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는 신앙

 90년대 후반, 우리 가족이 미국에 왔을 때 아이들 사이에서 “포켓몬”이라는 게임이 한창 유행했습니다. 초등학교 1, 2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학교에서 오면 포켓몬 카드를 갖고 놀았습니다. 게임 뿐만 아니라 만화영화는 물론 아이들 옷이나 문방구에 온통 포켓몬 캐릭터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포켓몬은 닌텐도라는 게임회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과 게임 등 다양한 상품을 일컫는 말입니다. 실제로는 “포켓 몬스터”의 약자로 “주머니 속의 괴물”이란 뜻입니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 괴물들을 훈련시키는 트레이너가 되어서 몬스터 볼로 불리는 가상의 상자에 괴물들을 데리고 다닐 수 있고 키울 수도 있습니다. 피카츄라는 십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쥐 형상의 캐릭터가 가장 유명합니다. 캐릭터들이 자라고 진화하면서 아이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게임입니다.

최근에 포켓몬 열풍이 우리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를 필두로 다시 일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게임과 현실을 혼합시킨 증강현실(AR)에 “포켓몬 고(go)”라는 신종 게임을 장착시켰습니다. 미국에서만 하루 사용자가 3천만 명에 육박하고, 전 세계에 포켓몬고 돌풍이 불고 있습니다. 거리에서도 휴대폰을 보면서 걷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게임에 열중한 나머지 가로수에 부딪히거나 도로로 뛰어들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범죄에 사용된다는 끔찍한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세대를 따라잡고 싶어서 저도 휴대폰에 포켓몬고 게임을 설치해보았습니다. 설치를 끝내자마자 우리 집 거실 텔레비전 앞에 포켓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괴물이라고 부르기에는 매우 귀여운 모습입니다. 우리 집에 포켓몬이 사는 것 같아서 놀랍고 또 신기했습니다. 포켓몬 볼을 던져서 잡으니 또 한 마리가 책꽂이에 나타납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두 마리 모두 잡았더니 2단계로 진입했다는 메시지가 뜹니다. 이번에는 집 밖으로 나가보았습니다. 웬걸 남의 집 안에 포켓몬이 있습니다. 도서관에도 나타나고 이러 저리 동네를 헤매고 다니게 생겼습니다. 저의 포켓몬고 체험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자칫 목사가 게임에 빠져서 예배시간에도 포켓몬이 눈앞에서 왔다갔다 한다면 큰일 날 일입니다. 얼른 게임을 지웠습니다.

 

포켓몬고 게임 뒤에 붙은 “고(go)”를 보면서 “걷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 <할락크>가 생각났습니다. 히브리어 할락크에는 어디론가 길을 떠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멈춰 있지 않고 발을 떼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리아 땅으로 길을 떠날 때도 할락크라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머뭇거리지 않고 길을 떠난 것입니다.

 

히브리어 할락크에는 길 위를 걷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길 위를 걷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여정, 즉 여행길입니다. 인생길을 걷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우리 모두 길을 걷는 나그네입니다. 존 번연의 소설 천로역정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순례자들입니다. 그것도 할랄크라는 동사로 표현되는 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의 길을 걷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도 할락크입니다. 유대교에서는 그들이 지켜야할 율법을 할락크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형을 써서 <할락카>라고 부릅니다. 율법은 발로 걸어가면서 지켜야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말씀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 할락크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멈춰있는 명사나, 화려한 형용사가 아니라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을 넘어서 복음을 들고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그리고 거리로 흩어지는 것이 할락크 즉 걸어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날을 <할락크> 걸어갑니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보고 포켓몬 (주머니 속의 괴물)을 찾아서 걷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보고 진리를 향해서 걷습니다. 생명 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인생길 고비고비에서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도 만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우리 주 예수님과 함께 걷고 또 걷기 원합니다. (2016년 7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사랑의 하나님

 청년들과의 성경공부 모임에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심판)의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 사랑으로 포용해주고, 어떤 지점에서는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배제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라는 속성이 함께 있지만, 하나님의 속마음은 사랑이라고 답변했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십니다. 증오와 죽음이 판치는 어두운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을 빛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온 세상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고 과정입니다.

