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홀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아침,

블랙홀 사진이 최초로 공개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가운데는 검은색이었습니다.

정확한 원은 아니지만, 빛으로 둘러 쌓여 있고

밑에는 빛 광선 두 개가 호수처럼 위치했습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았던 블랙홀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시간까지 빨아들여서 블랙홀과 우주를 여행하고 온 우주인들이 지구에 돌아왔을 때

지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할머니가 된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말로만 듣던 블랙홀을 실제로 보게 된 것입니다.

저처럼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마음이 설레었는데

과학자들은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2.

기사를 보면서 그저 신기했습니다.

지구만한 망원경을 조합해서 관측했다는 사실,

망원경의 성능이 달 표면에 놓인 오렌지를 자세히 관찰할 정도라는 것,

블랙홀이 지구로부터 55억 광년 떨어져 있다는 것 등등

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기사를 검색하면서

엉뚱해 보일 수 있지만 몇 가지 “개인적인” 생각이 스쳤습니다.

 

1) 실제 블랙홀 사진이 그동안 영화나 가상(시뮬레이션)으로 보았던 것보다

선명하지 않았고 솔직히 약간 시시해 보였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가짜는 화려하게 꾸미지만,

진품은 시시해 보여도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상이 실제보다 더 멋있고 화려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을 살다 보면 시시할 수 있는데,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것이 일상의 신앙입니다.

 

2) 블랙홀 망원경 이름이 블랙홀의 경계선을 뜻하는 <사건 지평/Event Horizon>이었는데

망원경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우리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We have seen what we thought was unseeable.”

 

제가 목사여서 그런지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Heb 11:1)

 

블랙홀이 신비에 그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사진으로  확인했듯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들,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증거가 되는 날이 올 것도 믿습니다.

블랙홀 사진에 비할 데 없는 신비, 경탄, 경외, 그리고 찬양의 순간이 우리 앞에 있음을 믿습니다.

 

3) 무엇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블랙홀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높고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이 얼마나 넓고 영원한 지 다시금 깨닫습니다.

인터스텔라 영화에서 5차원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하고도 남겠지요.

 

3.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는 고난주간이고 곧 부활절을 맞습니다.

 

부활의 신비를 우리 눈으로 보고 경험할 때가 올 것입니다.

기대를 갖고 부활절을 맞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귀하게 간직하기 원합니다.

 

현대 과학에 비하면 너무 순수해 보이지만

당시로써는 최고의 과학적 지식을 동원해서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백했던 시편 기자가 생각납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When I look at your heavens, the work of your fingers, the moon and the stars, which you have set in place,

what is man that you are mindful of him, and the son of man that you care for him? (Psalms 8:3-4)

 

하나님 아버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11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의 식물들 (7): 무화과 나무

4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올해 부활절은 늦어서 이번 달 셋째 주일에 맞습니다. 사순절도 마지막 주를 맞고 있는데, 말씀과 기도, 사랑과 구제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균형입니다. 성경의 식물에 대한 말씀도 부활절을 맞춰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식물이 무화과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들이 벌거벗었음을 발견했을 때,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여기서 혹자는 선악과에 가장 근접한 지상의 나무를 찾는다면 무화과나무일 것으로 봅니다. 가장 가까운 나뭇잎으로 몸을 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측입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세상의 종말을 말씀하실 때, 무화과나무 열매를 보고 종말이 왔음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봄에 잎이 나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무화과를 보면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직감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은 가을에 새해를 시작했기에 여름은 마지막 절기였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무화과 나무를 종말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니 나무가 뿌리까지 말랐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후에 장터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겉은 화려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열매를 찾아볼 수 없었던 당시의 종교를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무화과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무화과를 찾으신 것이 어려운데, 언제든지 열매 맺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함을 뜻할 수 있습니다. 수확 때가 오기 전에 잎만 무성한 것을 회개의 기회로 삼으라는 경고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봄철에 “파게”라고 불리는 처음 무화과 열매가 열린답니다. 맛은 없지만 겨울철을 간신히 보낸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식이 되곤 했는데 예수님께서 처음 무화과 파게를 찾으셨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이든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는 위선과 형식에 치우쳤던 당시의 종교를 가리킵니다.

