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잘것 없더라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성경 학개서를 읽었습니다.

 

스가랴와 말라기만 읽으면

구약을 모두 통독하고 신약성경에 접어듭니다.

새벽에 한 장씩 읽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구약의 끝에 왔습니다.

지루한 예언서 읽기였지만, 쉼 없이 꾸준히 읽은 결과입니다.

 

학개 선지자는 우리식으로 하면

8월 말부터 12월까지 (성경에서는 여섯째 달부터 아홉째 달)

석 달 정도만 활동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중단하고 자신의 집을 짓는 등

하나님보다 자기를 먼저 챙기고,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힘을 합쳐서 성전 건축을 끝낼 것을 권면 했습니다.

 

70년이라는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개 선지자의 예언에 감동받고 서둘러 성전건축을 마무리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이은 두 번째 성전입니다.

 

그런데 레바논산 수입 백향목과 금과 은으로 지은 솔로몬 성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백성들이 산에서 나무를 갖다가 지었으니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본 사람을 불러내서

이제 막 완공된 두 번째 성전에 관해서 묻습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 (학개 2:3)

Who is left among you who saw this house in its former glory?

How do you see it now? Is it not as nothing in your eyes? (Haggai 2:3)

 

 

실제로 보잘것없는 성전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아예 “아무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원로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스룹바벨 총독, 여호수아 대제사장, 그리고 모든 백성에게

스스로 강하게 할지어다 (Be strong)”라고 권면합니다.

아무것도 아닐 만큼 초라한 성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2.

올해 우리는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표어를 갖고 살고 있습니다.

연초에 교회 표어를 설교하면서 작은 일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 말 그대로 하찮고 작은 일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 아무리 열심히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일.

 

실적주의, 자기 자랑, 겉치레 등이 중요한 시대에 살다 보니

작은 일에 충성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무언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보잘것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자신이 해놓은 일을 바라보면

아쉬움이 밀려오고 초라해 보이곤 합니다.

 

그때 학개 선지자의 위로와 권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 속에도 함께 하십니다.

행여나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라 (학개 2:4)

Be strong, work, for I am with you (Haggai 2:4)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에게 힘을 주옵소서.

스스로 굳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15이-메일 목회 서신)

주님은 나의 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110번째 맞는

UN이 정한 여성의 날입니다.

지금은 여성의 인권이 많이 개선되었지만

110년 전 여성의 날을 제정할 때는

여성의 노동 착취는 물론 투표권도 보장되지 않을 때입니다.

 

그동안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편견과 불이익,

미투(Me too)운동에서 보듯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

학창시절 햄릿을 배울 때,

교수님은 한 문단을 외워서 쓰는 과제를 내주셨습니다.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문단을 택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햄릿에 유명한 구절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차별하기 위해서 그즈음을 외워볼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햄릿이

아버지가 죽은 지 두 달 만에

숙부의 품에 안긴 자기 어머니를 두고 한 말이기에 얼른 포기했습니다.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 햄릿이 세상에 끼친 영향이 꽤 큽니다.

마치 모든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약하다”는 편견을 심어주었다면

여성의 날을 맞아서 셰익스피어도 사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이 많습니다.

중요한 사안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3.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자와 남자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창세기 1장에서 선포합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하나님의 사랑도 “여성(레헴)”으로 설명하고,

잠언의 지혜도 여성명사이고,

심지어 히브리어의 성령도 여성명사입니다.

 

사사 시대에는 여성 사사 드보라가 있었고,

예수님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요셉의 역할은 없지요)

열두제자들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현장과 무덤에 향료를 갖고 갔던 사람도 여성입니다.

 

종종 바울 서신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 등을 갖고

여성의 지위에 제동을 거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자세히 읽고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올바로 해석해야 합니다.

 

4.

미국에 와서 구약 성경의 <아가서>를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교수님은 아가서에서 한 문단을 정해서

자기 사무실에 와서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 왕과

피부 색깔이 검은 술람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이 남녀의 사랑만큼

친밀하고 은밀해야 함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때 저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고백을 암송했습니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아가서 2:10-12)

 

여성의 날 110주년을 맞아서

그동안 여성들 위에 드리웠던 겨울이 지나고 비도 그치고

꽃피는 봄날이 오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똑같이 봄날이 찾아오길 원하면서

오늘 새벽에 읽은 하박국 3장 19절 말씀을 나눕니다.