 

한 청년은 요즘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과연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회의가 든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받고, 아무 연고 없이 목숨을 잃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살면서 자연스레 생긴 신학적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 의로우면서도 고난받은 욥이 있지만, 욥기를 수없이 읽어도 뒤죽박죽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흡족한 답을 얻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받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연대하면서 함께 울 뿐입니다. “언제까지이니까?”라고 그들과 함께 탄식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을 이끌어갈 청년들에게는 세상의 그릇된 모습을 바로잡고, 의와 기쁨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하는데 참여하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지난주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미국 역사상 최고로 많은 희생자를 낸 총기 참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이슬람과 관련된 테러인 줄 알았는데, 동성애까지 관련된 증오범죄라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동성애자들이 가는 클럽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수사당국에서는 사건의 원인과 경위를 철저하게 규명해야 할 것입니다. 하원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끝에 총기규제에 대한 법안을 만든다니 이번에는 꼭 통과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50명의 희생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종교나 인종, 성적 지향을 떠나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미워해서 테러를 저지르고,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동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범죄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이 누구이든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유가족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 화들짝 놀랄 소식이 새크라멘토에 있는 한 미국교회에서 들려왔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는 젊은 목사가 올랜도 참사를 놓고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설교한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희생당했으니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이고, 총기를 휘두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 것이며,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목사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막말입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지금부터 정확히 1년 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총기 참사가 생각납니다. 성경공부를 하던 흑인 교회에 백인 청년이 들어와서 한 시간 동안 함께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목사님들과 성도들이 따뜻하게 환대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공부 말미 기도시간에 이 청년은 흑인들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으니 돌아가라고 외치면서 총격을 가해서 아홉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희생자 가족들은 총격을 가한 청년을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증오와 그에 따른 범죄를 막는 방법이 사랑과 용서 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세상은 희생자 가족들이 표한 사랑에 감동받고 그들의 신앙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대한 청년의 질문, 세상에서 악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생기는 신앙의 회의,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안타까운 총기 참사를 보면서 이 모든 것을 푸는 열쇠는 찰스턴 교회의 성도들이 몸소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녹입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답입니다. 온 세상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되길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긍휼히 여겨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6년 6월 23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언제나 청춘

오래전부터 우리 가족의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는 두 아이가 결혼하기 전에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이 너무 야무지고 이상적이어서 얼마 전부터 하와이로 바꿨지만, 여전히 불가능했습니다. 미시간의 큰 아이가 방학을 맞아서 집에 오고 회갑을 맞으신 한국의 누님께서 방문하셨던 지난달에 그랜드 캐년을 다녀오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10년 전 인디애나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할 때 그랜드 캐년을 처음 보았습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동안 어떤 변화가 있을지 기대하면서 이틀에 걸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 웅장한 그랜드 캐년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해의 움직임에 따라서 명암이 생기고 하루에도 수시로 변하는 깎아내린 듯한 협곡과 그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콜로라도 강, 심지어 10년 전 가족사진을 찍었던 바위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호텔로 돌아와서 인터넷에 저장해 놓은 10년 전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변한 것이 없는데 사진 속의 우리 가족은 많이 변했습니다. 청소년이던 두 아들은 이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0년 전 우리 부부는 조금 과장해서 신혼부부처럼 젊었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건만 사진 속에는 시간의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만약10년 후에 다시 그랜드 캐년을 찾는다면 어떻게 변해있을까 생각하니 슬며시 우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할아버지가 사진 속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요예배에서 전도서 읽기를 마쳤습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는 부귀영화를 다 누린 솔로몬 왕이 노년에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말씀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말씀이 전도서를 대표합니다. 물론 여기서 헛되다는 것은 물방울이 떨어지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인생을 비유한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체념이 아니라 순식간에 지나가는 인생 중에도 지금 이곳의 현재를 즐기며,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전도서는 청년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전도서 말씀을 청년들에게 제한할 수 없습니다. 청년의 때는 누구에게나 바로 지금 이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울만이 청춘이라는 시에서 말했듯이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젊은 시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개인적으로 날마다 청년의 때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갈렙은 85세가 되었어도 자신을 청춘이라고 밝히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약속하신 험한 산지를 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합니다. 웬만한 젊은이들도 겁낼 거인들이 사는 땅을 자신이 친히 가서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을 45년 동안 간직했고, 그것을 성취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청년으로 살 때 우리 모두 언제나 청춘입니다.

