 목과 가로 목이 만나는 한 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담 이래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깊이 뿌리내린 악의 속성을 해결해 주신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죄의 속박을 풀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갚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고 했으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막혀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이어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사소해 보이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의 가치를 잊고 지낼 때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꾼 값비싼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집착하는 욕심, 시기와 질투를 못박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매일같이 십자가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께 나갑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잔재가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기에 우리의 악한 속성이 뿌리내렸던 죄에서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고리가 끊겼기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의 세력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세상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예수 그리스도 (4)

부활절이 두 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절기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셨기에 탄생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태양신의 생일로 섬기던 12월 25일을 예수님의 생일로 대체한 것이 성탄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에 비교해서 부활절은 유대인들이 지키던 유월절과 맞물린 정확한 시간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을 고려하면 부활절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독교의 역사성이 확증됩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부활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빌라도의 실명이 등장하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 사실에 기초했음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사람이 빌라도였기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지만, 빌라도라는 이름이 갖는 의미는 예수님의 죽음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주후 26-36년까지 유대 총독으로 있었던 실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영적인 것으로 변질시키려는 그릇된 시도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변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세상을 구하러 오신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도 믿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2-23절에서는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을 저주받은 죽음으로 규정하고 그 날에 장례를 지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형틀이었습니다. 반역이나 중한 죄를 지은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전통에 의하면 저주받은 사람이 죽는 나무 위에서 그리고 로마 시대에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제물로 드려진 어린양처럼 세상의 모든 죄를 한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시면서 예고하신 구원에 대한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예수 그리스도 (3)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버지, 전능하심, 창조주”로 정리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요약했습니다. 각각 세 가지 덕목으로 정리한 것을 보면서 사도신경이 우리 신앙의 첫단추요 시작점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사도신경을 시작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풍성해 지고 삼위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깊어지길 바랍니다.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의견이 다양하게 등장했고, 이단들도 생기면서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믿는 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구세주(그리스도, 메시아)로 믿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탄생부터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실 재림까지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됨으로 세상에 오셨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에서 “전능하심”과 연결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일어난 모든 사역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죽은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지를 인간의 언어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대신에 “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것은 역설적이지만 죄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5장에서는 한 사람 아담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온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를 없애고 죽음에서 생명을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태어나시면, 죄를 벗어날 수 없기에 성령으로 나심으로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보혈로 우리의 죄를 없애주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셨습니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을 회복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완벽한 사역에 참여하고, 우리 역시 죄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예수 그리스도 (2)

어느덧 2018년 세 번째 달을 맞이합니다. 새해를 맞은 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순절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올해 사순절에는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시는 참빛 식구들께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일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로 드리는 것을 강조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예배하고, 가정과 세상으로 흩어져서 보내는 6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특별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삶이기에 예측할 수 있고 일상을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단순히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특별한 사건을 만드는 카이로스를 추구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참빛 식구들이 각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개개인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참빛 식구들 한 분 한 분이 튼튼히 세워지면 성도들의 모임인 우리 교회는 저절로 강해질 것입니다. 누군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바르고 굳센 믿음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모습도 요청됩니다.

 

남은 사순절을 보내면서, 주보에 있는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 본문을 따라서 말씀과 기도가 있는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길 부탁드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도전받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친밀한 교제 속에 들어가기 원합니다. 주중에 홈페이지나 목요 서신에 첨부된 주일 설교를 한 번 더 들으시면 각자의 자리에 임하는 말씀의 은혜를 경험하실 것입니다. 물론 새벽 기도회나 수요예배에 참석하실 것도 추천합니다. 예배 참석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길입니다. 교회가 함께 예배하는 것은 주님 앞에서 매우 귀한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에는 금식했고 절약한 양식을 어려운 이웃과 나눴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순절은 “나눔의 절기”입니다. 쓰고남은 것이 아니라 절약한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만 보내는 사순절을 넘어서 이웃과 세상을 마음에 품기 원합니다.

 

이처럼 일년 중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사순절에는 신앙훈련을 실천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합니다. 2018년 사순절을 지내면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신앙이 견고해지고, 각자 주님 앞에서 실천하시는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들어가고, 신앙과 삶 특히 일상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귀한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예수 그리스도 (1)

우리가 매주 한 마음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따라서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 “전능하신” “창조주”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고 고백하는 표현과 방식이 많이 있지만, 신앙의 첫 단추를 올바로 채우기 위해서 사도신경의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기독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주로 오실 것까지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도신경의 고백 가운데 아쉬운 부분은 예수님의 3년 공생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이심을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 없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처음 구절 속에 이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요셉의 약혼자 마리아에게 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예수님께서 죄가 없고 의로우신, 즉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을 알려줍니다. 마리아에게 태어나심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음을 뜻합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과학은 물론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역설이고 신앙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께 거역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났고 세상에 죽음이 찾아 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지은 댓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운명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듯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시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기에 죄지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 성령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약혼자 요셉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이심이라”(1:21)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세상의 왕이 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우리 인생을 주님께 맡깁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