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든 편견

체격이 크신 흑인 목사님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대형 매장이나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할 때면 꼭 추가 심문을 받는답니다. 성직자를 표시하는 옷을 입고 있으면 무사통과인데, 조금 허름한 일상복을 입고 밖에 나가면, 경계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그대로 느낀답니다. 우리로서는 생각하지 못할 애환을 갖고 계셨습니다.

 

지난 3월 새크라멘토에서는 두 명의 경찰이 흑인 청년에게 20발의 총격을 가해서 청년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동차 유리를 깨고 절도를 시도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할머니 집 뒤뜰에 있던 한 흑인 청년을 발견했고, 실제 범인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총으로 오인해서 총격을 가한 것입니다. 경찰 보고에 의하면 청년이 자신들을 향해서 걸어왔다고 했지만, 총탄이 흑인 청년의 등에 집중된 것이 부검결과 밝혀졌습니다. 무장한 경찰이 흑인 청년의 등에 총을 쏜 셈입니다. 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암묵적 편견(implicit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편견을 갖고 다른 사람을 대하거나, 어떤 상황이나 이슈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몸집이 큰 흑인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 흑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이나 머리빗을 총이나 칼로 생각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서툰 영어로 인해서 은근히 무시 받는 이민 생활의 애환도 암묵적 편견의 희생물일 수 있습니다. 연구에 의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고, 많은 경우 의식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보다 자신 안에 은연중에 스며든 치우친 생각으로 사람을 대하고 상황을 판단한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암묵적 편견을 알아보는 테스트도 있었습니다. 피부 색깔, 인종, 나이, 성적지향 등에 관한 암묵적 편견을 검사하는 웹사이트였습니다. 피부 색깔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검사를 시작했더니 검은 피부에 호의적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제 얼굴이 검은 편이고 늘 백옥같이 하얀 피부를 부러워했기에 의외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있는 모습 그대로 저 자신을 사랑하고 피부 색깔에 상관없이 이웃을 대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의식적이든 아니면 암묵적이든 편견은 떨쳐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방식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바라는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자신과 다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심지어 적대시할 가능성도 큽니다. 만약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권력을 손에 쥔다면,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성경에서 강조하는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새크라멘토의 경찰 총격처럼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피부 색깔에 따른 암묵적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세워둔 기준을 갖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평가합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대시하고, 마음속의 편견을 동원해서 다른 이들을 미워하고 편을 가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편견을 극복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모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않던 죄인, 세리, 병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친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 <오만과 편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기대로 바꾸기 원합니다. 편견에서 비롯된 고정관념과 오만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하기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서로 배우고, 희망과 기대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길 꿈꾸기 원합니다. (2018년 4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