 

하물며 말 그대로 청년의 때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도전하고 해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비록 실패해도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물론 요즘 청년들의 삶이 녹록지 않습니다. 청년 실업은 전 세계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청년들 안에 분노가 쌓이고 스스로 인생의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청년의 때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에 매진하면 분명히 길이 열릴 것입니다. 전도서의 표현대로 떡을 물 위에 던지면 언젠가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10년 후, 그랜드 캐년에 다시 서서 사진을 찍는다면 그랜드 캐년은 그대로 있을 테지만 저는 지금보다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도 여전히 청춘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이에 상관없이 청년의 때를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젊을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청년으로 살기 원합니다. 갈렙처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믿음의 장부가 되기 원합니다. (2016년 5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비가 내리는 겨울이 지나고 따뜻하고 화창한 봄이 되면, 왕들이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갔습니다. 이웃 나라에 힘을 과시하고, 재산이며 노비들을 탈취해서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작은 나라들을 속국으로 만들므로 지속해서 조공을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다윗도 봄마다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시니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고, 다윗의 왕권은 대내외적으로 견고해졌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본뜬 다윗성을 예루살렘에 세웠고 하나님의 법궤도 모셔왔습니다. 하나님 역시 다윗은 물론 그의 후손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했습니다. 다윗에게 영적인 조언을 하던 나단 선지자가 다윗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점이 문제였습니다. 인생의 골짜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꼭대기에 있을 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더욱 겸손해야 하는데, 다윗 역시 뭇 왕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평정하면서 교만해졌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해이해졌습니다.

 

어느 봄날, 다윗은 부하들만 전쟁에 내보내고 자신은 왕궁에 머물며 한가롭게 지냅니다. 저녁 무렵 늦게 일어나서 지붕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여인을 왕궁으로 데려와서 관계를 맺습니다. 그녀는 다윗을 위해서 전쟁에 나간 히타이트 출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부하의 아내, 외국인이면서도 다윗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장수의 아내를 범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밧세바가 아기를 갖습니다. 이때부터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전쟁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들여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갖게 합니다. 우리아의 아이라고 위장하려는 것인데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는 다윗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죄에는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최고사령관 요압을 시켜서 전투 중에 우리아만 두고 후퇴함으로 그를 죽게 합니다.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밧세바를 아내로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십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양을 무척 사랑해서 자식처럼 아꼈습니다. 이웃에는 양과 소를 많이 가진 부자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나그네 한 사람이 부자를 방문했을 때,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한 마리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윗은 묻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면 그런 부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의로운 척합니다.

 

다윗 역시 양을 치던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자기 식구처럼 양들을 사랑했고 맹수로부터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다윗이 나단의 이야기를 듣고 화를 낼 만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죄가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도 남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에는 딱 두 글자 “you (are) the man” 이 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양처럼 돌보라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는데, 부하의 아내를 범했고 그 부하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서도 시치미 뚝 떼고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원래의 다윗이 아닙니다. 그가 변했습니다. 어느새 다윗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 즉 부자가 되어 있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에 즉각 응답하면서 자신을 추스릅니다.

 

요즘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아갑니다. 무수한 말이 난무하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기 힘듭니다. 아니 그런 말을 일부러 외면합니다. 그렇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이야말로 양심을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곧바로 인정했고 죗값도 톡톡히 치렀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머리가 쭈뼛섭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처음 시작했던 자리로 돌려놓으시려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의 은혜와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다시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신앙, 바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그 출발점입니다.(2016년 5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나무에 달리시다

