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 웅덩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산을 옮기는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과 기도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면 최고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산을 옮기는 사람 (mountain-mover)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산을 옮기는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있을 수 있지만, 매번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신앙생활이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기도 제목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 수 있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기뻐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박국 3:18-19).

 

단숨에 여기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실천하고 의도적으로 훈련하고

그 과정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참 신앙의 여정에 들어서고 그 길을 걷는 것이지요.

 

2.

요즘 아침마다

예레미야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엊그제 나눈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두 가지 죄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샘)인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생명이 있는데, 다른 신들과 가치관을 쫓아갔습니다.

생명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을 추구했습니다.

 

둘째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밑이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일종의 스타트 업을 세우는 일과 같고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스스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횡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노력한 대가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밑이 빠진 웅덩이였습니다.

물이 모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갑니다. 헛수고한 것입니다.

 

3.

저희 집에 화장실 하나가 고장 났습니다.

고무마개가 헐거워져서 물이 계속 세니

주인이 물을 많이 쓴다고 야단을 칩니다.

졸졸 새는 물인데도 막아 놓지 않으니 물값이 제법 나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아예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큰마음을 먹고 고치기로 했습니다.

워낙 오래된 모델이니

Lowe’s에 가서 모든 종류의 마개를 사서 시험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한 개가 정확히 맞아서 성공적으로 고쳤습니다.

얼마나 개운한지요!

 

산을 옮기는 기도와 믿음을 배웠지만

우리 삶 한편에 졸졸 새버리는 틈새는 없는지요?

행여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물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물은 아닐지요?

 

생수의 근원,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산을 옮기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for my people have committed two evils:

they have forsaken me,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and hewed out cisterns for themselves,

broken cisterns that can hold no water.(Jer 2:13)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16이-메일 목회 서신)

간절함

좋은 아침입니다.

 

1.

5월 한 달 동안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서 실제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 지난 설교에서 드렸던 질문입니다.

 

얼마나 기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부분 시간을 떠올린다고 했습니다.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도

(하나님 편에서가 아닌  자기 생각에)

충분한 시간을 기도하지 않았다는 반성일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했을 때는

길게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을 가리키곤 합니다.

 

물론 기도를 오래 하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했을 때 긴 시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고

기도에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조심하고 삼갈 일입니다.

 

2.

그런데

기도 시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우리 자신의 “간절함”입니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기도에 쏟아 붓는 간절함입니다.

 

간절함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을 때 생깁니다.

기도의 능력을 확신할 때 생깁니다.

물론 다급한 일이 닥치면 저절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어서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경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겟세마네가 올리브 기름틀이라고 했는데,

우리 자신의 간절함으로 기도를 정성껏 틀어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간절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기도하면 금상첨화입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쉽지 않습니다.

 

한 마디라도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 42:1)

As a deer pants for flowing streams, so pants my soul for you, O God.(Ps 42:1)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기도에 간절함을 더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9이-메일 목회 서신)

그대로 되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부활절에는 스리랑카에서 테러가 있었습니다.

불교 인구가 80%에 가까운 나라지만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가 나머지를 차지하면서 종교 간의 갈등이 내재해 있었는데

이슬람 극렬분자들의 소행으로 연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을 밝히고 선하게 만들어야 할 종교가

어둡고 비극적인 일을 야기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큰 돌을 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샌디에이고 유대인 회당에

백인 청년이 총격을 가했습니다.

LA에서는 군대를 제대한 한 청년이 계획한 테러를 사전에 막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제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캠퍼스에서 총기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뒤숭숭합니다.

우리는 물론 자녀들이 사는 세상에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하기에

세상의 평화를 위한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2.

그동안 주일예배에서는

성경의 식물들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결코 주인공이 되기 힘든 배경화면이지만

평생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식물의 영성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5월에는

매년 그랬듯이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과 같아서

기독교인들에게 꼭 필요한 신앙 훈련이고 은혜의 수단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드리는 골방 기도,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동체 기도,

조용하게 드리는 기도,

함께 드리는 뜨거운 기도,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간청.