이 말씀에 등장하는 “사슴” 역시 여성명사입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편애하시는 것 같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하박국3:19)

GOD, the Lord, is my strength; he makes my feet like the deer’s;

he makes me tread on my high places.(Habbakuk 3:19)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존중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8이-메일 목회 서신)

삼일절

좋은 아침입니다

 

미국 날짜로 오늘은

삼일절 제99주년입니다.

 

삼일절은

점점 거세지는 일제의 군부 통치에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된 독립 만세운동입니다.

 

3개월여 계속되면서

백만이 넘는 국민이 만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평화적인 비폭력 독립 만세운동이었고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절반에 가까운 16명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조약에 참여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각 민족은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하자는

민족 자결주의를 천명했습니다.

 

여기서 힘을 얻은 민족 지도자들이

일본에 의한 독살 가능성이 제기된

고종 황제의 장례식날 (3월 1일)을

D-day로 삼아서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입니다.

 

2.

3.1 운동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었습니다.

자신만 아는 개인적인 신앙을 떨치고

조국과 일제 치하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겨레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36년 일제강점기 내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일본 천황을 향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직간접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온 몸을 던졌습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한 문단을 가져왔습니다.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수 있으나 오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수 있으나

한달 두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다미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은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겯디어 배기겠습니가?

다못 주님께 의지하는 것 뿐입니다.

 

삼일절을 보내면서

조국 대한민국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을 넘어서

“세상을 맑고 명랑하게” 만드는 빛과 소금이 되기 원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느헤미야 1:6)

Let your ear be attentive and your eyes open,

to hear the prayer of your servant that I now pray before you day and night

for the people of Israel your servants, confessing the sins of the people of Israel,

which we have sinned against you. (Nehemiah 1:16)

 

하나님 아버지,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긍휼히 여기시고

친히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1이-메일 목회 서신)

승자와 패자

좋은 아침입니다

1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리고 있지만

미국에서 올림픽을 즐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선수들이 참가하는 종목과

미국 선수가 잘하는 종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젯밤에는 올림픽이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NBC를 클릭했다가

미국과 캐나다의 여자 아이스하키 결승전을

연장전(OT)부터 생중계로 시청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는 여자 아이스하키에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강자들이랍니다.

월드컵에서는 여덟 번 싸워서 일곱 번 미국이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올림픽에서는 1998년 이후

네 번 연속 캐나다가 미국을 꺽고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4년 전 러시아 소치 올림픽에서는

미국이 줄곧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 동점 골을 내주고

연장전에서 캐나다에 패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강릉에서 또다시 두 팀이 맞붙은 것입니다.

이번에는 캐나다가2-1로 이기고 있다가 막판에 동점골을 내주고

4년 전과 마찬가지로 연장전에 돌입했습니다.

 

아이스하키 규칙을 잘 모르는데,

연장전에서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양 팀 네 명씩 경기했습니다.

쉽게 골을 넣을 것 같았지만, 이미 지쳐버린 체력에

골키퍼들의 선방으로 연장전도 무승부로 끝났습니다.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이스하키의 “슛아웃/shootout”을 보게 되었습니다.

축구의 승부차기처럼 양 팀에서 다섯 선수가 번갈아 나서서

중앙선부터 퍽을 몰고 가서 골키퍼를 피해서 골을 넣는 방식입니다.

 

막상막하여서 다섯 선수 가운데 양 팀 모두 두 선수만 골을 넣고,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다시 나와서 번갈아 슛아웃을 시도합니다.

 

미국 선수가 능숙하게 골키퍼를 속이고 골을 넣었습니다.

상대편 캐나다 선수는 세계에서 가장 골을 잘 넣는 탁월한 선수였는데

그만 골키퍼에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축구로 치면 메시가 승부킥을 실축한 것과 같은 겁니다.