 

이 밖에도 성경에는 무화과나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히스기야는 무화과 잎으로 즙을 만들어 상처에 붙이니 병이 나았습니다. 백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는 포도와 함께 꼭 필요한 양식이었습니다. 따라서 밭에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고 소출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영역이 발견되면 내실을 기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지내시기 원합니다.-河-

변덕쟁이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는 만우절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만우절만 기다린 적도 있고

만우절에 친구들을 속여먹는 재미가 솔솔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동심(童心)이 점점 잊혀집니다.

 

만우절은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날입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에게 얼른 만우절임과 진실이 아님을 알려야 합니다.

만우절을 잘못 대했다가 곤욕을 치르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2.

만우절을 보내면서 구약성경 요나서를 생각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을 보낼 정도로 혼이 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당시 제국인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에 갔습니다.

 

요나는 하루 종일 니느웨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선포하라고 주신 말씀,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요나의 말을 들은 니느웨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높은 사람부터 낮은 사람까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를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도 임금의 옷 대신 굵은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행실의 변화가 동반된 진정한 회개였습니다.

짐승들까지 회개에 동참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요나 3:8-9)

 

죄를 지은 백성에게 벌을 주는 것이 공의입니다.

한번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신실입니다.

게다가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 제국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다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신 것은

용어가 적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변덕쟁이”처럼 보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설마” “혹시나”하면서 회개했는데

그들의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한 것을 본 요나는 매우 못마땅해 합니다.

만우절도 아닌데 왜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니느웨 사람들도 중요했습니다.

 

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완고하고 융통성도 없이 꽉 막힌 분”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때로 변덕쟁이로 돌변하십니다.

–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때입니다.

우리가 불쌍해 보이면 가던 길도 돌이켜서 우리를 도우실 분입니다.

– 우리가 회개할 때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처럼 죄를 뉘우치고 바른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심판도 철회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합시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를 위로하시고, 무작정 사랑하시고,

자식을 위해서 뜻을 돌이키시는 주님의 마음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103편 13-14)

As a father shows compassion to his children, so the LORD shows compassion to those who fear him.

For he knows our frame; he remembers that we are dust. (Psalms 103:13-14)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꼭 기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4. 4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의 식물들 (6): 에셀나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의 배경을 담당하는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있습니다. 식물들은 자연 만물에 섞여서 저절로 자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생명체들입니다.

 

또한 어떤 식물은 사람에 의해서 경작되고 관리를 받습니다. 집에서 키우는 식물이 대표적입니다. 식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물을 주고, 햇볕이 잘 들어오는 곳으로 옮겨 주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자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정성껏 보호받고 사랑을 받으면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에셀 나무는 잎이 흐드러진 수양버들 나무에 속합니다. 잎과 줄기가 발달해서 그늘을 제공하는 멋진 나무입니다. “에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고 영어로는 Tamarisk tree라고 부르고, 우리말 번역은 “능수버들”정도가 됩니다. 봄철에 분홍색 꽃이 나무 전체를 덮으면 아름다움을 넘어서 우아한 느낌이 들 정도랍니다.

 

성경에서 에셀 나무는 세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이고, 나머지 두 번은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울도 에셀 나무를 좋아해서 그가 거하던 기브아에 옮겨다 심었고 에셀 나무 아래 앉아서 정사를 살피곤 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사람들은 그와 그의 아들을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지냈습니다. 사울이 무척 아끼던 나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남쪽 그랄이라는 곳에 내려가서 살던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그곳에 갈 때는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정착을 시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그랄왕 아비멜렉이 데려간 사라가 풀려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곧 약속의 자녀 이삭을 갖게 될 아브라함과 사라를 밀착해서 보호하고 계심을 봅니다.