이웃을 위한 기도까지 기도의 지경은 무척 넓습니다.

 

5월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기도 생활을 점검하고 실제로 기도하기 원합니다.

 

속회를 비롯한 소그룹에서 기도 제목을 나누고

교회 안에 기도 모임들이

이곳저곳에서 생기면 목사로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3.

우리 교회에 기도의 불길이 살아나길 기대하면서

2019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합니다.

 

기도에 대한 깨달음,

기도해야 숨을 쉴 수 있고 살수 있다는 결심,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

기도하는 사람을 막을 것이 없다는 간증,

거기에 교회적으로 기도에 대한 불꽃이 타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물론 우리 교회의 특징이 있으니 억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도에 게으르거나 쉬면 안 됩니다.

기도를 멀리해서도 안 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물론 인생도 힘을 잃을 것입니다.

 

새달을 맞이했습니다.

온 세상이 푸르게 변하는 5월에

우리 기도가 짙어지고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11:24)

Therefore I tell you, whatever you ask in prayer, believe that you have received it,

and it will be yours.(Mark 11;2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참빛 식구들의 기도를 도우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2이-메일 목회 서신)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스리랑카에서 들려온

테러 소식으로 안타까운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불교 인구가 70%에 가까운 나라지만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가 나머지를 차지하면서 종교 갈등이 심했는데

엊그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에 의해서 연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일반인이 투숙했던 호텔은 물론

부활절 예배를 드리던 교회까지 테러를 자행하고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보면서

저절로 주님의 위로와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국지적으로 일어나는 무차별 테러가

전쟁보다 무섭게 세상을 위협할 것이라는

예측이 맞는 것 같아서 더욱더 안타깝습니다.

 

세상을 밝히고 선하게 만들어야 할 종교들이

어둡고 비극적인 일을 야기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큰 돌을 매달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2.

우리는 지난주에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실 때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문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높은 곳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난다고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평강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특권 역시 흔들림 없는 평안입니다.

 

3.

주일예배에서는 찬양 전에

언제나 “샬롬”으로 인사합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육신, 마음, 신앙,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매우 훌륭한 인사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화해)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샬롬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건강하고 온전한 몸과 마음을 유지합니다.

우리 안에 임하는 샬롬입니다.

우리의 일에도 주님의 평안이 임합니다.

인생 속에 임하는 샬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십니다.

우리로 인해서 세상과 이웃 속에 임하는 샬롬입니다.

 

부활절 이후의 참빛 식구들의 삶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임하길,

우리가 사는 세상에 주님의 평화가 임하길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

Let not your hearts be troubled, neither let them be afraid. (John 14: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우리 마음에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안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25이-메일 목회 서신)

노트르담의 66분

1.

지난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속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작년에 우리 지역에서 산불이 나서 수많은 피해를 냈고

얼마 전에는 한국도 산불이 났었기에 관심을 갖고 뉴스를 검색했습니다.

 

무엇보다 노트르담 성당은 850년이나 된 건물로

일 년에 천삼백만명이 찾는 인류의 유산이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종탑은 무너져 내렸지만,

성당에 있는 두 개의 탑은 물론 기본 구조물은 보존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화요일 AP통신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고 처음 66분 동안 긴박했던 상황을 보도했습니다.

 

6:20PM, 화재 경보가 처음 울릴 당시에

성당 안에는 사제들과 미사를 드리는 신도들, 관광객 등 수백명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화재 경보에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뒤쪽 문을 통해서 불과 몇 분 만에 모두 빠져나와서

불길이 종탑으로 번지는 등 화재가 본격화될 때 성당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6:43PM, 대피는 했지만 두 번째 화재경보가 울리면서 화재를 실감했고

소방관들이 성당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맞은편 청사에서 근무하던 파리 시장도 현장으로 달려왔습니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충격에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이들은 침착하게 성가를 부르면서 화재가 진압되길 기도했습니다.