 

미국팀은 얼싸안고 20년만의 승리를 자축했습니다.

캐나다 선수들은 자리를 뜨지 못한 채 눈물을 흘렸습니다.

운동장에서는 승리의 눈물을, 덕아웃에서는 아쉬움의 눈물을 흘립니다.

승자와 패자가 그렇게 갈렸습니다.

 

2.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가 없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그런데 어디 스포츠만 그럴까요?

우리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을 알기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승리했다고 교만할 것도 아니고

패배했다고 기죽을 일도 아닙니다.

묵묵히 그리고 여전히 성실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분복(分福, portion)을 지금/여기서 누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뚜벅뚜벅 신앙과 인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제 경기를 생각하니

마지막 골을 실수한 캐나다 선수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 중요한 경기에서 실수했으니,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요!

어제 했던 실수가 평생 생각날 것 같습니다.

어제 일을 인생 교훈으로 삼고 훌훌 털고

또다시 얼음판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으며 (전도서 3:4-5)

a time to weep, and a time to laugh; a time to mourn, and a time to dance;

a time to cast away stones, and a time to gather stones together;

a time to embrace, and a time to refrain from embracing;(Ecclesiastes 3:4-5)

 

하나님 아버지,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크고 작은 것, 높고 낮은 것과 같은

세상의 기준을 뛰어넘는 신앙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22이-메일 목회 서신)

언제까지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일 일곱 번째 참빛 보이스는

청년부 자매들이 꾸몄습니다.

 

디자이너와 애니메이터의 차이도 배웠고

무엇보다 자기 일을 사랑하고

열정을 갖고 주신 소명(vocation)을 감당하는 모습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참빛 보이스를 통해서

젊은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고

구체적인 기도 제목들도 얻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는

교회 일을 바짝 줄이고

대신에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를 소망하고 있기에

참빛 보이스와 같은 시간이 더욱 소중합니다.

 

2.

참빛 보이스에서 배웠듯이

자율 주행차의 기술이 꽤 발전하고 있고

회사마다 마지막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모든 이의 관심은 사고방지입니다.

자동차 스스로 움직이다가, 행여나 오작동이 나서

한 사람의 목숨이라도 잃게 한다면

자율 자동차의 존재 가치가 뚝—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금세 의회에서 자율 자동차 규제 법안을 만들고

국민의 안전이 최고라고 호들갑을 떨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많은 희생자가 생겨도

꿈쩍하지 않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총기 규제입니다.

 

어제 다시 플로리다의 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19살의 청년이 반자동 소총을 난사해서

17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달에도 켄터키에서 15세의 학생이 저지른 총격으로

2명이 숨지고 18명이 다쳤습니다.

총기사고가 학교로 번지고, 범행을 저지르는 연령대도 낮아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해서 많은 정치인은

총이 문제가 아니라 총을 악용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테러로 인해서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

총격과 총기를 사용한 자살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사고 가능성 역시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총격 사건이 생길 때마다 “위로”를 전하는 정치인들의 인터뷰는

더 이상 효력도 설득력도 없습니다.

 

총격 사건으로 서른 명의 목숨을 잃은 후에

총기를 규제하고 2억 달러 이상의 총을 사들인

호주처럼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이민자 규제나 국경에 담을 쌓는 것보다

국민을 훨씬 안전하게 지키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하나님께 상처를 입히는 것이고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의 스티브 커(Steve Kerr) 코치의 인터뷰 첫마디가 마음을 칩니다:

“그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우리 아이들이 총으로, 그것도 학교에서,

목숨을 잃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가 봅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이 안전한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힘없는 사람들, 애꿎은 희생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요엘 2:18)

Then the LORD became jealous for his land and had pity on his people. (Joel 2:18)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 땅을 기억하시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들이 법으로 실제화되는 것을 속히 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15이-메일 목회 서신)

남남북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평창 올림픽이 막을 올리는 날입니다.

미국의 모든 언론이 “Pyeongchang”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평창이 강원도에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어서

구글에서 확인해 보니 원주와 강릉 사이에 있네요.