 

그랄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을 빼앗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힘겨운 타향살이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그랄왕 아비메렉과 평화협정을 맺고 삶의 안정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랄에서의 삶을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에셀 나무를 심고 그 아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21:33). 이처럼 에셀 나무는 심고 가꾸는 나무입니다. 쉼을 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우리에게도 에셀나무가 있는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나무 그늘입니다. 편안히 쉬며 삶을 영위하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에셀 나무는 우리가 심고 가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이요 자기 돌봄입니다. 우리의 삶이 에셀나무 아래서 드리는 예배가 되기 원합니다.-河-

아몬드 나무

성경에는 수많은 식물이 등장합니다. 수백 년 또는 수천 년을 산다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나무부터 들에 피는 백합화, 가시덤불과 엉겅퀴까지 식물도감에 버금갈 정도입니다. 식물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에서 평생 자리를 지키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 옮겨 심지 않으면, 심지어 바위틈이나 계단 사이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지탱하면서 꽃을 피웁니다. 조변석개로 변하는 인간의 마음과 한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이리저리 방황하는 부평초와 같은 인간의 모습과 대조됩니다.

 

그런데 식물은 언제나 배경화면이지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식물 역시 비유에 동원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로 사용될 뿐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몬드 나무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몬드 나무를 살구나무라고 번역했는데 일종의 오역입니다. 영어 성경은 거의 아몬드 나무로 번역했습니다.

 

성경의 살구나무는 사과나무에 가깝고,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 <샤케드>는 아몬드 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감복숭아 나무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는데 우리가 미국에 살아서인지 아몬드 나무보다 훨씬 생소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몬드 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샤케드> 입니다. <샤케드>가 주목하고 지켜본다는 동사 <샤카드>와 비슷하고 때로는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아몬드 나무가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고라 일당이 땅이 갈라지면서 죽습니다. 그 사건으로 백성들이 모세에게 책임을 묻자 하나님께서 열두지파에서 각각 지팡이를 가져와서 언약궤 앞에 놓도록 하셨습니다. 이튿날 보니, 열두 지파의 지팡이 가운데서 아론의 지팡이에 아몬드꽃과 열매가 맺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자신이 세운 제사장으로 주목하고 계신다는 표시였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소에는 언제나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등불을 받치는 등대 발판에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예배하는 주의 백성들을 주목하고 지켜 보신다는 뜻으로 아몬드꽃 무늬를 새겼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에게 두 가지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몬드 나무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느냐고 물으시니 예레미야가 아몬드 가지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몬드 나무 <샤케드>와 지켜본다는 <샤카드>를 동시에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성취될 것을 강조한 본문입니다. 이처럼 아몬드 나무 <샤케드>는 이름 때문에 성경의 중요한 대목에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에서 아몬드 나무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것을 예고하면서 1-2월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이랍니다. 그러니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아몬드 꽃이 피면 봄이 멀지 않았음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을 안전하게 <샤카드> 지켜 주셨기에 봄을 맞을 수 있었으니 <샤케드> 아몬드 꽃은 감사와 희망의 상징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연분홍색 아몬드 꽃이 만발하면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노년의 백발에 비유했답니다. 우리 식으로 벚꽃을 연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몬드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이어서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갈 때도 아몬드를 선물로 챙길 정도였습니다. 아몬드는 우리도 즐겨 먹는 견과류에 속합니다. 아몬드를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샤카드>지켜주시길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몬드 껍질은 고동색이지만 속은 하얗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서 우리의 내면이 아름답고 정결하기 원합니다.

 

우리 동네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지만, 이제는 베이 지역 특유의 화창한 날씨가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겨울 동안 우리를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이제 우리 마음과 삶에도 아몬드 꽃이 활짝 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 아몬드는 소망의 꽃입니다. 새날의 시작입니다. <샤케드> 아몬드를 통해서 <샤카드> 우리를 주목하시고,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기 원합니다.(2019년 3월 28일 SF한국일보 종교 칼럼)

사이프러스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에는 성경의 식물에 대해서

연속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식물이라고 했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식물이 너무 많기에

이번에는 성경 속의 나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나무도 많지만 열 가지만 골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빠진 나무들은 꽤 섭섭해 할 것 같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유명한 것이야 씩- 웃고 넘어가겠지만,

평소에도 주목받지 못했던 나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깝게 이번 연속 설교 리스트에 들지 못한 나무가

상록수인 사이프러스(Cypress)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잣나무”로 번역했고, 구약성경에 20회 이상 등장합니다.