 

소방관들은 성당에 있던 귀중한 유물들을 챙겨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쓰셨다고 알려진 “가신 면류관”입니다.

금 가지로 장식한 것을 보면 후대에 예수님께서 쓰신 면류관을 본떠서 만들었을 텐데

주후 6세기 이전부터 전해오는 성당에서 가장 값진 유물입니다.

소방관들이 목숨을 걸고 인간 띠를 만들어서 구했답니다.

루이 9세가 입었다는 왕복과 성당에 있던 예술품들도 챙겼습니다.

 

사람들은 물론 유물과 예술품까지 안전하게 대피하고 나니

종탑과 지붕이 무너져 내렸답니다.

7:49PM, 그때까지 걸린 시간이 66분이었습니다. 골든 타임을 제대로 확보한 것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렇듯이 소방관들의 목숨 건 구조활동이 빛을 발했습니다.

 

2.

고난 주간 첫날에 들려온 화재 소식이어서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고난 주간 내내 미사가 계획되었을 것이고

부활절 예배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을 텐데 그만 화재가 났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복구가 이뤄지고

어려울수록 더욱 은혜롭고 특별한 부활절을 맞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고난주간 한가운데 있습니다.

내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금요일입니다.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우리가 과연 무엇으로 사는지 생각하기 원합니다.

 

800년 동안 한자리를 지켰고, 2차 대전도 견뎌낸 성당의 종탑과 지붕이

한 시간 남짓 만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이 그렇게 쉽게 무너져 내리는 것들은 아닌지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우리가 추구할 것은 무엇인지요?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고난주간이길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음성을 듣느니라 (요한 18:37)

For this purpose I was born and for this purpose I have come into the world—

to bear witness to the truth. Everyone who is of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John 18:37)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을 맞아서

행여나 무너진 삶의 영역이 있다면 회복하게 하시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을 꼭 붙들고 부활절을 맞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18이-메일 목회 서신)

 

 

블랙홀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

블랙홀 사진이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가운데는 검은색이었습니다.

정확한 원은 아니지만, 빛으로 둘러 쌓여 있고

밑에는 빛 광선 두 개가 호수처럼 위치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블랙홀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시간까지 빨아들여서 블랙홀과 우주를 여행하고 온 우주인들이 지구에 돌아왔을 때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가 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말로만 듣던 블랙홀을 실제로 보게 된 것입니다.

저처럼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마음이 설레었는데

과학자들은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2.

기사를 보면서 그저 신기했습니다.

지구만한 망원경을 조합해서 관측했다는 사실,

망원경의 성능이 달 표면에 놓인 오렌지를 자세히 관찰할 정도라는 것,

블랙홀이 지구로부터 55억 광년 떨어져 있다는 것 등등

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기사를 검색하면서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이 스쳤습니다.

 

1) 실제 블랙홀 사진이 그동안 영화나 가상(시뮬레이션)으로 보았던 것보다

선명하지 않았고 솔직히 약간 시시해 보였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가짜는 화려하게 꾸미지만,

진품은 시시해 보여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상이 실제보다 더 멋있고 화려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을 살다 보면 시시할 수 있는데,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일상의 신앙입니다.

 

2) 블랙홀 망원경 이름이 블랙홀의 경계선을 뜻하는 <사건 지평/Event Horizon>이었는데

망원경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We have seen what we thought was unseeable.”

 

제가 목사여서 그런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Heb 11:1)

 

블랙홀이 신비에 그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사진으로  확인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증거가 되는 날이 올 것도 믿습니다.

블랙홀 사진에 비할 데 없는 신비, 경탄, 경외, 그리고 찬양의 순간이 우리 앞에 있음을 믿습니다.

 

3)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블랙홀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높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 얼마나 넓고 영원한 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터스텔라 영화에서 5차원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도 남겠지요.

 

3.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고난주간이고 곧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우리 눈으로 보고 경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기대를 갖고 부활절을 맞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귀하게 간직하기 원합니다.