한국에 있을 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함께 동네 뒷산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땅거미가 지면 온 도시가 불을 밝히고 빨간색 십자가가 곳곳에 눈에 띄었습니다. 커다란 교회의 높은 십자가부터 여기저기 크고 작은 건물 위에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를 보면서 교회가 많이 있는데도 세상이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족의 해방을 가져올 강력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일들을 보면서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친 이유도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어떤 야만족들이 고안했고 나중에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형틀이었습니다. 죄수를 벌거벗겨서 십자가에 매달아 놓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형틀에 달린 그를 저주합니다. 죄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서서히 죽어가고 그의 시체는 새들의 먹이가 되거나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에 부서져 내립니다. 로마의 시인 키케로는 십자가형을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야만족들을 죽이는 방법으로는 사용될 수 있지만 절대로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달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달린 사람을 저주받은 죄인으로 규정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십자가가 국가가 행하는 형틀이었다면, 구약의 율법에서 나무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사람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로마 황제를 거부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했다는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율법을 따르면 저주받는 자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 앞에 잡혀갔을 때,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라고 증언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절대로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조롱거리였습니다. 율법을 믿던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곳이기에 거리끼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저주받은 자들이 달리는 나무에 벌거벗은 채로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율법을 어긴 사람들이 하나님께 버림받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셨습니다. 오죽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나무에 달려서 우리가 받은 저주를 몸소 받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기꺼이 그의 몸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자랑이요 능력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매일같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하필이면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을까요?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는 없었을까요? 예,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2천 년 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2016년 고난주간을 보내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고난의 길입니다. 저주의 상징인 나무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무에 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편안하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십자가를 건물 위에 높이 달 생각만 했지,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만들고, 십자가 넘어 부활의 영광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고 몸소 보여주신 기독교의 진리를 세상에서의 성공과 형통,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로 바꿨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바라봅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살기로 재차 결심합니다. 나무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고귀한 사랑이 온 세상에 넘치길 기도합니다.(2016년 3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아비가일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님과 가족들, 나이가 들면서 가까워진 친지들과 이웃들, 그리고 우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돕는 배필 즉 배우자와의 만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모든 만남이 복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좋았던 기억들을 간직하고 좋은 만남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다윗에게도 좋은 만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과의 만남이 눈에 띕니다.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는 기쁨입니다”라는 뜻이니,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정에서 곱고 예쁘게 자랐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비가일을 두고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비가일은 고집이 세고 포악한 남편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름이 나발인데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이 부유한 목축업자였다는 사실 외에 달리 좋을 것이 없어보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을 때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먹거리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들에서 나발의 가축들과 목자들을 지켜준 일이 있었기에 나발이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고약한 마음씨의 나발은 다윗을 비난하면서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400명의 군사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발을 치러 올라갑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입니다. 나발이 괘씸할 수는 있어도 광야에 사는 일개 목축업자에게 그렇게까지 흥분해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별것 아닌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작은 일로 자존심이 상하면 참지 못하고 발끈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을 만나러 옵니다. 여인 혼자서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쳐들어오는 다윗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애원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명 보자기”로 싸서 보호해 주실 테니 먹거리가 없어도 또한 자존심이 상해도 함부로 칼을 들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다윗이 물 맷돌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렸듯이, 하나님께서 물 맷돌로 다윗의 원수들을 쓰러뜨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한 명연설이었습니다. 다윗이 군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은 자신의 가정을 살렸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사소한 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지혜롭게 조언했습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러 가는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숨어있는 동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울도 살려주었던 다윗이 음식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발과 그의 가족을 전멸시키는 것은 졸장부의 행세입니다. 자칫 큰일을 앞두고 창피한 이력을 남길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고귀한 품격을 되찾게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유진 피터슨이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을 놀라게 하여 갑작스럽게 빠져 들어갔던 추함에서 그를 구해 내었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된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추한 마음도 아름답고 고귀하게 변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보고 듣게 하는 만남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선하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되찾게 해 줄 만남을 기대합니다. 귀한 만남이 가져올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꿈꾸면서 새봄을 맞고 싶습니다.(2016년 2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오벧에돔

