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돌봄 (5)

사르밧 과부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7월부터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돌봄으로 나타납니다. 8월에도 계속해서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를 위한 하나님의 돌봄, 다윗을 찾으셔서 왕으로 기름을 부으신 하나님, 십계명을 다섯 가지나 어긴 다윗을 변함없이 사랑하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은혜 속에서 우리의 삶이 깊어지고 높아지고 모든 사람을 품을 만큼 넓어집니다.

 

오늘은 엘리야 시대 사르밧에 살고 있던 과부에 대한 말씀입니다. 선지자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아합이라는 못된 왕이 통치했습니다. 아합은 시돈 사람 이세벨을 왕비로 맞았는데 바알 종교를 무차별 수입했습니다. 왕부터 하나님을 떠나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최악입니다. 하나님께서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시면서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가뭄을 통해서 하나님이 바알보다 우월하심을 입증하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요단강 그릿 시냇가로 피하게 하시고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냇물도 말랐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보내십니다. 사르밧은 항구도시로 무역이 번성했던 곳입니다. 왕비 이세벨이 시돈 출신이고 하나님을 믿는 지역이 아닌데 그곳으로 엘리야를 보내셨으니 엘리야가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엘리야는 바알신을 섬기는 지역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엘리야가 찾아간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한 번 먹을 기름을 갖고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서 함께 먹자고 제안합니다. 한 번 먹을 음식인데 엘리야를 줄 떡을 먼저 만들면 자신들이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르밧 과부에게 곡식과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사르밧 과부에게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르밧 과부를 언급하셨습니다. 많은 과부가 있지만 사르밧 과부에게 특별한 은혜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돌봄이 지역이나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성품(마음)속에 임함을 배웁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한 주를 시작합시다. 돌봄의 은혜를 경험하고, 돌봄이 필요한 어려운 이웃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기도합시다.-河-

첫날

좋은 아침입니다.

 

1.

8월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무엇이든지 시작은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기대와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작하는 것에 숨겨진 염려와 불안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들인데,

때로는 시작이 무색할 정도로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말씀 붙잡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3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편 37:3-6)

 

우리의 성실과 하나님의 성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정오의 빛처럼 빛나는 인생길이 열릴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시고

믿음으로 새달을 맞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응원하며

제 기도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2.

지난주일 밤

기혼 그룹 카톡방에 길로이 총격 사건에 대한 소식이 올라왔습니다.

 

길로이 마늘 축제 현장에서

열아홉 살 된 청년이 AK 반자동 소총으로 무차별 사격해서

4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청년은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서 사살되었지만,

범행 동기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범행 전 그의 SNS에 올린 글이나, 그가 읽은 책으로 보아서

백인 우월주의자 성향을 진진 청년으로 생각됩니다.

 

캘리포니아는 21세 이상만 총기를 구입할 수 있어서

네바다까지 가서 구입했다니 계획한 일처럼 보입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목숨을 잃은 6살 소년은 꿈 많고

자신을 치장할 줄 알고 R&B음악을 즐겨 들었답니다.

1학년 입학을 앞두고 사고를 당했습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 또래여서 더욱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각박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보다 편을 가르고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험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순수한 희생자들이 발생하니 안타깝습니다.

 

하루속히 정부 차원에서 총기 규제가 법으로 제정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선해지고, 화평케 되길 원합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이 충분히 작동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3.

8월의 첫날을 맞으면서

오늘 아침 나눈 말씀대로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히 성취하실 줄 확신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Casting all your anxieties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1Pet 5:7)

마음속에 있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새달을 시작합시다.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새달을 살아갑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I am sure of this, that he who began a good work in you

will bring it to completion at the day of Jesus Christ. (Phil 1:6)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에 평화를 주옵소서.

오늘도 참빛 식구들이 화평케 하는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8.1 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4)

  • 여디디야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시고, 자신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세심하게 대하시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떠납니다. 외모가 출중했던 사울입니다. 처음 왕으로 세움 받을 때는 왕이 되는 것이 부담스러워 수레바퀴 뒤에 숨었는데 전쟁에 승리하고 자신의 영역이 커지면서 안하무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에 보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으로 기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압을 비롯한 이새의 일곱 아들 가운데 왕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들에서 양을 치는 막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대로 “하카탄” 막내 다윗을 찾아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던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세심한 안목이 돋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이지만, 다윗 역시 그의 왕국이 견고해 지면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 다섯 가지를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셔서 그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시편 51편에 있듯이 우슬초로 자신을 정결하게 씻겨 주시길 회개하며 간구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기가 심하게 앓게 되자 다윗은 방에 들어가서 금식하면서 밤을 새우며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7일 만에 아이가 죽었습니다. 신하들은 다윗이 상심할 것이 두려워서 아이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지만, 다윗은 일어나서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차려 입고 하나님께 경배한 후에 왕궁에 돌아와서 왕업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 가셨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살피시고 돌보셨습니다. 밧세바가 다시 아들을 낳으니 다윗은 그를 “솔로몬 (평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첫째 아들을 잃고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평안을 주시고 그의 처지를 돌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사람)”로 부르십니다. 아들을 잃은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심을 확증하고 그를 위로하신 말씀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꼭 맞게 임함을 다윗을 통해서 봅니다.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河-

