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빌립보에 이어서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인 데살로니가에  바울이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멋지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머물면서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약성경 가운데 매우 이른 주후 51-52년경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핍박으로 서둘러 데살로니가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의 씨가 데살로니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귀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경건한 사람들과 헬라의 귀부인들, 핍박을 무릅쓰고 바울을 맞이했던 야손과 같은 성도들의 섬김과 희생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멋지게 자랐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에 대한 소문이 인근 지역까지 퍼질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믿음에 대해서 감사하고 칭찬합니다. 더욱더 하나님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부탁합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이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도 알려줍니다.

 

5장밖에 되지 않지만, 데살로니가전서에는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이 넘칩니다. 제국의 도시 한 가운데서 영적 싸움을 벌이는 데살로니가 교회가 염려되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말씀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책망할 것도 별로 없고,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을 조심하라는 말도 없고, 감사와 기도 그리고 칭찬이 데살로니가전서 말씀의 특징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여느 바울서신처럼 일반적인 편지 양식을 따릅니다. 인사말에서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그리고 은혜와 평강으로 문안합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가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로 구성된 교회가 편지를 받는 수신인입니다.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편지요 말씀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이 보내는 편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사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감사했습니다. 의례적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다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진정성있게 하나님의 교회로 자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와 참빛 식구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때마다, 감사할 것이 많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세상속의 기독교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 1974년에 열렸던 엑스폴로74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최대 백만이 넘는 인파가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만 명이 철야기도를 했고, 정부는 집회 기간 동안 여의도 일대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였습니다. 체신부에서는 기념 우표를 발행하는 등 기독교가 주관한 전도 부흥 집회가 온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지원 속에 말 그대로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나면서 세상이 많이 변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되고 세속화로 불리는 세상의 가치관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가는 후기 기독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이미 60년대부터 기독교가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다원주의 사회에 돌입했습니다. 대학촌에서 목회할 때, 캠퍼스에서 종교활동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행여나 캠퍼스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피켓을 들고 외친다면 누군가 고발해서 금세 경찰이 출동할 기세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종종 기독교가 세상을 주도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서울의 한 대형 교회는 공공도로 밑에 성전을 건축했다가 최근 대법원으로부터 불법 판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공공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단 총회가 부자 세습을 인정해주기로 결의한 것을 일반 언론까지 앞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예전 같으면, 일반 언론이 종교 문제 다루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교회나 종교를 일종의 성역으로 대우해 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특집 보도까지 만들어서 교회의 잘못된 관행을 세상에 알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변화한 세상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동화 속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하고 뒤로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신뢰를 잃을 것입니다. 세상을 올바로 읽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에 욕심까지 더한다면 교회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할 것입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세상을 탓할 것도 아니고 무작정 세상을 등질 것도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대하는 자세를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첫째는, 이의 없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이 제공하는 문명의 이기와 삶의 방식을 따라 삽니다. 스마트 폰을 사용하고, 자율 자동차가 나온다면 편하게 운전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신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것들을 변혁, 또는 용도 변경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문화 안에서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창조성이 요청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합한 복음을 제시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은 세상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최근 유행인 인공지능(AI)이나 드론이 폭력과 테러에 사용된다면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 악에 저항하고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믿으면 교회 안에서야 편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서 외면당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가 요청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죄 많은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능력도 구합니다. 개인의 신앙을 넘어서 우리의 신앙을 공적인 영역까지 확대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부탁을 마음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 5장 16절).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고 외쳤던 45년 전의 구호가 현실이 되는 ‘새로운’ 부흥을 소망합니다. (2019년 10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브엘세바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이-메일 서신에서는

조금 앞서가서 야곱과 요셉의 만남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은 뒤로 돌아가서 야곱이 브엘세바에 잠시 머무는 말씀을 살펴봅니다.

 

브엘세바는 “일곱 개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셰바”에 숫자 7과 맹세라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터를 잡고

야곱도 이곳에서 자랐을 테니 고향과 다름없는 곳입니다.

고향과 다름이 없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고향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이

원주민의 왕인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수양버들과 같은 에셀나무(옮겨 심고 가꿔야 하는 나무라고 식물에 대한 설교에서 배웠음)

아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삭 역시 아비멜렉과 그의 부하들에게 쫓겨 다녔습니다.

우물만 파면 그들이 와서 차지했습니다.

이삭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이 있던 브엘세바로 올라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어서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고 브엘세바에 머물렀습니다.

 

2.

브엘세바는 야곱이 살던 헤브론에서 남쪽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던 야곱이

브엘세바에 들려서 밤을 지냅니다.

 

아들 요셉이 총리가 되어서

가족 초청 이민으로 이집트로 가는 중이지만,

야곱의 마음은 무척 착잡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집트에 내려가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정도로 혼이 났다는 얘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 자신이

가족을 모두 데리고 그 이집트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조국을 떠나서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야곱의 마음이 십분 이해됩니다.

 

3.

야곱도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처럼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간절히 기도했겠지요. 주님의 뜻도 물었을 것입니다.