 

우리는 경기에 주목하는데

참가하는 국가나 선수들은 입장식에서 자기 나라 국기를

누가 들고 가느냐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미국 선수단의 기수선정에 대한 해프닝(?)이 기사화되었습니다.

동계 올림픽에 참가한 8종목의 대표들이 모여서

투표로 기수를 뽑았는데 4:4 동점이 되었고

규정에 따라 동전 던지기로 햄린이라는 여자 “루지(luge)”선수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번 올림픽으로 은퇴를 계획하고 있던 햄린에게 최고의 행운이 임한 것입니다.

미국 국기를 들고 입장할 햄린을 보기 위해서

부모님과 동생이 평창으로 향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햄린과 경쟁했던 셰니 데이비스라는 스피드스케이팅 선수가

동전 던지기는 뭔가 좋은 방법이 아니고

게다가 2월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생각하는

Black history month라고 해시태그를 달아서 트위터에 글을 올린 것입니다.

 

셰니는 2006년 토리노 올림픽에 참가해서

개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던 최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이었습니다.

기수로 선정된 햄린은 루지라는 비인기 종목의 백인 선수였고요.

탈락한 셰니는 흑인이고, 햄린이 백인이어서 더욱 이슈가 된 것입니다.

 

투표에서 동점이 나왔으면

화합의 상징으로 둘이 함께 성조기를 들고 입장했으면 하는 생각을 저 혼자 했습니다.

물론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야지요.

 

2.

반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Korea라는 국호와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남북이 공동 입장합니다.

 

국제 대회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입장하는 것은

2007년 중국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 게임이래 11년 만이고

이번 평창 올림픽이 열 번째랍니다.

 

남북이 공동 입장할 때는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남녀 두 명의 기수를 세운답니다.

 

이번 평창 올림픽은 “남남북녀”차례여서

남쪽에서는 남자 봅슬레이 선수가 이미 선정되었고

북한에서는 여자 선수 가운데 한 명이 공동 기수로 나서게 됩니다.

공동 기수를 두고 이런 전통이 있었더니 흐뭇합니다.

 

아무쪼록 조국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동계 올림픽이

지나치게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온 세계가 스포츠 정신으로 하나가 되며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갈

남남북녀 기수의 모습처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우리의 소원인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 , 요셉과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가져다가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막대기가 되게 한즉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에스겔 37:19)

Behold, I am about to take the stick of Joseph (that is in the hand of Ephraim) and the tribes of Israel associated with him.

And I will join with it the stick of Judah, and make them one stick, that they may be one in my hand. (Ezekiel 37:19)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과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는 통일이 속히 오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8이-메일 목회 서신)

다림줄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아모스 선지자가

“다림줄(a plumb line)”환상을 보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다림줄은

벽을 세우거나 건물을 지을 때,

수평과 수직을 똑바로 맞추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일종의 자(ruler)와 같은 줄을 가리킵니다.

 

예전 한국에 있을 때,

세탁기나 냉장고와 같은 전자기기를 구입하면

수직과 수평을 맞추는 흰색 실이 따라오곤 했는데

그것이 곧 다림줄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에게

네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메뚜기와 불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는 환상인데

아모스가 간절히 구해서

(잘못은 왕과 지도자들이 범했는데, 메뚜기와 불의 심판은 힘없는 백성들까지 죽게 되니)

하나님의 재앙을 면합니다.

 

세 번째 환상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을 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의 행위를 측정하실 참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서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은

가난한 백성들을 학대하고 무시했으며

저울을 속이는 등 부정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탐욕을 채웠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왕과 지도자들의 잘못을 낱낱이 세고 계시다가

결국에는 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임할 것을

마지막 네 번째 여름 과일 광주리 환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름 과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끝”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력과 부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자신만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림줄을 손에 드시고 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2.

다림줄 –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도전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맞게

수평/수직이 맞아야 합니다.

의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이 길을 완벽히 걸을 수 없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하심으로

끊임없이 의로운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과 삶에 다림줄을 내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

십자가의 은혜에 응답하는 의로운 길을 걷는

오늘 하루 그리고 새달이 되기 원합니다.