만남의 기쁨

지난주에는 19년 전 인디애나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함께 교회를 세웠던 옛 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시카고에 다녀왔습니다. 시카고 근교에 정착한 두 분 집사님의 가정이 호스트가 되었고, 시카고, 인디애나, 위스콘신, 오하이오에 정착한 동문들의 가정이 참석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번 모임을 주선한 집사님 가정과 우리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내와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시카고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공항에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경찰견이 모든 승객의 짐과 몸을 수색하더니 비행기도 지연되었습니다. 시카고에 도착해서도 아침에 내린 폭우로 비행장이 만원이 되어서 비행기 안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어렵게 도착했지만, 고등학교 동창의 라이드를 받아서 모임 장소에 가니 모두 반갑게 맞이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아이들이 훌쩍 큰 것입니다. 주일 학생이던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키가 6피트가 넘는 남자아이가 저를 안아줍니다.

 

함께 나눌 성경 공부도 준비해 갔는데, 그동안의 근황을 나누고 업데이트하느라 말씀 전할 틈이 없습니다. 말씀도 중요하지만, 서로의 삶을 나누는 것이 더 다급하고 흥미진진했습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틈을 내서 말씀을 전하지만 자연스레 각자의 삶과 연결되어 또다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저녁 늦게 모임을 마치고 다음날을 기약했습니다.

 

시차를 고려해서 느지막하게 두 번째 날을 시작했습니다. 인디애나와 위스콘신에서 두 가정이 새롭게 참가했습니다. 새로운 가정이 올 때마다 모임을 접고 그들의 근황을 듣고 마주 앉아 그동안의 삶을 주고받습니다. 요즘은 카톡과 SNS가 있지만, 얼굴을 맞대고 같은 장소에서 모임을 하는 것에 견줄 수 없습니다. 웃음꽃이 핍니다. 아이들이 크니 모임을 갖기가 한결 편해졌습니다.

 

대부분의 재상봉(reunion)모임이 그렇듯이 우리들도 그때 그 시절을 회고했습니다. 함께 교회를 세웠던 일들, 만났던 분들, 함께 나눴던 비전과 잊지 못할 사건들을 추억하면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인디애나 교회는 유학생들이 주축이었습니다. 대부분 형편이 풍족하지 않고 앞날이 불확실한 채 학업에 전념하던 때였습니다. 어려울 때 만났던 신앙의 동지들이기에 더욱 각별했습니다.

 

지금은 사는 곳이나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니 다시 한 마음이 됩니다. 물론, 얼굴이나 모습에 조금씩 연륜이 느껴집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연장자인 저의 외모가 가장 변했습니다. 그래도 “목사님과 사모님,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세요”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습니다. 4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나누고, 어떻게 참았는지 꼭꼭 싸매어 두었던 신앙과 인생의 질문을 풀어놓습니다. 쉽게 꺼내 놓기 힘든 얘기도 나눕니다. 그래서 옛 친구가 좋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 제목을 나누고 그 시절 주일예배 마지막에 불렀던 “사랑해요, 축복해요. 당신의 마음에 우리의 사랑을 드려요”라는 찬양을 손을 잡고 불렀습니다. 모두의 눈가가 촉촉이 젖었습니다.

 

재상봉 모임의 의미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흘렀어도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흐트러진 삶을 다시 조율(reset)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만 생각하면 안 되기에 그때 배웠던 신앙을 “씨앗” 삼아서 현재와 미래의 삶을 설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근사하게 살아가길 부탁했습니다.

 

2박3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만남의 기쁨을 만끽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시작된 만남이었기에 우리의 재상봉 모임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망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만남의 기쁨 역시 하나님의 은혜임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먼 훗날, 현재 제가 섬기는 교회의 교우들과도 재상봉 모임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날을 위해서 더욱더 진실하게 목회해야겠습니다. (2019년 7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전도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올해 성경 통독은

구약성경 전도서에 와 있습니다.

 

전도서는 구약성경의 성문서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아가서)에 속하고,

전통적으로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말씀이라고 전해집니다.

 

전도서라는 명칭은 1장 1절의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에서 왔습니다.

전도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코헬렛(Qoheleth)”인데

“모임”이라는 뜻도 있기에 혹자는 “집회서”라고 부릅니다.

전도서의 영어표현 “에클레시아스테스(Ecclesiastes)”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처럼 전도서라는 표현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솔로몬 왕의 설교를 듣거나,

훗날 백성들이 모여서 솔로몬으로부터 전해진

지혜의 말씀을 듣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2.

전도서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하벨 하발림/ 하벨 하발림/하콜 하벨”입니다.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벨”의 문자적 의미는

“수증기, 안개, 한숨, 가치 없음, 헛됨”입니다.