 

현대 과학에 비하면 너무 순수해 보이지만

당시로써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백했던 시편 기자가 생각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When I look at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set in place,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Psalms 8:3-4)

 

하나님 아버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11이-메일 목회 서신)

 

변덕쟁이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는 만우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만우절만 기다린 적도 있고

만우절에 친구들을 속여먹는 재미가 솔솔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동심(童心)이 점점 잊혀집니다.

 

만우절은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얼른 만우절임과 진실이 아님을 알려야 합니다.

만우절을 잘못 대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2.

만우절을 보내면서 구약성경 요나서를 생각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을 보낼 정도로 혼이 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당시 제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갔습니다.

 

요나는 하루 종일 니느웨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도 임금의 옷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행실의 변화가 동반된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짐승들까지 회개에 동참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8-9)

 

죄를 지은 백성에게 벌을 주는 것이 공의입니다.

한번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신실입니다.

게다가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제국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은

용어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변덕쟁이”처럼 보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설마” “혹시나”하면서 회개했는데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한 것을 본 요나는 매우 못마땅해 합니다.

만우절도 아닌데 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니느웨 사람들도 중요했습니다.

 

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완고하고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때로 변덕쟁이로 돌변하십니다.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입니다.

우리가 불쌍해 보이면 가던 길도 돌이켜서 우리를 도우실 분입니다.

–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처럼 죄를 뉘우치고 바른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심판도 철회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를 위로하시고, 무작정 사랑하시고,

자식을 위해서 뜻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마음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103편 13-14)

As a father shows compassion to his children, so the LORD shows compassion to those who fear him.

For he knows our frame; he remembers that we are dust. (Psalms 103:13-14)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꼭 기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4이-메일 목회 서신)

사이프러스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성경의 식물에 대해서

연속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이라고 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식물이 너무 많기에

이번에는 성경 속의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무도 많지만 열 가지만 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빠진 나무들은 꽤 섭섭해 할 것 같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유명한 것이야 씩- 웃고 넘어가겠지만,

평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깝게 이번 연속 설교 리스트에 들지 못한 나무가

상록수인 사이프러스(Cypress)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잣나무”로 번역했고, 구약성경에 20회 이상 등장합니다.

 

사이프러스는

잎이 뾰족한 침엽수이고 솔방울과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 나무에 암/수 열매가 함께 열려서 쉽게 번식합니다.

송진이 나와서 나무를 보호해 줍니다.

 

천년 정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론 고대 근동에서 사이프러스는

“불멸(immortality)”을 상징해서, 묘지 등에 심곤 했답니다.

 

성경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함께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자연 만물에 등장하곤 합니다.

 

2.

사이프러스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본문이

호세아 14장 8절입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O Ephraim, what have I to do with idols? It is I who answer and look after you.

I am like an evergreen cypress; from me comes your fruit.(Hosea 14:8).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푸른 잣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식물에 비유한 경우가 이곳 뿐인 것 같습니다.

 

사이프러스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잘 어울립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열매(솔방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래 사는 사이프러스의 특징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미지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이프러스는

비나 햇볕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지가 울창하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무 아래서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늘이 되시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이프러스 같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세상을 살다 보면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이프러스에 자신을 비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남은 한주

늘 푸른 잣나무처럼 한결같으신 우리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우리 역시 늘 푸른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원합니다.

 

사소한 일들, 지나가는 순간에 연연하기보다

천년을 사는 사이프러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라는 잣대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갖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시편 104:16-17)

The trees of the LORD are watered abundantly, the cedars of Lebanon that he planted.

In them the birds build their nests; the stork has her home in the fir trees.(Psalms 104:16-17)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늘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에 늘 푸른 상록수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28이-메일 목회 서신)

벧세메스 언덕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성경 통독에서

사무엘상 6장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지만 이길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궤(the ark)까지 동원했지만 속수무책입니다.

당시 민족 지도자였던 엘리 제사장의 아들도 전장에서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도 죽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법궤까지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 상징이었습니다.

법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돌았을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니 강이 갈라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었습니다.