 

함께 그 길을 걸어갑시다!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아모스 7:7)

Behold, the Lord was standing beside a wall built with a plumb line, with a plumb line in his hand. (Amos 7:7)

 

하나님 아버지,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

주님의 다림줄을 내리우고

의로운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2.1이-메일 목회 서신)

서너 가지 죄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기도회 말씀 읽기는

아모스에 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있는 12개의 소예언서는

하나의 책으로 묶을 수 읽을 정도로 분량이 적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대예언서 못지 않게 거칠고 엄격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남유다 드고아 출신입니다.

양을 치다가 선지자로 부름받았고,

북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했는데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번성한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백성들을 약탈하면서

더욱더 자신의 배를 채우고 불의를 일삼았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때 선지자로 부름받아서

낯선 북이스라엘로 올라가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언서에는

남유다나 북 이스라엘외에도

그들을 둘러쌓고 있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예언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예언서 마지막에 위치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의 죄악도 알고 계시고 그것을 심판하실 것을 알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들까지 다스리시는 주권자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아모스에서는

이방민족에 대한 예언이 앞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쌓고 있는 작은 민족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당사자인 유다와 이스라엘로 좁혀오면서

결국에는 북이스라엘이 범한 죄들을 지적합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말씀입니다.

 

2.

아모스는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서너 가지”는 정확한 죄의 숫자라기 보다는

그들이 지은 죄 몇 가지를 갖고도 하나님께서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너 가지 죄까지 보고 계셨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유다의 죄는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된 것입니다 (2:4)

 

이스라엘의 죄는 서너가지를 넘습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고 사고 팔거나, 상거래에서 정직하지 않거나,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탈취하고 압제하고,

왕궁의 지도자들은 물론 제사장들까지 타락한 죄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벌하실 것입니다.

죄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것이 구약 예언서의 메시지입니다.

 

2.

아모스를 처음 읽은 어제

“오늘 하루는 우리에게 있는 서너 가지 죄를 생각해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 바랍니다”라는 적용으로

새벽 기도회를 마무리했습니다.

 

새해의 첫 달이 지나갑니다.

새해의 결심도 서서히 식게 마련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기 원합니다.

잠시 멈춰서 행여나 우리안팎에 있는 그릇됨(죄)을 생각해보고

가장 중요하고 큰 서너가지 죄를 골라서 주님께 내어놓기 원합니다.

 

회개는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우리가 해야할 도리이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서너 가지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아모스 2:6)

Thus says the LORD: “For three transgressions of Israel, and for four, I will not revoke the punishment” (Amos 2:6)

 

하나님 아버지,

새해 첫 달을 보내면서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정한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25이-메일 목회 서신)

메뚜기 떼

좋은 아침입니다.

 

어느덧 새해도 20일 가까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갑니다.

연초에 계획하고 결심하신 일을 잘 해내고 계시는지요?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지만, 날마다 아니 적어도 삼일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새롭게 결심하면서 한 해를 사는 것도 좋겠습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호세아를 끝내고 요엘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엘서는, 앞으로 닥칠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개인과 공동체가 회개하고

여호와의 날 이후에 펼쳐질 주님의 은혜에 참여하길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요엘서의 흥미로운 구절은 1장 4절의 메뚜기 재앙입니다:

팥중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요엘1:4)

What the cutting locust left,the swarming locust has eaten.What the swarming locust left,

the hopping locust has eaten, and what the hopping locust left, the destroying locust has eaten.(Joel 1:4)

 

“팥중이” “메뚜기” “느치” “황충”으로 번역된 우리 말이 생소합니다.

4년 전에 우리나라 해남에 메뚜기 떼가 출몰해서 농작물을 망가뜨린 일이 있었고

펄벅의 소설 <대지>에서도 메뚜기 떼의 출몰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고대 이스라엘처럼 메뚜기 떼의 습격이 흔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워낙 메뚜기 떼의 습격이 잦은 곳이기에

메뚜기에 대한 용어가 발달했고

그것을 우리 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소한 용어가 사용된 것 같습니다.