부귀영화를 모두 누린 솔로몬이 노년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친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헛되다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제로(0)”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30:8)라는

아굴의 잠언을 떠올리면 전도서의 주제가  쉽게 이해됩니다.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을 등질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전도서가 알려주는 삶의 지혜입니다.

 

3.

이번 주 성경 통독에 해당하는 전도서 6장에도

흥미로운 구절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이 부와 재산과 명예를 다 얻었는데

당사자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깁니다.

그러니 세상일에 지나치게 집착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식욕을 채울 수 없습니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욕심이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언과 마찬가지로 언어 습관도 지적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빈말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4.

전도서는 우리에게 삶의 여유를 줍니다.

집착하던 것을 내려놓게 합니다.

 

훗날을 위해서 아등바등 살기보다

<지금 여기>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 감사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7월도 훌쩍 지났습니다.

 

전도서 말씀을 기억하면

시간은 빠르게 지나는데 이룬 것이 없다고

행여나 초조해질 것도 아닙니다.

 

참빛 식구들 모두 잘 살고 계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portion)을 누리고

범사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도서 7:29)

See, this alone I found, that God made man upright,

but they have sought out many schemes. (Eccl 7:29)

 

하나님 아버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신 복을 마음껏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25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3)

다윗을 찾아내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흙을 빚어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처음 두 장의 창조에서 하나님은 “보기 좋았더라”고 연거푸 감탄하셨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이기에 정성을 기울이셨고 그에 비례해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손으로 빚어 만드신 걸작품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어서 생명을 얻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 무화과나무로 수치를 가린 아담과 이브에게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습니다. 자신을 거역하고 자신의 자리를 넘보았던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과 상관없이 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 처음에는 왕이 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수줍어하던 사울이지만,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하나님보다 자신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이 그에게 들어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보내십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장면입니다. 이새는 물론 그의 아들을 먼저 정결하게 하고 주님 앞에 서길 부탁했습니다.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은 키도 크고 용모도 훌륭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상과 달리 엘리압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아비나답과 셋째 삼마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아닙니다. 이렇게 이새의 일곱 아들을 인터뷰했지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새에게는 막내아들 다윗이 있었습니다. 이새가 다윗을 부르지  않은 것을 보면 다윗은 말 그대로 “꼴찌”였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보겠답니다. 다윗은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운 소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왕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윗 형제들의 서열도 고려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막내인 다윗을 찾아내셨고 그를 왕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새의 가족들이 하찮게 여기는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니라 막내를 택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돌보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찾아서 돌보시고, 행여나 작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도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들어 쓰십니다. 작은 것까지 챙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꼭 만나기 원합니다. -河-

돌봄 2

좋은 아침입니다.

 

1.

<돌보는 교회>라는 올해 교회 표어에 맞춰서

다시 한번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1월에는 “우리의 돌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면

이번 달에는 “하나님의 돌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돌봄을 실천하면 자칫 지치기 쉽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돌봄을 경험하고 그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돌봄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바탕으로

용서의 길을 가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

지난 1월 목요 서신에서 나눴던

헨리 나우웬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 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다. (돌봄의 영성, 46-47쪽)

 

돌봄이 쉽지 않아서 때로는 대충 넘어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헨리 나우웬은 신앙이 식었다는 표시라고 일러줍니다.

 

3.

7월 한 달 동안

하나님의 돌봄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 긍휼(compassion), 돌보심을

아주 깊이 경험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세심하고, 무조건적이고 때로는 예상을 뒤엎는지

몸소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따로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합니다.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더없이 좋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고 작은 돌보심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힘과 은혜로 돌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의 돌봄을 말씀드리면서 외로워 보이거나, 힘들어 보이시는

참빛 식구들을 챙기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서로 세심하게 챙기고 실제로 돌보는 참빛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 (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Psalms 6:36)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가 돌봄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7.18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돌봄 (2)

가죽옷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임합니다. 은혜에 “선물”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이유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자신의 의지가 작동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그런데 믿고 난 다음에 돌아보면,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길을 가는 여정이 모두 은혜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셨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방문과 초청에 “아멘”으로 응답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셨기에 예정이라는 용어도 사용하고, 우리 삶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의미에서 “섭리”라는 말도 사용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은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돌보는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각이나 삶의 중심을 나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돌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돌봄의 최종 목적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롬12:1) 것입니다. 그 길을 감사와 기쁨으로 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심지어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고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이러한 본성을 통제하고 뛰어넘게 만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없이 어느 때나 작동합니다.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그런데 막상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서로의 허물과 수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살려니 세상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왔습니다. 수치, 즉 부끄러움은 양심에 가책을 받거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그릇 행했을 때 밀려오는 감정입니다.

 

옆에 있던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서 몸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하는 일이 결국 그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이들을 쫓아내시면서 가죽옷을 손수 지어서 입히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수치를 가려 주시고, 결국에는 이들을 다시 에덴으로 부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돌봄은 우리의 연약하고 심지어 거역한 모습 가운데도 임합니다. 자신의 형상대로 정성껏 빚으신 인간을 끝까지 돌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가 살아감을 감사하고 주님의 돌보심을 깊이 경험하는 한 주간 되기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