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성금요일(Good Friday)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Good”이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대체로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good의 고어적 의미에 holy가 들어있기에
우리 말 그대로 성금요일로 읽는 시도입니다.

Good이 God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꽤 임의적입니다.

세 번째 견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만 놓고 보면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임했기에 “선한(good) 사역”입니다.

저에게는
세 번째 견해가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2.
올해 성금요일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있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And the life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ESV)

한 단어 한 단어를 쉽게 읽고 넘길 수 없습니다.
한 구절인데 자꾸만 걸립니다.
멈춰서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을 믿는다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여러 번 읽고
마음에 새기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우리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기 원합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확신이 생깁니다.
힘이 생깁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이 Good Friday인가 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날,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오르게 하시고
그 은혜에 참여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8 이-메일 목회서신)

주의 평안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에는
김연아 선수가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2년의 공백 후에 출전한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김연아 선수는 멋진 스케이팅으로
우승컵을 품에 안았습니다.

어느덧 예전의 앳된 모습이
많이 사라지고
대학을 졸업한 20대중반의 성숙한
모습으로 링크에 등장했습니다.

김선수는 매우 침착했습니다.
행동이나 표정이 흩으러 지지 않았습니다.
심판들의 편파판정이 있었다는 말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습니다.
거칠 것 없이 스케이트를 지쳤고
아주 높게 점프를 하면서 날아올랐습니다.
어디서 저런 침착함과 자신감이 나올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을 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의 표정과 손끝에 이르는 동작까지
매우 섬세하고 우아합니다.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2.
김연아 선수의 스케이팅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을 향해서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마음과 삶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물론 작은 흔들림과 순간적인 폭풍이 올 수 있지만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멋지게 지쳐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기억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자신 있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 119:165).
Great peace have those who love your law; nothing can make them stumble. (Psa 119:165 ESV)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큰 평안(Great peace)”는
많은 평안이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한번만 임하는 평안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많이 임하는 평안(샬롬)입니다.

“장애물”은 말 그대로
걸려 넘어뜨리는 물건/사건/사람 등입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장애물이 없습니다.
영어 번역 그대로 장애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이 나옵니다.

사순절 끝자락에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금 돌아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자신감을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의 무대에서
김연아 선수보다 더 침착하고
멋지게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기 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결국에는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끔찍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주님과 더불어 걷게 하옵소서.
침착하고 멋진 하루의 삶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의 큰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21 이-메일 목회서신)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는 “반석(바위,rock)”에 대한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형이
바위가 포함된 산악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바위”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홍수가 나면 휩쓸려 무너지지만
반석 위에 세운 집은 견고해서 끝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을 반석 위에 지은 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반석은 견고함의 상징입니다.

2.
시편 40편 2절은 웅덩이와 반석을 비교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발을 반석 위에 두사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He drew me up from the pit of destruction, out of the miry bog, and set my feet upon a rock, making my steps secure. (Psa 40:2 ESV)

본문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잡혀서 떨어졌던 물도 없는 함정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그를 웅덩이에 던졌습니다.

수렁은
진흙탕으로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가는 곳입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웅덩이,
감옥처럼 자유도 없고 꼼짝달싹 못하는 상태,
게다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 움직이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곳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입니다.

반면에 반석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져서
견고하게 서 있는 장소입니다.

수렁에서는 움직일수록 빠져들어갔는데
반석에서는 손쉽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3.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웅덩이에서 건져내셔서
반석 위에 세우셨다고 고백합니다.

시편의 다른 말씀과 연결시키면
“반석”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시31:3)

그렇다면
반석 위에 세워지고,
반석 위를 걸어가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돌아보면 뒤죽박죽입니다.
혼란스럽고
때로는 어디론가 빠져드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도 웅덩이처럼 꽤 답답하고
복잡하게 얽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 잠잠히 반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웅덩이에서 끌어올리셔서 반석 위에 세워주시고
발길을 견고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생각납니다.:
“거기 계신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
우리 하나님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우리들의 마음과 삶이 어떻든지
언제나 거기에 계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반석 되신
하나님을 속으로, 입술로, 몸으로 찬양하면서 하루를 시작합시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행하신 모든 것 완전하시네
나의 생명 되신 하나님/ 내게 행하신 일 찬양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모습과 지경이 어떠하든지
반석되신 하나님,
우리를 건지셔서 반석 위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4 이-메일 목회서신)

길에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한달 동안 주일설교에서
여리고 소경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이번 주까지 한번 더 바디메오와 지내고 싶었는데
사순절을 맞아서 전하려는
또 다른 주제의 말씀이 있었기에
지난 주에 마무리했습니다.

