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올 영화 한 편이 올봄 프랑스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에서 차례로 개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내년에, 한국에서는 올 성탄절에 개봉을 앞둔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입니다. 인터넷에서 예고편과 영화평을 둘러보니, 쌩떽쥐뻬리의 원작 어린 왕자를 현대판으로 바꾼 애니메이션 영화입니다.

 

<어린 왕자>는 제가 매우 좋아하는 소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모로 암담했던 대학 시절 구내서점에서 문고판 어린 왕자를 구입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17년 전 미국에 올 때 전공서적을 마다하고 챙겨왔던 애독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책꽂이에서 어린 왕자를 꺼내보니 모서리가 헤어지고 색깔도 갈색으로 변했습니다. 제 이니셜과 함께 “H.S.Y. 82.6.7 구내서점”이라고 쓰인 메모가 저를 반깁니다. 단숨에 다시 한 번 읽어보았습니다. 50대 중반에 읽는 어린 왕자는 33년 전 청년 시절에 읽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입니다.

 

소설은 사하라 사막에 비상착륙한 비행사가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저자 생떽쥐뻬리가 기호를 붙여 가면서 그린 그림이 소설의 흥미를 더해줍니다. 첫 번째 그림은 중절모처럼 생긴 그림입니다. 어른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모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는 코끼리를 삼킨 뱀이라고 대답합니다.

 

어린 왕자는 비행사에게 양을 그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저런 모습으로 양을 그려줍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구멍이 세 개 뚫린 상자를 그려주니 매우 만족해합니다. 모자 속에서 코끼리를 삼킨 구렁이를 보았듯이 추위를 피해서 상자 속으로 들어간 양을 보았습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일입니다.

 

어린 왕자는 자기가 사는 소행성에 무성하게 자라는 바오 밤나무를 없애느라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날아온 꽃씨에서 자란 장미와 친해지려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면서, 여섯 개의 행성들을 차례로 여행하면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혼자 살면서 왕이라고 자처하는 왕자병에 걸린 사람, 자기를 칭찬해 주는 말만 듣고 싶어 하지만 속은 비인 허풍쟁이, 술 마시는 것을 후회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주정뱅이, 5억 개의 별을 세고 그것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숫자에 빠져 사는 상인, 행성이 하도 빨리 돌아서 1분마다 아침과 저녁을 맞기에 무의미하게 불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 점등인, 다른 이에게 들은 말과 이론에만 의존하는 지리학자입니다. 어린 왕자가 차례로 만난 사람들은 세상살이에 찌들고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어른들의 궁색하고 불쌍한 모습입니다.

 

어린 왕자는 일곱 번째로 방문한 지구에서 여우를 만납니다. 여우에게서 길들인다는 말을 듣습니다.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여우의 말에 소행성에 두고 온 꽃을 생각합니다. 장미꽃과 자신이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해서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자기 행성에는 하나뿐인 장미꽃이 지구에 수없이 만발한 것을 보면서 자신의 지나친 집착도 깨닫습니다. 어린 왕자는 여우가 남긴 마지막 말을 되새겨봅니다:: “잘 가라. 비밀을 알려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잘 보려면 마음으로부터 보아야 한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조그만 마을 베들레헴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가 예수님임을 마음속으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어린 왕자의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떴을 때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속에서 생명과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기가 좋아졌는지 거리에 자동차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샤핑몰에는 사람들이 넘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사고팔고 있는지, 행여나 어린 왕자가 방문했던 소행성 사람들처럼 의미 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칩니다. 어린 왕자가 안내하는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서 성탄절을 맞고 싶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운 아기가 예수님이심을 알아차리고 그 아기 앞에 조용히 무릅 꿇고 경배하기 원합니다. 복된 성탄 맞으십시오. 메리 크리스마스!  (2015년 12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