연초부터 미국 전역이 파워볼 열풍에 휩싸였습니다. 당첨금이 16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숫자까지 뛰면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2불짜리 티켓이 수십 억이되는 꿈을 꾸게 하였습니다. 파워볼 티켓을 산 사람들은 누구나 16억의 행운이 자신에게 찾아오길 희망했을 겁니다. 대부분 우물에서 숭늉을 찾듯이 파워볼에 당첨된 것을 가정하고 그 이후에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속에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워볼에 대한 무지개꿈은 당첨자 세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16억 달러라는 당첨금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파워볼을 비롯한 복권시스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당첨금에 한도를 정해서 일정 금액을 넘으면 무효로 하던지 미리 상금으로 배분하는 규칙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금액이 천정부지로 치솟게 되니 잠시 잠깐이지만 온 세상을 헛된 공상에 휩싸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행운은 로또처럼 찾아오지 않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인생이 도리어 망가진 사례도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운은 매일의 삶에 충실해서 얻는 깊은 감사입니다. 곁눈질하거나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걷고 난 이후에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 순간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족들, 친지들, 성도들과 더불어 담소하고, 은밀히 이웃을 돕고 섬기며 사는 것이 16억 로또보다 가치 있는 인생입니다.

 

구약성경에 오벧에돔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올 계획을 세웁니다. 어렵사리 왕이 된 다윗이기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의 마음 한편에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면 커다란 행운이 몰려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모셔오는 과정에서 행운은 커녕 재앙이 내렸습니다.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뛰자 운반을 책임지던 사람이 법궤를 손으로 붙잡았는데 현장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것을 본 다윗이 겁을 먹고 법궤 운반을 중간에 포기합니다. 행운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던 법궤가 죽음을 일으켰으니 다윗과 백성들이 느꼈을 공포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천덕꾸러기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법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명령으로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법궤를 머물게 합니다. 로또는커녕, 만지기만 해도 죽는 법궤를 강제로 자신의 집에 들였으니 오벧에돔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법궤를 피했고 오벧에돔만이 왕의 명령에 순종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벧에돔은 왕은 물론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선한 마음의 소유자처럼 보입니다. 하여튼 죽음을 감수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를 모신 오벧에돔은 물론 그의 집안을 축복하신 겁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법궤를 모셨는데 그것이 축복의 통로가 되었으니 오벧에돔이 얼마나 기뻤을까요! 오벧에돔은 석 달 만에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신 신앙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말 그대로 하늘나라 로또가 터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다윗이 안심하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갑니다. 다윗은 법궤와 함께 오벧에돔을 데려다가 높은 자리를 주면서 곁에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죽음을 부르던 법궤를 축복의 통로로 만든 대단한 신앙과 영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오벧에돔이 법궤를 지키는 문지기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당시에 문지기는 밤과 낮에 교대로 근무하는 거룩하지만 힘겨운 직책이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자신의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갖고 언론 인터뷰도 하고 간증집회도 다니고 무엇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해서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법궤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출셋길을 마다하고 끝까지 법궤를 지켰습니다. 그 일을 천직으로 알았습니다. 오벧에돔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은 인물입니다. 오벧에돔을 통해서 올 한해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함을 배웁니다. 헛된 꿈을 꾸기보다 분수를 지키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최고의 신앙임을 배웁니다. (2016년 1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어린왕자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영화 한 편이 올봄 프랑스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에서 차례로 개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내년에, 한국에서는 올 성탄절에 개봉을 앞둔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입니다. 인터넷에서 예고편과 영화평을 둘러보니, 쌩떽쥐뻬리의 원작 어린 왕자를 현대판으로 바꾼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어린 왕자>는 제가 매우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모로 암담했던 대학 시절 구내서점에서 문고판 어린 왕자를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17년 전 미국에 올 때 전공서적을 마다하고 챙겨왔던 애독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책꽂이에서 어린 왕자를 꺼내보니 모서리가 헤어지고 색깔도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제 이니셜과 함께 “H.S.Y. 82.6.7 구내서점”이라고 쓰인 메모가 저를 반깁니다. 단숨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50대 중반에 읽는 어린 왕자는 33년 전 청년 시절에 읽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입니다.