여섯 구절밖에 되지 않는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시간에는 길가에서 구걸을 하는 소경 바디메오의 실존,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릴 만큼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소경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행인들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인생을 걸고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처절할 정도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바디메오의 간절함을 나눴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 그는 강력하고 가장 훌륭한 외마디 기도문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셋째 시간에는 관점을 조금 바꿔서
소경 바디메오가 아니라 그의 외침을 듣고 발길을 멈추신
예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소경 바디메오의 간절한 외침을 들으셨고,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를 부르라” – 소경을 부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불려 나온
소경 바디메오와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바디메오와 대화를 시도하십니다.
단순히 눈을 뜨게 해주는 사건을 넘어서
바디메오와 교제하시고,
그를 사람들 앞에서 귀한 존재로 높여주셨습니다.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 (let me recover my sight).
– 소경 바디메오에게는
오직 한 가지 구체적인 소원이 있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예수님의 선포에
바디메오는 다시 보게 됩니다.

믿음
– 우리들 인생길에서 꼭 붙잡아야 할 끈입니다.

2.
바디메오에 대한 말씀은
마지막 해설(narration)까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막10:52)
 And immediately he recovered his sight and followed him on the way. (Mar 10:52 ESV)

한번 더 말씀을 전했다면
“길에서(on the road) 예수님을 좇는 바디메오”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함께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첫째는 즉각성입니다.
바디메오는 눈이 뜬 그 순간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지도 않았고, 미루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매 순간 순간 즉각적인 결단임을 바디메오를 통해서 배웁니다.

둘째는 현장성입니다.
눈이 뜨인 바디메오는 자신의 삶의 처소였던
길에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셋째는 역동성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디메오는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앉은뱅이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바디메오는 움직입니다.
길 가에서 길 위로 올라왔습니다.
자신의 발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역동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들도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세상의 염려와 바쁨 속에서,
자신의 문제에 얽매여서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나서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따라 나서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디메오의 기도
바디메오의 믿음
바디메오의 헌신을 배우게 하옵소서.
힘차게 주님 따라 나서는 우리의 인생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7 이-메일 목회서신)

삼일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3월 1일
94주기 삼일절입니다.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학창시절 운동장에 모여서 부르던
삼일절 노래가 생각납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삼천만이 분연이 일어났던
삼일 운동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의 효시가 되었고
그 불씨가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기에
해방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명이었습니다.
(천도교 대표도 15명, 불교 대표가 2명이었구요)

그때는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했습니다.

요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꽤 많은 비난을 받고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멋진 신앙의 선배들이 있기에
그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3.1절을 맞아서
우리의 뿌리인 민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민족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게는 내 동족을 위한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롬9:2-4, 새번역)

2.
벌써 3년이 지났군요.
칼리지 코스타 오전 강해 때
“민족”이란 주제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원고에서 한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은 초대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역사를 뒤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환경이 변해서 다시 돌아가도 같은 효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선배들의 좋은 모습을 거울삼아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신앙을 재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생각합니다. 민족 때문에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끊어진다고 해도 감수하겠답니다. 마음이 아파서 번민하고 고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갖고 자신의 민족, 공동체를 위해서 고민하고 자신이 죽어도 민족이 복음화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바울에게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은 대한민국, 우리 민족을 위해서 번민합니까? 안타까워서 근심합니까? 우리 가운데 한국으로 돌아가셔서 일하실 분들도 계십니다. 이곳에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 가면 말할 것도 없지만 미국에 남아 있는다고 해도 우리 앞에는 “Korean”이 따라 다닙니다. 미국시민이 되어도 “Korean American”입니다. 우리의 뿌리를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얼굴에 써있고, 김치와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는 우리들의 본성이 우리가 한국사람인 것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뿌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생각하면서 근심하고 고뇌하였듯이 우리들도 한민족, 또 우리 나라를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다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면서, 신앙의 선배들이 좋은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신앙을 지켰고 또 교회와 나라를 지켰습니다. 세상 속에서 말 그대로 소금이 되었고 빛이 되었습니다. 그런 선배들의 뜻도 우리 안에 되살리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 두고 온 조국과
온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을 가슴에 품고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온 세상에
복음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옵소서.
겸비하여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한국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3.1 이-메일 목회서신)

다윗의 영적 상상력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학기 목요성경공부에서는
유진 피터슨의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을 읽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말씀을
우리들 삶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다시 쓴 매우 탁월한 책입니다.