 

어느덧 130세가 되었으니 젊었을 때 야곱이 아닙니다.

벧엘에서 돌 베개를 하룻밤을 보냈던 것이나,

얍복 강가의 씨름도 이제 불가능합니다.

힘이 다 빠졌습니다. 민첩함도 상실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뿐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창 46:3-4)

 

이집트로 향하는 야곱에게 꼭 맞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가겠고 (창46:4)

I myself to down with you to Egypt (Gen 46:4)

는 말씀이 야곱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야곱만 내려가고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서 기다리시는 것도 아니고

야곱에게 내려가지 말라고 말리시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야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 가시겠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 일행을 이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야곱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것입니다.

 

4.

우리의 삶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헷갈리고 불안합니다.

 

그때, 야곱이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도 듣기 원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이집트)으로 내려가겠고 (창46:4)

I myself to down with you to Egypt (Gen 46:4)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주어진 인생길을 담대하게 걸어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빛 식구들과 함께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0.24 이-메일 목회 서신)

 

 

데살로니가 전서 (1)

데살로니가 교회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였던 데살로니가는 매우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주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이었던 카샌더(Cassander)가 세웠는데, 카샌더는 자신의 아내이자 알렉산더대왕의 이복동생 이름을 따서 그곳을 데살로니가라고 불렀습니다. 주전 167년에 로마가 데살로니가를 점령하면서 마케도니아 지방의 수도로 발전했습니다. 훗날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를 지지한 덕분에 “자유도시 (free city)”로 지정되면서 정치 경제는 물론 군사 종교까지 자치적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할 당시에 인구가 10만에 육박했고 아테네에 이어서 두 번째로 큰 그리스 도시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천혜의 항구도시였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심에 위치하였기에 무역과 군사의 요충지로 발달했습니다. 멜레티우스라는 사람은 “자연이 변화되지 않는 한 데살로니가는 부와 행운을 잃지 않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자유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시민들로 구성된 공회 (citizen assembly)가 있었고, 다섯 명의 최고 집정관으로 구성된 행정관들이 다스렸습니다. 본문에 “읍장”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집정관 가운데 한 명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는 로마제국과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추방했던 로마와 달리 유대인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회당에서 종교활동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습니다. 빌립보에 교회를 세운 바울 일행은(디모데와 실라) 빌립보에서 90마일 떨어져 있는 데살로니가에 도착했고, 유대인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세 번 성경을 강론하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구약을 근거로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행 17:2-3).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그리스도)가 곧 예수님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던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듣고 유대교로 개종해서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인데,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다시 한번 기독교로 개종한 것입니다(행 17:4).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해서 바울이 머무르던 야손의 집에 쳐들어옵니다. 다행히도 바울 일행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야손과 형제들을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바울 일행이 로마 황제 숭배가 아닌 예수님을 섬기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읍장도 깜짝 놀랐지만, 바울 일행이 도시를 떠났다고 생각하고 보석금을 받고 야손을 풀어 줍니다.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가 교회도 우여곡절 끝에 세워졌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펴보게 되듯이 매우 모범적으로 자라갔습니다. 할렐루야 -河-

수요예배에서는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를 1년 가까이 읽고 있습니다.

어제 46장까지 읽었으니 앞으로 한 달이면 창세기를 마칩니다.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은

 

1) 창세기 전체에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극심한 가뭄에도 요셉을 미리 이집트로 보내셔서

아브라함 후손의 생존을 보호하셨음을 알려줍니다.

 

2) 이어지는 출애굽기와 연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가서 살게 된 경위를 알려줍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에 관한 말씀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잇는 다리입니다.

 

3) 요셉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제국 이집트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능성을 제시하고

요셉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확신시켜 줍니다.

 

2.

그동안 주일예배에서 살펴보았던

탕자의 비유는 집을 나갔던 아들을 아버지가 맞아주는 말씀이었는데,

요셉에 관한 말씀은 가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는 아버지와 가족을

요셉(아들)이 맞아주었습니다.

 

하지만,

탕자의 비유와 요셉의 말씀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것은

용서와 화해,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모두 없앤 둘째 아들을 용서했고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에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빈털터리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안아주고, 입을 맞추며 울었습니다.

요셉은

먹을 것이 없어서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안고 입을 맞추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초청으로 이집트에 온 아버지 야곱을 만났을 때

요셉은 아버지와 목을 어긋 맞추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허랑방탕 모든 재산을 없앤 실패자 둘째 아들이나

이집트에 팔려와서 소위 성공한 요셉이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울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품이 그렇게 좋습니다.

잘못해서 돌아온 탕자나

최고의 인생을 사는 요셉이나 똑같이 아버지 품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울 수 있다면 행복한 아들입니다.

 

3.

우리도 살면서

아버지 품에 안겨서 한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긴장을 풀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흐느껴 울고 싶을 때입니다.

 

우리 예배가 그러길 바랍니다.

참빛 식구들의 골방 기도 시간도 아버지 품이길 원합니다.

