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부활절에

올해 부활절도 교회에서 모이지 못하고 흩어져서 맞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서 특별한 부활절이 한 해 더 연장된 셈입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물론, 한 해 동안 흩어져서 예배했기에 영상으로 예배하며 부활절을 맞는 것이 특별하지 않습니다. 일상이 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부활절을 맞고, 예배 후에 부활절 만찬을 나누던 때가 그립습니다. 내년을 기약합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부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오합지졸이었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고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으면 제자들 역시 흩어지고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제일 먼저 보이시고,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연거푸 나타나셨습니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편지를 보낼 당시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바울 자신의 전도도 헛되다고 말한 것은 단지 이론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경험과 당시 살아있던 부활의 증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활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죽음과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본 제자들과 수백 명의 증인이 있었다는 것은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논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은 진공 속에서 벌어지는 이론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일상과 세상 속에서 부활을 경험하고 고백합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역사이며 삶입니다.

 

셋째로, 부활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에 개입하셔서 생긴 사건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에 드러난 유일한 사건입니다. 부활은 능력입니다.

 

올해도 흩어져서 부활절을 맞지만, 부활만이 갖고 있는 생명, 사실, 능력이 참빛 식구들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룻기 8

룻기의 세 가지 주제

 

그동안 룻기를 함께 읽으면서, 룻기를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예정과 섭리를 소개했습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이나 그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온 것은 미리 짜인 각본을 뜻하는 예정보다 하나님께서 그 순간 함께 하신 섭리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함께 하시고, 간섭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룻기 속에는 보이지 않는 손길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두루 발견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헤세드>입니다. 오늘 본문 속 나오미의 말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20절)에서 “은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입니다. 조건 없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신약의 <아가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룻기에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보아스와 룻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배려와 도움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압 여인 룻을 차별없이 존중하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이삭줍기를 돕고 넉넉한 마음으로 룻을 대접하면서 하나님 사랑, <헤세드>를 실천하였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는 보아스와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보아스의 성품과 행동에 예수님이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밭에 나가서 이삭을 줍고 생계를 해결하는 룻의 모습도 하나님 사랑입니다. 나오미가 힘들어할 때 룻이 나섭니다. 모압을 떠날 때 나오미와 했던 약속을 룻이 모두 지킵니다. 나오미 역시 룻과 보아스 배후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이처럼 룻기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 즉 섭리가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름답고 특별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룻기의 중요한 주제는 “기업 무를 자 (고엘)”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친족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고 구합니다. 행여나 종으로 팔리면 돈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등 친족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였습니다.

 

히브리어 <고엘>은 구원할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장차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삼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신부로 삼으신 것이 생각납니다. 룻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다윗과 예수님이 태어난 것도 연결되니, 성경에서 룻기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세 가지 주제, 하나님의 섭리, 헤세드, 고엘을 기억하고 룻기를 읽어 나가면 룻기를 통한 말씀의 은혜가 더욱더 풍성하게 임할 줄 믿습니다.-河-

룻기 (7)

룻과 보아스의 만남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선합니다. 보통 내러티브(이야기)에는 악한 인물이 있게 마련인데, 룻기의 주인공들은 선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중에 최고의 인물은 보아스일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이쉬 깁보르 하일) 보아스는 자신의 재력이나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서로 축복하면서 인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하시기를” 이라고 보아스가 인사하니 일꾼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이라고 응답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보리 이삭을 줍고 있는 룻을 보고 일꾼들에게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라고 일꾼들이 대답합니다. 룻이 모압 출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와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어쩌면 룻이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다른 밭으로 옮겨가는 순간에 보아스가 룻을 부른 것 같습니다. “내 딸아,” 룻을 딸이라고 부른 것은 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룻이 모압 출신인 줄 알면서도 룻을 친근하게 대하는 보아스입니다.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기 소녀들과 함께 보리 이삭을 주우라고 말합니다. 소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 역시 이방 여인 룻을 보호하는 보아스의 마음입니다.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는 것은 룻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특혜입니다.

 

깜짝 놀란 룻이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면서 이방 여인인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묻습니다. 룻 역시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하는 <에솃 하일/용맹한 여인>입니다.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신과 룻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엘리멜렉의 친척인 보아스가 이런 소식에 귀를 기울인 것은 당연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이유를 말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 나오미를 섬긴 것과 부모와 조국을 떠나서 생면부지 베들레헴에 온 것을 높이 샀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룻이 행한 선한 일에 보답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룻이 “내 주여”라고 자신을 낮추면서 보이스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아스는 룻을 식사 자리에 초대해서 함께 먹고, 마음껏 보리 이삭을 줍도록 허락했습니다.