 

사이프러스는

잎이 뾰족한 침엽수이고 솔방울과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 나무에 암/수 열매가 함께 열려서 쉽게 번식합니다.

송진이 나와서 나무를 보호해 줍니다.

 

천년 정도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물론 고대 근동에서 사이프러스는

“불멸(immortality)”을 상징해서, 묘지 등에 심곤 했답니다.

 

성경에서는 레바논의 백향목과 함께 성전 건축에 사용되었고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자연 만물에 등장하곤 합니다.

 

2.

사이프러스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본문이

호세아 14장 8절입니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O Ephraim, what have I to do with idols? It is I who answer and look after you.

I am like an evergreen cypress; from me comes your fruit.(Hosea 14:8).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푸른 잣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식물에 비유한 경우가 이곳 뿐인 것 같습니다.

 

사이프러스는 사시사철 푸른 상록수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잘 어울립니다.

사이프러스는 언제나 열매(솔방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래 사는 사이프러스의 특징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미지와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이프러스는

비나 햇볕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가지가 울창하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무 아래서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늘이 되시고 그들의 삶을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이프러스 같은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3.

세상을 살다 보면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무작정 찾아가서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사이프러스에 자신을 비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남은 한주

늘 푸른 잣나무처럼 한결같으신 우리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우리 역시 늘 푸른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원합니다.

 

사소한 일들, 지나가는 순간에 연연하기보다

천년을 사는 사이프러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라는 잣대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갖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새들이 그 속에 깃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시편 104:16-17)

The trees of the LORD are watered abundantly, the cedars of Lebanon that he planted.

In them the birds build their nests; the stork has her home in the fir trees.(Psalms 104:16-17)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늘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에 늘 푸른 상록수 신앙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3. 28이-메일 목회 서신)

성경의 식물들 (5): 여러 가지 나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달 보름에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9-10월입니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것을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입히고 먹이셨습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초막절에는 일주일 동안 나뭇잎 등으로 초막(텐트)를 짓고 지냈습니다. 초막절을 장막절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수장절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가을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처럼 초막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를 기념하는 유월절, 보리 추수를 감사하는 맥추절 (오순절)과 함께 구약시대의 3대 절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예루살렘 성을 다시 구축하고 남녀노소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모세의 율법을 읽고 말씀의 은혜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제사장이자 성경 학자였던 에스라가 앞에 서서 모세의 율법을 읽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 태어난 2세들을 위해서 통역을 하고, 말씀의 은혜를 경험한 백성들은 “아멘”으로 말씀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말씀을 통해서 위로받고 힘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슬퍼하는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고 알려주면서 축제를 선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넉넉한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는 공동체 축제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백성의 대표들이 에스라를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을 다시 읽었는데,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을 발견하고 백성들과 함께 초막절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초막절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산에 올라가서 초막을 지을 나뭇가지들을 갖고 옵니다. 여러 가지 나뭇가지가 사용되었습니다.

 

감람나무(올리브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나무 가운데 하나인데 평화의 상징입니다. 들감람나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는 기름을 짜는 나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겟세마네”라는 지명은 감람(올리브)유를 만드는 방앗간이라는 뜻입니다. 화석류나무(myrtle tree)는 향기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상록수입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 어느 곳이나 잘 자라는 대표적인 나무입니다. 잎이 넓고 커서 초막을 짓기에 적합했습니다. 기타 무성한 나무는 잎이 많고 줄기가 굵은 나무입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나무들이 초막 짓기에 동원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드린다는 표시였을 것입니다. 초막절에 쓰인 나무처럼 다양하게 펼쳐지는 우리의 인생과 신앙도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사용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