아니, 설거지하든지 쉼을 갖든지 일을 하든지

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그 순간”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느끼는 귀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맛보아 아는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34:8-9)

Oh,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Oh, fear the LORD, you his saints,

for those who fear him have no lack! (Psalms 34:8-9, ESV)

 

하나님 아버지

주를 찾는 참빛 식구들을

꼭 만나 주시고 안아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0.17 이-메일 목회 서신)

 

 

 

 

 

 

탕자의 비유 (7)

아버지 하나님

 

탕자의 비유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여러 가지 색깔을 띠듯이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특징이 있었고, 그들의 말과 행동도 특별했습니다.

 

읽는 관점에 따라서 둘째 아들뿐 아니라 첫째도 탕자이기에 “탕자인 두 아들의 비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잃은 양과 잃은 은전의 비유에 맞춰서 “잃은 두 아들의 비유”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만 탕자가 아니라,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던 큰아들도 탕자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에게 큰아들의 모습이 많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서 집을 떠나고 먼 나라에 가서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둘째 아들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둘째 아들처럼 실제로 망가지지 않지만, 큰 아들이 갖고 있던 시기, 질투, 미움, 불만과 원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동생을 향한 경쟁의식과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교만과 자기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처사에 대한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큰아들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섬겼는데 자기에게 돌아온 몫이 적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보다 망나니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여 주시고 더 잘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오는 섭섭함입니다. 큰아들처럼 집밖에서 화를 내지는 않아도 마음속에 갖고 있는 신앙의 회의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둘째 아들과 큰아들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없애고 집에 돌아온 둘째를  뛰어나가서 맞아 주었습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자신에게 불만을 갖고 집밖에서 화를 내는 큰 아들에게도 찾아와서 “아들아”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큰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함께한 것을 알려하셨고, 아버지의 것이 모두 큰아들의 것이라고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자상하고 세심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탕자의 비유는 “사랑 많은 아버지의 비유”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길 원했습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집으로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고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화를 내는 큰아들에게 찾아와서 곁에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고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감히 아버지를 닮기 원합니다. 비유 속의 아버지를 온전히 닮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맞아 주는 넓은 마음,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진정한 사랑, 먼저 다가가서 위로하고 화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탕자의 비유 설교가 오늘로 마무리되지만, 함께 나눴던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 메아리치길 원합니다.-河-

프레드 로저스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비싼 생활비가 문제인데

정말 좋은 동네라면 그 정도의 비용을 지불해야겠지요.

 

이 말은 우리 동네의 청명한 날씨와

사시사철 변함없는 기온,

온 세계의 정보가 모이는 기회의 땅임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좋은 동네는

사람이 좋아야 합니다.

 

이웃이 좋으면 힘겨운 날도 아름다운 날로 변합니다.

이웃과 교제하면서 힘을 얻고, 도전받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우리 동네가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좋은 이웃들로 가득한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2.

“우리 동네, 아름다운 날에 (A beautiful day in our neighborhood)”라는

영화가 다음 달 미국에서 개봉합니다.

 

1968년부터 2001년까지

“로저스 아저씨의 마을/Mr. Rogers neighborhood”이라는

유치원 아이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프레드 로저스(Fred Rogers)에 관한 영화입니다.

톰 행크스가 로저스 역을 맡았습니다.

 

프레드 로저스는

느릿한 말투, 깔끔한 머리 스타일, 빨간 스웨터를 입은

친절하고 자상한 이웃집 아저씨였습니다.

 

음악을 전공했기에 프로그램에서 자작곡 노래를 즐겨 불렀고

운동화 끈을 매는 방법부터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나

시대의 이슈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소개했습니다.

 

워낙 오랫동안 공영방송(PBS)에서 활동했기에

대부분의 성인이 로저스와 함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가 만약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저와 아이들이 각각 로저스 쇼를 보며 자란 특별한 세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는 장로교 목사였는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가 아닌 방송국에 진출해서

어린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 가운데 음악가가 없는데도

텔레비전을 보고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텔레비전의 추악한 장면을 그대로 따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에게 끼치는 TV의 영향력을 실감했고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사명(calling)을 갖게 되었습니다.

 

목사였지만,

텔레비전 진행자로 더 귀한 목회를 하신 분입니다.

흠이 없을 정도로 귀감이 되셨습니다.

깨끗한 인상 그대로 한결같은 인생과 신앙의 여정을 걸어가셨습니다.

 

3.

프레드 로저스(1968-2001)가 텔레비전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 듯이

우리 아이들 세대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리스도인으로/어른으로 아이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분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그가 예수님은 아니고 예수님이 될 수 없지만,

자신의 영역에서

예수님처럼 살았다는 찬사를 들은 프레드 로저스!

 

우리 참빛 식구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예수님처럼 사시는 하루가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흠이 없고 순결해져서,

구부러지고 뒤틀린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빌 2:15, 새번역)

that you may be blameless and innocent, children of God without blemish in the midst of a crooked and twisted generation, among whom you shine as lights in the world (Phil 2:15, ESV)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참빛 식구들이 별처럼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10.10 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