 

그런 법궤를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에 볼모로 잡혀간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자신들의 신 인 다곤 옆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보니 다곤 신이 엎드려져 있습니다.

이튿날은 다곤 신상의 머리와 손목이 끊긴 채

몸통만 문지방에서 뒹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법궤가 가는 곳마다

독한 종기가 생겨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가져간 블레셋에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갈 암소 둘을 데려왔습니다.

한번도 멍에를 매지 않은 암소입니다.

게다가 젖먹이 새끼를 가진 암소입니다.

 

멍에를 한 번도 매지 않은 암소가

새끼가 있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간다면

그동안 있었던 모든 사건과 사고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확증하겠다는 것입니다.

 

암소 둘이

새로 만든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갑니다.

처음 매어 보는 멍에와 처음 끄는 수레입니다.

 

집에는 젖을 먹는 새끼들이 있습니다.

암소 둘이 꺽꺽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게다가 언덕을 다 올라가서는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됩니다.

비록 암소들이지만

목숨을 바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한 셈입니다.

 

3.

벧세메스 언덕길을 올라가는 암소 두 마리를 보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르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조롱, 멸시, 천대, 채찍을 모두 참으시고 좌우로 흔들림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길도 벧세메스의 언덕길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힘겨운 길입니다. 처음 가는 길입니다. 처음 해 보는 일입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들이 새끼를 두고 왔듯이, 가슴을 쓸어 내리며 걸을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이 무엇인지, 왜 가야 하는지 모르고 걸을 때도 있습니다.

끝에는 손해(희생)만 볼 뿐 혜택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빛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벧세메스(“태양의 집”) 언덕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선포되고

주님의 일이 세상에 펼쳐지길 바라며 걷는 믿음의 길입니다.

 

사순절 셋째 주를 맞는 참빛 식구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벧세메스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삼상 6:12)

And the cows went straight in the direction of Beth-shemesh along one highway, lowing as they went.

They turned neither to the right nor to the left (1Sam 6:12,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벧세메세의 인생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과 동행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21이-메일 목회 서신)

고넬료

좋은 아침입니다.

 

1.

토요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사도행전을 한 장씩 읽어 나갑니다.

토요일에만 읽으니 진도는 느리지만

차례대로 꾸준히 성경을 읽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목소리가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입니다.

 

저는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각자의 자리에서

<소리없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라면서 목회하고 있답니다.

 

2.

지난 토요일에는 사도행전 10장을 읽었는데

베드로를 통해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가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본문은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지

비교적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

 

이달리야(로마) 부대에서 적어도 100명의 군인을 거느린 백부장입니다.

로마에서 식민지에 파견된 군지휘관이니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로마 부대라면 세계 최강입니다.

로마 사람이니 로마의 신들을 믿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달랐습니다.

그는 식민지 백성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시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2절).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fearers)”이라는 명칭만 주면서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신들과 구별했습니다.

일종의 차별인데,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그것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발견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제 9시(오후 3시)에 기도한 것을 보면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넬료는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지난달 속회 공부에서 배운 복음서의 또 다른 백부장이 생각납니다(눅7:1-10).

 

이처럼 고넬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균형,

즉 신앙과 생활의 통합을 이룬 멋진 인물이었습니다.

 

3.

고넬료가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를 찾아와서

베드로를 초청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같은 시간에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가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을 방문해서 복음을 전하니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성경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고넬료를 찾아 온 하나님의 사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delivery)되어 기억되신바가 되었으니 (4절).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와 구제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기억하실 테니

기분이 좋아지고 힘도 생깁니다.

 

신앙과 생활의 통합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목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넬료는 우리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항상 기도했던 고넬료의 신앙을 묵상합니다.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던 그의 삶도 본받기 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기도와 구제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는 말씀에서

힘을 얻고 올해 사순절도 우리의 신앙과 삶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10:2)

a devout man who feared God with all his household,

gave alms generously to the people, and prayed continually to God.(Act 10:2, ESV)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기도와 삶을 꼭 기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14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