 

“먹어 치우는 메뚜기” “떼를 이뤄서 달려드는 메뚜기”

“뛰는 메뚜기” “폐허를 만드는 메뚜기” –

네 가지 모두 각기 다른 메뚜기의 공격입니다.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2.

메뚜기 떼의 습격은 요엘서 외에도 성경 몇 군데서 발견됩니다.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내린 메뚜기 재앙 (출1);12-15)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하나님 백성에 임할 재앙 (신28:38)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적군을 메뚜기 떼에 비유하였습니다(삿7:12).

 

요엘서의 메뚜기 떼도

“여호와의 날” 즉 심판 날에 임할 재앙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존질서를 폐지할 것입니다.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문명을 “ 무(nothing)”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선과 악의 마지막 심판입니다.

 

3.

지난 주일 달란트 설교 (마24-25장),

수요 예배의 마지막 때에 대한 예수님 말씀(막13장)

새벽기도회의 요엘서까지

새해 벽두부터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날”을 준비할 것을 깨우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끝(종말)이 있음을 믿고

그 끝에 맞춰서 현재의 삶을 점검합니다.

여호와의 날에 합당하도록 지금/여기에서 단정하게 살아갑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걸러내고, 씻어내고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것을 꼭 붙잡기 원합니다.

수억 마리 메뚜기 떼가 지나가도 끄떡없이 남아있을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꼭 붙들고 올 한해 살아갑시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요엘2:26)

Praise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 who has dealt wondrously with you.

And my people shall never again be put to shame. (Joel 2:26)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을 <여호와의 날> 마지막에 놓고

정돈하며 날마다 새날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8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일에 충성

좋은 아침입니다.

 

엊그제 집에 오는 길에

큰 트럭에서 작은 돌이 자동차 앞 유리로 떨어졌습니다.

돌이 튀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더니

아주 작은 구멍과 불가사리 모양으로 금이 갔습니다.

 

1센트짜리 동전으로 충분히 덮을 만한 상처인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조금 더 커진 느낌이었습니다.

집 근처 자동차 부품가게에 가서

repair kit을 구입하고 설명서를 읽어보니

제 차에 생긴 흠집은 쉽게 수선할 수 있는 모양이 아닙니다.

 

고민하다가 Yelp의 리뷰가 좋은

자동차 유리 보수하는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65불이면 깔끔하게 고쳐주겠답니다.

제가 구입한 repair kit에 비교하면 비쌌지만

워낙 손재주가 없는 저로서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체격이 크신 분이 고치기 시작하는데

놀랍게도 작은 흠을 메꾸는 특수장비들이 있었습니다.

20여 분 그 작은 흠집을 메꾸기 위해서

정성껏 힘을 다하십니다.

 

정말 유리가 완전하게 수리될 수 있느냐고 물어도

대답 없이 작업에만 몰두하셔서 머쓱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말을 못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꾸 말을 시킨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들어갑니다.

 

2.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맡겨진 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작은 흠집을 보수하는 장비들이 꽤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런 기기들을 발명하고 발전시켜서

기술자들께 판매하는 분들이 계시겠지요.

수요가 클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자동차 유리의 작은 흠집을

메꿔주신 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적당히 메꿨으면 아마 겉모양이 흉해지거나

재보수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뜨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전문가에게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덩치가 크신 분이 꼼꼼하게 유리를 보수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떠오릅니다.

정말 작은 일에 충성하신 분입니다.

 

3.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작은 일에 불과할 겁니다.

그러니 매사에 충성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실제로 “작은 일”도 있습니다.

사소하고 스쳐 지나가기 쉬운 일입니다.

올 한해는 그런 일도 챙겨 보고 싶습니다.

 

유리창의 아주 작은 흠집을 보수해주시듯이

세상에는 작은 일을 천직으로 알고 묵묵히 수행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존경과 박수를 받아 마땅한 분들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우리 교회 표어대로

올 한해, 아니 오늘 하루

우리 주변의 작은 일에 성실하고

작은 자들을 챙기고

작은 일을 하시는 분들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 25:21)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over a little;

I will set you over much. Enter into the joy of your master. (Mat 25:21)

 

하나님 아버지,

작은 일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1.11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