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1)

사도 요한

 

매년 가을에는 신약성경 가운데 한 권을 정해서 읽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올해도 신약성경 뒷부분에 위치한 공동 서신 요한 일서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요한 일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인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복음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습니다. 자신의 배를 갖고 있었고, 훗날 예수님께서 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요한의 청탁으로 베드로와 함께 집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으니 요한은 갈릴리는 물론 예루살렘에서도 통하는 괜찮은 가문 출신 같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는 특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실 때도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던 전 날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도 비록 잠은 들었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끝까지 예수님과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를 특별히 훈련시키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의 형으로 불리는 야고보는 예루살렘에 박해가 닥치면서 일찍 순교했습니다(행12:1-2). 예수님의 핵심 제자였던 야고보의 순교는 초대 교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동생 또 다른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는 물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행8:14)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초대교회를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면, 사도 요한은 서머나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 하나님의 일꾼을 세우고,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을 기록해서 자신이 목격하고 체험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노년에 밧모섬에 귀양갔을 때 계시를 받고, 신약 성경의 마지막 말씀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100세 가까이 장수하면서 차분하게 신앙의 길을 간 인물이어서 사도 요한 또는 장로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부탁대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살았을 것입니다(요19:27). 오랫동안 장수하면서 에베소와 서머나 교회의 감독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을 세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신실한 주의 일꾼으로 교회를 세웠고 결국 순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가장 적합하게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요한일서 4장과 5장에서 알 수 있듯이 요한은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게 사랑을 강조했고, 초대교회 당시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에 맞서서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앞으로 요한일서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신앙은 물론 우리 안에 임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요한처럼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시간이길 바랍니다.-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9)

불쌍히 여기시니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홉 번째 기적은 귀신들려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시고 다시 갈릴리 선교를 위해서 집을 떠나셨습니다. 맹인들은 비밀로 하라는 예수님의 부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파했기에 예수님의 명성은 갈릴리 전체로 퍼져 나갔을 것입니다.

 

누군가 귀신들려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스스로 예수님께 올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이 들렸지만,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친구가 있었듯이 이 사람에게도 가족이든 친구이든 돕는 손길이 있었기에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입니다.

 

말을 못 한다고 모두 귀신이 들린 것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귀신의 영향으로 말을 못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옛날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습니다. 의료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탓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이 사람이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놀라워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냈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귀신을 쫓아낸 것은 사실이니 부인할 수 없고, 대신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의 왕을 의지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에게 나오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의 연장선에서 가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8장과 9장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여있습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과 더불어 행함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밝히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나온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고난받고 힘없이 살아가는 것을 한없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입니다. 이들을 지도하고 인도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기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신앙과 삶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그것을 거둘 일꾼이 적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 세상에서 기쁜 소식을 전할 일꾼을 찾고 계실 겁니다. 우리가 그 일꾼이 되기 원합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8)

눈을 뜨게 하시다

 

팬데믹이 오기 전에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적을 차례로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자택 격리가 시작되면서 마지막 두 본문을 다시 모였을 때 나누기 위해서 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올해 안에 대면 예배로 모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곱게 싸두었던 귀한 물건을 꺼내서 듯이, 지난봄에 아껴두었던 “예수님, 우리 예수님”의 마지막 두 본문을 앞으로 두 주 동안 나누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9장을 한 호흡에 읽을 수 있습니다. 5-7장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새로운 계명을 선포하신 산상 수훈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듯이, 예수님도 산에서 제자들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8-9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는 기적들이 연거푸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병자들 대부분이 사회에서 천대받던 사람들입니다.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유대인들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과감히 없애셨습니다. 이방인인 백부장의 하인도 고침을 받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부정한 여인도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면서 회복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시의 고정관념을 깨는 행동이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음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소녀를 살리시고, 폭풍을 다스리신 예수님에게서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바람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거나 경험했던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인물들이 보인 반응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대면하고 경험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까지 쫓아와서 고쳐주시길 간청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외침을 보니, 이들은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 메시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것이 긍휼(compassion)인데 맹인 두 사람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능히 이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눈을 뜨게 했습니다:“너희 믿음대로 되라”.

 

눈이 밝아지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육체의 눈은 물론 우리 마음의 눈도 떠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되신 예수님을 밝히 볼 수 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떠서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을 보기 원합니다.-河-

2020 기도 (7)

인도하셨나이다

 

기도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기도의 끝은 기도한 것이 응답되는 것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기도에 집착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가 응답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 같아서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해피 엔딩입니다. 반대로 기도가 응답되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기도의 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77편의 시인 역시 처음에는 개인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과 자세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했지만 쉽게 응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세상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기도를 만만하고 순진하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훈련이고 삶 그 자체입니다.

 

기도의 끝이 단지 기도 응답이 아닌 것을 시편 77편이 잘 보여줍니다. 시편 기자는 기도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슬픔, 아픔과 한계를 실감했습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적인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겸손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기도 가운데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기도의 큰 결실이지만, 기도의 끝은 아닙니다. 시편 77편이 알려주는 기도의 끝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변화되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 마르둑을 비롯한 세상의 그 어떤 신보다 위대하다고 찬양했습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에 자랑했습니다. 야곱과 요셉 같은 자신의 조상을 속량(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바다에 길을 내시는 하나님도 찬양합니다. 주의 백성이 바닷길을 따라서 건너니 다시 물이 들어와서 주님의 발자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 옛날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이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기도는 대부분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 기자가 걸었던 기도의 여정을 우리도 따라 걷기 원합니다. -河-

2020 기도 (6)

물들이 주를 보고

 

2020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시편 77편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시편 77편은 10절(“이것이 바로 나의 아픔입니다. 나의 약함입니다. 그런데 지존자의 오른손이 변화시켰습니다”)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었습니다.

 

전반부는 밤에도 손을 내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게 씨름한 시인의 기도였습니다. 좀처럼 응답되지 않아서 한숨이 나오고 힘이 빠졌지만,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치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한 후반부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같은 일을 해도 전에는 힘겨웠던 일이 이제는 찬양과 감사로 변합니다. 깊은 은혜를 경험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낮은 소리로 노래하면서 마음에 채웠습니다. 소리 없이 강한 시인의 모습을 닮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이로움(wonders)을 고백합니다.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작은 것도 기적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속량(redemption)”이라는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도 함께 묵상했습니다. 우리 역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우리와 세상을 구하고 속량하실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했습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안에 가두려는 욕심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경이로움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사에 초대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겠다는 다짐입니다. 별것 없는 우리 일상과 인생이 하나님 역사의 한 부분으로 승격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대 시대에 인류를 위협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다의 폭풍입니다. 폭풍이 불거나 해일이 닥치면 속수무책이어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고대사회에서 폭풍을 다스리는 신이 최고였습니다. 본문 속에서 물들이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시인이 고백했듯이 하나님이 최고라는 뜻입니다(16절). “깊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홈>에는 당시 제국인 바빌론의 여신 티아맛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깊음을 제거하십니다. 회오리바람, 우렛소리, 번개와 땅이 흔들리는 지진 등은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시니 하나님께서 그 어떤 신보다 가장 위대하다고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주간 동안, 겸손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모든 물들을 이기신 하나님이 최고이심을 고백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하나님의 크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