 

모압 출신, 여인, 그리고 남편이 없는 룻을 배려하고 보살피는 보아스의 성품이 특별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약한 자를 보살피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깜깜한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보아스와 같은 인물이 시대의 등불이요 희망이 되었습니다. -河-

 

룻기 (6)

룻과 보아스

 

룻기에는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첫째는 모압 여인 룻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자기 나라로 피난 온 가정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그만 병약한 남편이 먼저 죽고 시어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시어머니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습니다. 특별한 충성이었습니다.

 

둘째로 시어머니 나오미입니다. 룻기 1장의 주인공이 나오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엘리멜렉을 따르는 여성이었지만, 남편과 두 아들이 죽으면서 <에솃 하일, 용맹한 여성>이 됩니다. <마라> 쓰디쓴 인생을 살면서도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용기도 남달랐습니다.

 

세 번째 인물은 룻기 2장(막)에 등장하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자”라는 소개에 걸맞게 베들레헴에서 명성과 부 그리고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인물입니다. 본문에서는 용맹한 여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솃 하일”과 짝을 이루는 “이쉬 깁보르 하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깁보르”는 전쟁에 나가는 용사, 또는 부와 명예를 갖고 있는 인물을 가리킵니다. “하일”은 힘이 있다는 뜻이고 “이쉬”는 남성입니다. “유력한 자”라는 한글 번역 그대로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었습니다. 보아스는 <깁보르 하일, 힘 있는 자>라는 이름 뜻대로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집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보아스가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보리밭에 도착해서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4절)고 인사합니다. 일꾼들 역시 보아스를 향해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4절)로 응답합니다. 주인 보아스와 일꾼들 간의 관계가 꽤 훌륭합니다. 보아스는 유력한 인물이지만, 사리 분별이 확실하고 친절하며 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선한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의 삶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자기 사정을 말했지만, 실제로 닥친 어려움에 마음과 삶이 무너지고 살길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때 룻이 나섭니다. 룻이 <에솃 하일, 용맹한 여성>이 됩니다. 룻기 1장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나오미였다면, 2장으로 오면서 나오미는 조언하고 룻이 행동합니다. 마침 보리 추수 때이니 들에 나가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허락된 보리 이삭을 주워 오겠답니다. 나오미는 담담하게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룻이 찾아간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이렇게 룻과 보아스의 인연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손길(섭리)이 나오미, 룻, 보아스 위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우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간섭입니다. -河-

룻기 (5)

마라: 쓰디쓴 인생

 

구약성경 룻기의 시작은 나오미가 자신을 부르듯이 “마라” 즉 쓰디쓴 인생길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가문의 가장 엘리멜렉이 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모압 땅으로 가면서 생긴 마라의 삶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왕이십니다”라는 이름을 가진 엘리멜렉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셨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고 살았던 엘리멜렉입니다.

 
그의 아내 나오미는 “나의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고 두 아들은 건강이나 능력 면에서 조금 부족했지만, 훌륭한 남편을 만났습니다. 무엇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서 베들레헴에 가뭄이 들기 전까지 기쁨의 삶을 살았던 나오미입니다.

 
그런데 집안의 가장 엘리멜렉과 상속자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죽고 나오미 혼자 남았습니다. 모압 출신 두 며느리가 있었지만,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르기 전까지 그들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닥친 엄청난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는 분들은 나오미 가족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한 것에서 원인을 찾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이방 땅으로 이주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으니 나오미가 모압으로 이주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닥친 고난을 쉽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정죄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설교 시간에 나오미에게 닥친 고난을 우연(랜덤/random)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나오미 자신은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쳤고(1:13),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벌을 내리셨고 괴롭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20-21). 누구나 어려움이 닥치면, 나오미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렇게 정죄하는 것은 조심할 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생길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서가 깨지고, 악이 판을 치고, 세상 사람들은 자기 좋을 대로 행하는 사사 시대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현재의 고난과 악은 사라지고 다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낙원이 회복되겠지만, 그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는 소망입니다.

 
일단 우리의 삶은 힘겹습니다. 나오미가 아니라 마라의 삶을 사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을 어떻게 맞이하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기독교인답게 살아가느냐입니다. 앞으로 펼쳐질 룻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