 

소설은 사하라 사막에 비상착륙한 비행사가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저자 생떽쥐뻬리가 기호를 붙여 가면서 그린 그림이 소설의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 그림은 중절모처럼 생긴 그림입니다. 어른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모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코끼리를 삼킨 뱀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양을 그려줍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구멍이 세 개 뚫린 상자를 그려주니 매우 만족해합니다. 모자 속에서 코끼리를 삼킨 구렁이를 보았듯이 추위를 피해서 상자 속으로 들어간 양을 보았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일입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사는 소행성에 무성하게 자라는 바오 밤나무를 없애느라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날아온 꽃씨에서 자란 장미와 친해지려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면서, 여섯 개의 행성들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혼자 살면서 왕이라고 자처하는 왕자병에 걸린 사람, 자기를 칭찬해 주는 말만 듣고 싶어 하지만 속은 비인 허풍쟁이, 술 마시는 것을 후회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주정뱅이, 5억 개의 별을 세고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숫자에 빠져 사는 상인, 행성이 하도 빨리 돌아서 1분마다 아침과 저녁을 맞기에 무의미하게 불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 점등인, 다른 이에게 들은 말과 이론에만 의존하는 지리학자입니다. 어린 왕자가 차례로 만난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찌들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른들의 궁색하고 불쌍한 모습입니다.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로 방문한 지구에서 여우를 만납니다. 여우에게서 길들인다는 말을 듣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여우의 말에 소행성에 두고 온 꽃을 생각합니다. 장미꽃과 자신이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해서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자기 행성에는 하나뿐인 장미꽃이 지구에 수없이 만발한 것을 보면서 자신의 지나친 집착도 깨닫습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새겨봅니다:: “잘 가라. 비밀을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부터 보아야 한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조그만 마을 베들레헴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가 예수님임을 마음속으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떴을 때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속에서 생명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가 좋아졌는지 거리에 자동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샤핑몰에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사고팔고 있는지, 행여나 어린 왕자가 방문했던 소행성 사람들처럼 의미 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어린 왕자가 안내하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성탄절을 맞고 싶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운 아기가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리고 그 아기 앞에 조용히 무릅 꿇고 경배하기 원합니다. 복된 성탄 맞으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2015년 12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일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지역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였습니다. 멀리서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향해서 손을 흔들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시니, 제사장에게 뛰어가는 동안에 나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분명히 열 명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는데 예수님께 나와서 감사한 사람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은근히 섭섭하셨는지 “나머지 아홉은 어디 갔느냐?”고 넌지시 말씀하십니다.

열 명 가운데 한 명만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하나님께서 열 가지 은혜를 주시지만, 진작에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하는 경우는 한 번뿐일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 그리고 불안이 아홉이라면, 감사하는 마음은 달랑 하나일 때도 많습니다. 이렇듯 감사가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앙생활에서 감사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쫓아 살게 하셨습니다. 가족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데 이웃의 도움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 염려가 사라집니다. 이처럼 감사는 하나님은 물론 이웃과 우리 자신을 향합니다.

감사의 유익은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서 입증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가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을 줍니다. 감사에 익숙한 사람은 활력이 넘치고 매사에 긍정적입니다. 스트레스를 덜 받고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알코올이나 약물과 같은 중독에 빠질 위험도 낮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잠이 쉬들고 숙면을 취합니다.

우리 안에 감사성향이 선천적으로 50% 차지하고 있답니다. 절반이 감사하는 마음이라니 앞에서 소개한 문둥병자의 예보다 감사하면서 살 확률이 높아서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감사도 배워야 하고 훈련해야 함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인간의 심리와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으로 감사일기 쓰기를 추천합니다. 실제로 100명의 대학생을 세 그룹으로 나눠서 첫번째 그룹은 일주일 동안 감사일기를 쓰게 했고, 두 번째 그룹은 일주일 동안 화나게 한 일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세 번째 그룹은 아무 일이나 일기장에 기록하라고 요청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 감사 일기를 쓴 학생들이 마음과 생각이 긍정적이었고 학업 성취의욕도 훨씬 높았습니다.

감사일기 쓰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감사일기는 구체적으로 기록해야 합니다. “좋은 아내, 좋은 가족”처럼 제목만 나열하면 감사일기가 무미건조해 지고 멀지 않아 일기장을 덮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주어서 감사했다” 또는 “밖에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딸아이가 달려와서 허그해 주어서 고마웠다”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써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루에 다섯 가지씩 감사의 이유를 찾아서 일기장에 적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다섯 가지를 찾기가 쉽지 않고, 매일 같이 비슷한 내용만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감사 제목을 찾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평소에 스쳐 지나가던 일들 속에서 감사의 제목을 찾아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기장 밖으로 나가서 하루에 한 번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 전도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감사가 습관이 되고, 성품에 녹아들어서 인격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도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할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감사일기를 쓰면서 한 해를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한 명이 예수님께 왔듯이 적어도 일 년 중 마지막 한 달을 감사의 달로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2015년 11월 26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잊혀진 것들

10월이 되면 한국의 한 대중가요 가수가 부른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어떤 이가 10월의 마지막 밤에 사랑하는 이와 헤어졌습니다. 얼떨결에 서로 이별에 합의했는지 한마디 변명도 못 하고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처럼 10월이 되면 잊혀진 사람들이 생각나고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종종 멍하니 상념에 젖곤 하는 것이 어느 가을날 우리네 모습입니다.

