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우리 예수님 (7): 믿음을 보시고/ 마태 9:18-26
찬양: 내가 주님을 (이경민 지휘자)
봉헌송: 공감하시네
예수님, 우리 예수님 (7): 믿음을 보시고/ 마태 9:18-26
찬양: 내가 주님을 (이경민 지휘자)
봉헌송: 공감하시네
두 가지 기적
나병 환자,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첫 번째 기적 묶음, 갈릴리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두 번째 기적 묶음에 이어서 마지막 세 번째 그룹은 아픈 자들과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깃든 세 가지 기적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중심에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 기적들이 처음과 끝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두 가지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한 관리가 예수님께 와서 절을 하면서 자신의 딸이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딸의 몸에 손을 대면 살아날 수 있으니 함께 자신의 집에 가시길 부탁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 따르면, 이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동안 살펴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서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집으로 가십니다.
많은 사람이 뒤를 쫓았습니다. 회당장이라는 지역 유지의 부탁이었으니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지 궁금해서 더 많은 인파가 몰렸을 것입니다. 그때 한 여인이 예수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 여인은 12년 동안 하혈을 하는 부정한 병을 앓고 있었는데, 예수님 소문을 듣고 옷깃이라도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 같아서 인파를 무릎 쓰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여인은 살짝 예수님의 옷깃을 만졌는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손길을 감지하시고 여인을 불러 세우셨습니다. 여인이 얼마나 깜짝 놀랐을까요! 지붕을 뚫고 예수님께 나왔던 중풍 병자를 대하시듯이 이 여인에게도 “안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고 선포하셨습니다. 12년 동안 하혈을 하면서 부정한 병을 앓았으니 세상에서도 죄인 취급을 받고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마음도 헤아리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여인과 대화하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회당장의 집에 갔을 때는 피리를 불며 장례절차를 밟고 있었습니다. 그 다급한 순간에도 재촉하지 않은 회당장의 성품과 믿음이 대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을 물리시고,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내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녀에게 가서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시고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죽었던 소녀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회당장의 딸을 살리심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6):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 마 9:1-8
찬양: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마지막 세 번째 기적은 중풍 병자를 고치고 그의 죄를 용서하신 사건입니다.
데가볼리 지역의 무덤 사이에 살던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만나서 병이 나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가복음 2장에서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병상에 메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예수님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중풍 병자를 메고 온 사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뚫고 중풍 병자가 누운 병상을 예수님 앞으로 달아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본문은 마가복음이 전하는 세세한 것을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지붕을 뚫고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지붕을 뚫었습니다. 큰 용기를 냈고 모험을 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맞아주지 않으시면 난감한 상황이니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예수님께서 먼저 이들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목격한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서 무슨 권위로 죄를 용서해주는지 의구심을 갖습니다. 서기관의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과 일어나 걸으라는 말 가운데 어느 것이 쉬운지 물으십니다. 사실 두 가지 모두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일을 하십니다. 중풍 병자를 향해서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6절)고 명령하시니 병자가 실제로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또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입니다. 백성들은 죄를 사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예수님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젊은이에게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행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파도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이방 땅 데가볼리에서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딱딱하게 굳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기적을 통해서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5): 귀신을 쫓으신 예수님/ 마 8:28-34
찬양: 내 진정 사모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두 번째 사건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불어닥친 바람을 잠잠케 하심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수를 건너서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역에 도착한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지내는 귀신들린 두 사람을 온전케 해주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영적인 세력인 귀신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가다라”는 데가볼리에 속한 마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두 사람이 무덤 사이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같은 사건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막 5:1-20).
마가복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힘이 무척 세서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밤낮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을 갖고 자기 몸에 상처를 입히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군대(6천 명에 달하는 로마 군대 조직 레기온)라고 불리는 큰 귀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으로 돌아오면, 귀신들린 두 사람이 몹시 사나워서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께 소리 지르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자연 세계를 초월한 영적인 세계가 존재함을 알려줍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왜 자신들을 괴롭히러 오셨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론 요한 계시록에서도 마지막 때가 되면 악한 세력이 모두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소멸될 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알고 있어서 더욱 강력하게 활동했을 것입니다.
