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길

저는 종종 기도의 반대말은 염려라고 말합니다. 염려하고 있다면 기도하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염려가 밀려오면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염려와 기도는 서로 상극입니다. 어디 기도만 그럴까요? 믿음 자체도 염려와 반대입니다.

 

저도 염려가 많은 편에 속합니다. 아마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염려를 달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염려와 근심, 불안으로 인해서 우울증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서 염려와 불안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염려할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말없이 기도하는 침묵 기도가 마음을 잡는데 무척 도움을 줍니다.

 

4년 전쯤에 아내와 제가 한꺼번에 대장 내시경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부부가 함께 건강검진을 받으니 검사 시기가 겹친 것입니다. 정기검진인데도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행여나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큰 병은 없겠지, 대장 내시경도 잘못하면 의료사고가 난다는데 마취에서 잘 깨어나겠지 등등 쓸데없는 염려가 꼬리를 물더니 검사 날짜가 다가오면서 잠까지 설쳤습니다. 저희 부부에게 아무 문제가 없어서 10년 후에 다시 오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감사하고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목사인 저의 믿음 없음을 한참 동안 자책했습니다. 솔직히 창피했습니다.

 

교회를 향한 염려도 항상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금처럼 평안하고 가족같은 교회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기대 반 염려 반입니다. 연로하신 권사님들께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시면 안 되는데, 교회를 지키는 젊은 집사님들이 직장을 옮겨서 교회를 떠나면 어떻게 하지, 저의 부족함이 교회에 걸림돌은 되지 않을까 등등 염려가 밀려옵니다. 믿음을 외치는 목사에게 염려가 상존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물론 염려하는 것들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대부분의 염려가 염려에서 끝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염려하는 우리네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 강한 것 같아도 한없이 약한 질그릇이라는 반증입니다.

 

과연 믿음이 무엇일까? 매주 예배에서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과 신앙공동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잘 요약해 주지만, 믿음이 머리에 머물 때가 많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으니 확신이 부족합니다. 손과 발 즉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허공을 맴돕니다. 그 자리를 염려와 불안이 차지하면 우리의 믿음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곤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처럼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더욱 귀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이유도 이제야 감이 조금 잡힙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염려라면, 믿음의 비슷한 말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는 바울의 고백이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목사이면서도 염려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염려와 불안으로 밤잠을 설칠 때도 밤의 달이 상치 못하도록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음과 은혜로 무장했다고 염려와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의 실존이 그만큼 힘겹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이유입니다.

 

올해도 예외 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니 인생의 구비 구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합니다. 인생길 골목 골목에 하나님께서 미리 가셔서 은혜의 깃발을 꽂아 놓으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말씀대로 두려워하지 말고 주어진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힘들 때는 기도하고, 좋을 때는 감사하며 찬양하고, 속절없이 무너질 때는 주의 은혜를 구하며 걸어가는 믿음의 길입니다. (2019년 11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