오늘은 골리앗을 이긴
다윗에 대해서 읽었습니다.
(요약본은 청년부 Face Book에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마음,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피터슨 목사님은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반대로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거인 골리앗에 사로잡혀 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2.
다윗은
시냇가에서 다섯 개의 돌을 고를 때
물맷돌을 가지고 이리며 사자를 물리쳐서 양들을 보호했던 경험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골리앗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있었기에
다윗을 무시하는 골리앗도
다윗을 두고 안절부절못하는
형님들과 사울왕의 생각도 뛰어넘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는
위대하고 강하신 만군의 주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골리앗을 대면하러 뛰어나가는 다윗은
하나님의 팔로 무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이
가져다 준 힘이었습니다.

3.
골리앗이 조소하는 가운데
시냇가에서 돌 다섯 개를 무릎 꿇고 줍는 다윗의 모습에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만 초라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골리앗을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조소와 비난이 매우 거셌습니다.

다윗은 그때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의 영적 상상력은 하나님께 도달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지게 골리앗을 무너뜨립니다.
우리들도 다윗처럼
참으로 신중하고
참으로 대범하기 원합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17:45-46)

You come to me with a sword, a spear, and a javelin, but I come to you in the name of the LORD of hosts, the God of the armies of Israel, whom you have taunted. This day the LORD will deliver you up into my hands, and I will strike you down and remove your head from you. And I will give the dead bodies of the army of the Philistines this day to the birds of the sky and the wild beasts of the earth, that all the earth may know that there is a God in Israel, (1Sa 17:45-46 NAU)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적 상상력과 관련해서
피터슨 목사님께서 던지신 질문을 우리들 각자에게 적용해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믿음을 점검하기 원합니다.

그 순간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돌 다섯 개를 줍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스스로 우리의 무릎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저 관습적으로 남들을 따라 살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성령님이 기름 부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신 존재로서 살 것인가? 아니면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전문가들에게나 기대고 의지하며 살 것인가? 골리앗 공포증과 하나님, 둘 중의 무엇이 우리 삶의 행로를 결정짓게 할 것인가? 사울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 것인가?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60쪽-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능력에 이를 수 있는
영적 상상력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21 이-메일 목회서신)

2013 사순절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2013년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첨부한
사순절에 대한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매년 같은 자료를 함께 나누는데
우리 모두 하도 바쁘게 살다 보니
사순절에 대한 자료는 물론
일년에 한번 맞는 사순절이 매년 새롭게 다가옵니다.^^

사순절은
기독교 최고의 절기인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부활절은 축제입니다.

따라서 사순절 기간 동안
지나친 금욕이나
율법에 얽매인 또는 억지로 하는
경건의 훈련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일년 365일 가운데
약 10분에 1을 구별해서 하나님 앞에서 지낸다는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는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낼 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안성맞춤의 경건의 훈련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면 됩니다.

성경읽기 (신약통독, 복음서 통독, 로마서 통독 등)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기 또는 기도문 쓰기,
일주일에 한끼라도 정기적으로 금식하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등
각자에게 꼭 필요한 신앙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이 각박합니다.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 갑니다.
이런 때에 사순절을 맞는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이웃들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다른 이들을 섬기고 기쁨이 되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2013년 사순절을 맞아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참빛 교회 성도님들 위에 깊이
그리고 뜨겁게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2013년 사순절을 지내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14 이-메일 목회서신)

영혼의 닻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히브리서를 읽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핍박으로 인해서
신앙을 저버리기 쉬운 상황에 처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유대교에서 개종하였거나
유대교와 밀접하게 연관된 기독교인들에게
구약의 전통을 갖고 예수님께서 메시야되심을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에는
구약성경의 인용과
유대교와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구약의 제사와 연관시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제사가 폐지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길 부탁하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창세기의 아벨부터 차례로 소개합니다.

믿음 장이라고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을 올린
구약의 인물들처럼
히브리서를 읽는 성도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들까지 믿는 이들이 들어가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길 바라고 있습니다.

2.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히브리서 6장 20절에는
“영혼의 닻(the anchor of the sould)”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We have this as a sure and steadfast anchor of the soul, a hope that enters into the inner place behind the curtain, (Heb 6:19 ESV)

닻(anchor)은 배들이 항구에 도착해 있거나
바다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할 때
배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옛날에는 바위덩어리나
쇠를 바다에 던져서 배를 고정시켰답니다.
항구에 들어오면 밧줄 같은 것으로
기둥(닻)에 묶어서 배를 고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배가
풍랑에 흔들리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지 않도록 확실하게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영혼”에는
“목숨” 또는 “삶(life)”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닻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고정시키는 닻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긴 소망이
영혼의 닻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여기서 “소망”은
구원의 소망,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갖게 되는 소망이기에
세상이 주는 소망과 다릅니다.