귀신들이 자신들을 돼지 떼에게 넣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향해서 “가라”하시니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나와서 돼지 떼에 들어갔고 돼지는 비탈을 내리 달아서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돼지의 숫자가 2천 마리라고 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을에 알렸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예수님께 떠나시길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곳은 유대 땅이 아닌 갈릴리 건너편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악한 귀신이 부정한 동물 돼지에게 들어가길 원한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다에 빠져 죽은 돼지 2천 마리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귀신 들린 두 사람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온전케 회복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무엇보다, 말씀으로 귀신들을 통제하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방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 (4):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 8:23-27
찬양: 내 맘이 낙심되며
– 바람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마태복음 8-9장을 중심으로 <예수님, 우리 예수님>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산상수훈 다음에 나오는 본문인데 특별히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이 연거푸 등장합니다.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시고, 앞을 보지 못하고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기적을 행하시는 중간 중간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에 대해서 (8:18-22) 알려주시고 실제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9-13).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온전케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분명하게 알리고 있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은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마비된 로마 백부장의 종을 일으키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사이의 벽과 경계를 허물고 지우셨음을 배웠습니다. 나병 환자나 백부장의 경우, 벽을 넘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베드로 장모는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셔서 그의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그렇게 표현된 것입니다.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나병은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종교적 경계, 로마 군대 백부장에게 있던 민족과 신분의 경계,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허무시는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뿐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서 배에 올랐습니다.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는 여정입니다. 그때 갑자기 큰 폭풍이 불어서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8:25)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폭풍 앞에서 무서워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는데도 무서워했습니다.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거나 하나님께서 침묵하고(주무시고) 계신 것 같을 때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임을 오늘 본문에서 배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통해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줍니다. 자연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 河-
예수님, 우리 예수님(3):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예수님/ 마태 8;14-17
찬양: 어저께나 오늘이나
봉헌송
교회가 세워지는데 많은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손길이 없으면 결코 온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를 세우는 모든 손길이 귀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는 여느 교회처럼 소위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두고 억지로 배치하거나 일을 하도록 강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사역은 감히 시작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맡을 분들이 계시고 그 일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와 맞을 때 실시할 뿐입니다.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그동안 우리 교회가 추구했던 사역의 방향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사역이 많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에 집중합니다. 샌프란에 계신 권사님들 중심의 수요 예배와 새벽기도회는 이런 사역을 지원하는 시간입니다. 한 달에 한 번 모이는 속회가 여러 가지 이유로 만남을 갖지 못할 때도 있지만, 가능한 대로(할 수 있는 만큼) 모이는 데 힘씁니다. 대신, 이 모든 것이 자원하는 손길로 이뤄지는 것이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사역이 있습니다. 점심 친교와 설거지입니다. 주일예배가 점심 친교 즉 사랑의 애찬까지 이어지기에 점심 친교 자원이 필요합니다. 넉 달에 한 번씩 자원을 받으니 일 년에 세 번 섬겨야 합니다.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자원하는 손길들로 채워졌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설거지는 접시를 닦는 기계를 기증받은 이후 한결 쉬어졌습니다. 예전에 쓰던 종이 접시도 덜 쓰게 되었으니 환경운동에도 참여하는 셈입니다. 그래도 백여명 가까운 점심 설거지가 만만치 않게 나옵니다. 그동안 속회 별로 돌아가면서 설거지를 담당했는데, 이번 주부터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려고 합니다.
여섯 개의 설거지 조를 만들었으니 한 달 반마다 돌아오게 됩니다. 주일 오후에 모임을 갖는 청년부를 한 조로 만들고 (물론 청년부의 한두 분을 지원받았음) 나머지 조들은 기혼 그룹과 어르신 그룹을 합쳤습니다. 설거지를 하시면서 서로 교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각 설거지 조에서 다음 사항을 꼭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첫째, 자신이 속한 설거지 조를 꼭 확인하시고, 주보에 다음과 이번 주 설거지 조에 자신의 조가 있다면 가능한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최소 인원을 배치하다 보니 결석하시면 다른 조의 지원을 받아야 가능해집니다. 둘째, 조장님들께서 담당자들을 배정해서 분업으로 설거지를 하시면 적은 인원으로 무난히 설거지를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부엌 설거지와 쓰레기만 담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모두 가신 후에 저희가 정리하겠습니다.
궂은일이지만 마음을 합쳐서 섬길 때 기쁨과 보람이 배가될 줄 믿습니다. 은밀히 교회를 섬기는 참빛 식구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