시간이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입니다. 시간만 빠르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됩니다. 심지어 화성에 사람을 보내겠다는 계획도 이미 진행되고 있어서 수천 명의 사람이 화성이주를 신청했습니다. 이처럼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꿈꾸던 일들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상이 좋아져도 “옛날에는 이랬었는데”하는 추억들이 마음 한편에서 새싹처럼 돋아납니다. 엊그제 낙엽이 지기 시작한 동네를 아내와 함께 산책하면서 옛날얘기를 나눴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공중전화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거실에 전화기 한 대 있을 때이니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끊어야 했습니다. 어쩌다가 아내 혼자 있을 때 전화를 하면, 길게 통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중전화를 거는 저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동전이 떨어졌습니다. 뚜-뚜-하는 소리가 아내와 저를 매정하게 갈라놓습니다. 아쉬움에 발길을 돌리곤 했습니다.

요즘은 사전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학창시절에는 무조건 영한사전을 가방에 넣고 다녔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알파벳과 함께 발음 기호를 익혔습니다. 그래야 사전을 찾고 단어 옆에 있는 발음기호를 따라서 영어 단어를 발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손때가 묻어서 사전 옆구리가 까맣게 변해가고 돌돌 말린 것이 공부한 흔적입니다. 도시락 반찬에서 흐른 김칫국물이 사전을 덮쳐서 색깔도 변하고 냄새가 배기도 합니다. 비장한 각오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사전을 통째로 외우겠다는 것입니다. 한장 한장 찢어서 외우기도 하고, 가끔 괴짜들은 사전을 먹겠다고 했습니다. 사전을 옆에 펼쳐놓고 두꺼운 영어책을 읽고 있으면 저절로 지성인이 된 듯했습니다. 요즘은 사전을 찾을 일이 없습니다. 똑똑한 전화기 스마트 폰 덕분입니다. 구글에 모르는 단어를 입력하면 발음 기호를 해독할 필요도 없이 원어민 발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래도 종종 손때 묻은 사전이 그립습니다. 단어를 찾고 발음기호를 표시해 놓으면서 영어 공부하던 때가 더 학구적으로 생각되는 것은 제가 나이가 들었다는 표시일 겁니다.

잊혀진 것들 가운데 한 가지가 더 생각납니다. 파란색과 빨간색 줄로 둘레가 쳐진 국제우편 편지봉투입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편지를 보낼 때는 꼭 그 봉투를 사용했습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모두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손글씨로 정성껏 써내려간 편지입니다. 편지를 읽으면서 고국에 계신 부모님들과 친지들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부모님의 음성이 귓가에 들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훔칩니다. 지금은 편지는 물론 손글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엄지손가락만으로 셀폰 메시지를 보내고, 컴퓨터 자판으로 편지를 씁니다. 손글씨를 쓰려고 하면 옛날 같은 정감어린 필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삐뚤삐뚤 줄도 맞지않고 글씨체도 엉망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는 정성이 있었고, 그렇게 쓴 편지를 읽는 감동이 있었는데 어느덧 마음속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잊혀지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편리해져서 좋지만 그래도 추억이 깃든 옛것들이 잊혀지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잊혀지고, 어르신들이 한 분 한 분 하늘나라로 이주해 가실 때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십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세상사인 줄 알지만 그래도 지난날의 추억들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반갑게 맞고 싶습니다. 구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더욱 내려앉을 테니까요. 아니 지금 우리가 최신식이라고 여기는 것도 조만간 구식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변하는 것에 마음을 두기 보다 영원한 진리,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쏟아야겠습니다.(2015년 10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