소망으로 영혼의 닻을 삼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삶이 예수님께 매여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꼭 붙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망망대해 인생의 바다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정처 없이 헤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혼의 닻을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에 내린 우리들은
삶이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삶을 고정시켰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 삶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힘차게 시작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 영혼의 닻을
예수님께 내리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2.7 이-메일 목회서신)

은혜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나라가 드디어

나로호 인공위성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습니다.

이제 대한민국도

우주강국이 되었다고

신문에서 앞다투어 보도합니다.

과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위성의 움직이는 속도가

1초에 7.9km라는 것과

하루에 지구를 14바퀴를 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와- 굉장한것이구나’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시에 산소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승무원의 설명을 듣습니다.

고도가 높으면 산소가 모자라기 때문이겠지요.

비행기가 대개 10km높이로 난다고 하는데도 산소가 모자란다면

나로호는 300km-1500km위를 돌고 있으니

도대체 그곳은 어떤 곳일지 막연히 궁금해졌습니다.

대기권 밖 우주공간이니

당연히 공기는 없겠지요.

나로호를 생각하다가

엉뚱하게도 공기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어봅니다.

우리 동네 공기가 참 상쾌합니다.

몸 속 깊이 공기가 들어가는 것이 느껴집니다.

심호흡을 연거푸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공기(산소)가 중요한데

그 귀중함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2.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공짜로 숨을 쉬듯이

은혜도 거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라는말 자체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은혜로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니

값싼 은혜는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여전히 부족하지만 이 만큼 자라있는 것도 생각해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공기처럼 늘 우리 곁에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귀한 것이어서

미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공기가 없어진다면

우리의 목숨이 거기서 끝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우리들의 생명도 그 순간 끝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을 감지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애원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51:11)

Cast me not away from your presence, and take not your Holy Spirit from me. (Psa 51:11 ESV)


나를 주 앞에서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우리들 사방에 공기처럼 임해 있는

주님의 은혜를 감지하고 감사하기 원합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 안에 넘치기 원합니다.

나로호가 우주공간을 향해서 쏘아올려져듯이

오늘 하루는 시간을 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찬양을

높이 높이 올려 보냅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 귀하고 커서 때로는 감지할 수 없지만

주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느끼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31 이-메일 목회서신)

나다니엘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아침 새벽기도회에서는

요한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부르시고

빌립을 부르십니다.

같은 동네 벳세데 출신 사내들입니다.

빌립이

나다니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나다니엘이 오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것이 없도다. (요1:47)

Here is truly an Israelite in whom there is nodeceit!” (Joh 1:47 NRS)

예수님께서는 빌립이 나다니엘을 만나기 전에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단지 그를 바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물 됨됨이와 성품까지 꿰뚫어 보셨습니다.

깜짝 놀란 나다니엘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요1:49)

“Rabbi, you are the Son of God! You arethe King of Israel!” (Joh 1:49 ESV)

예수님께서는 한 걸음 더 나가십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랍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나다니엘 –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또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을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속에 “간사함(deceit)”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간사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고기를 잡는 미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간사함은 남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꼼수를 부리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덫을 놓는 것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니엘에게는

간사함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신 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쯤 해서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을 떠올리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간사한 인물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속이면서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난갈때

돌베개를 베고 길에서 잠을 잡니다 (창28장).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환상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은 간사함에 빠져있었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웠습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어두운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요1:9-11).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 돌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신앙을 회복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향해서 나다니엘처럼

고백하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임금이로소이다

간사함이 없던 나다니엘은

예수님을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3.

어느 덧 2013년 새해의 첫 달도

거의 지나갑니다.

시간이 빠르다고 하염없이 말하기에는

꽤 아까운 순간들입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드린대로

흘러가는 시간들(클로노스)이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들(카이로스)로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참됨/진실됨을 간직하기 원합니다.

행여나 야곱의 간사함이 있다면

환도뼈가 부러지는 처절한 씨름을 통해서

참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원합니다.

우리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기 원합니다.

무화과 나무 아래 있던 나다니엘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께서

각자의 삶의 처소에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신다면 뭐라고 하실까요?

참된 주의 백성으로 주님께 보이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루 하루

진실됨으로 주님께 나가게 하옵소서.

나다니엘처럼

참된 주님의 백성으로 주님께 인정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3.1.24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