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창세기 29장을 공부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하란의 삼촌 집에 도착한 야곱은

삼촌 라반의 큰딸 레아, 작은딸 라헬을 아내로 맞습니다.

14년을 일해준 대가였습니다.

 

야곱은 원래 라헬을 사랑했지만

라반이 야곱을 속이고 큰딸 레아를 먼저 야곱에게 주면서

두 명의 아내를 갖게 된 것입니다.

 

레아는 야곱이 원했던 아내가 아니지요.

야곱은 라헬만 사랑했고 레아를 무시했습니다.

 

레아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야곱과 결혼했지만

남편 야곱의 사랑과 관심 밖에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그때, 하나님께서는 레아를 주목하시고

그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여섯을 낳게 하십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 유다,

거룩한 성직을 감당했던 레위도 레아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아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2.

창세기 29장 마지막에

레아가 낳은 네 명의 아들을 소개하면서

레아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여줍니다.

 

첫째 아들 이름이 “르우벤 (보라 아들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괴로움(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을 아셨으니

이제 남편이 자신을 사랑할 것이랍니다.

 

둘째의 이름이 “시므온(들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셋째는 “레위(연합)”인데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드디어 남편이 자신과 합칠 것이랍니다.

그래도 야곱은 매정하게 레아를 외면한 것 같습니다.

 

넷째 “유다(찬송함)”를 낳고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5절)며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돌립니다.

 

레아의 마음과 그의 외로움이 아들의 이름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아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요?

 

3.

하나님께서는

외롭고, 무엇보다 남편의 사랑에서 소외된 레아를

기억하셨고,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레아 역시 처음에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지만

유다를 낳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네 아들의 이름을 지어가면서

자신은 물론 하나님과 씨름했고

결국에는 남편의 사랑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수준에 오른 것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돌보는 교회>입니다.

연초에 표어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주일날 교회에 오면 외로워 보이거나 돌봄이 필요한 성도님들을 위해서

뒷전에서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6월 새달을 맞으면서 교회 표어도 되새기고

무엇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돌보기 원합니다.

그것이 레아를 돌보신 하나님 마음이겠지요.

 

때로는 우리 자신이 레아와 같은 심정일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레아를 챙기시고 돌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창 29:35)

This time I will praise the Lord (Gen 29:35)

 

레아를 돌보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주변에

돌봄이 필요한 분들과 꼭– 함께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30 이-메일 목회 서신)

2019 기도 (4)

받은 줄로 믿으라

 

기도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이 경우 기도하기가 어렵고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는, 기도해도 이뤄진 것이 없고 상황이 변하지 않으니 기도할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모두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응답되지 않은 기도를 욕심으로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선한 의도로 했지만,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도에 관해서 공부하고 마음을 먹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상황이 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솔직히 힘이 빠지고 기도하려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기도 응답의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기도가 꺼려진다면, 다시 한번 기도의 동기를 살펴보길 권합니다. 욕심이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응답되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뜻으로 기도했다면, 기도 응답이 지체되거나 하나님께서 다른 대안을 준비하고 계실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 생각만 고집하지 말고 상황을 두루 살피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기도를 맹신한 경우입니다. 기도만 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기도에 임합니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기도 속에 자신을 숨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도 역시 우리의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때가 많은데 기도만 하다가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기도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입장은 기도에 대한 바른 접근이 아닙니다. 양극단을 갖고 논쟁하는 것이 곧 “의심”이라고 했습니다. 의심없이 기도하는 것은 어느 한 가지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온전한 기도가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도하다가 지치는 경우는 기도 제목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기도한 것이 이뤄지는 것과 기도를 동일시합니다. 하나님을 자신을 만족시켜 주시는 대리인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모두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뜻대로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지체되거나, 다른 것으로 응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분별해 내는 것이 의심 없는 기도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도의 토대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산이 옮겨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는 말씀이 실제가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갖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기도합시다. 그 힘으로 세상을 살고 산을 옮기는 기도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河-

모비딕

1956년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영화 <모비 딕>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1820년 태평양 한가운데서 고래잡이 어선이 흰 향유고래에 받쳐서 침몰한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허먼 멜빌이 우리 말로 “백경(白鯨)”이라고도 불리는 장편 소설 <모비 딕>을 1851년에 출판했습니다. 얼핏 읽으면 고래에 대한 논문처럼 보일 만큼 내용이 생소해서 세간의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대서사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명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유명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모비 딕>은 인물과 주제에서 성경과 밀접합니다. 주인공이자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구약성경의 악명높은 아합왕의 이름입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내레이터 이슈마엘은 아브라함과 그의 종 하갈 사이에서 낳은 이스마엘에서 왔습니다. 훗날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모녀를 살려 주시는데, 소설 속의 이슈마엘도 피쿼드호의 유일한 생존자로 사건을 세상에 알립니다. 피쿼드호가 침몰할 것을 예고한 사람은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와 동명이인입니다. 이 밖에도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주인 이름이 구약성경 욥의 친구 빌닷입니다.

 

소설에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신비로울 정도로 힘이 센 흰고래가 욥기의 레비아단을 연상시키고, 한 편에서는 선지자 요나를 삼켰던 바다의 큰 물고기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모비 딕> 초반부에 메이플이라는 신부가 요나서를 갖고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요나서의 큰 물고기를 아예 고래라고 지칭합니다.

 

물론 성경의 인물과 주제만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선원들, 인종과 민족이 다른 선원들 등 나이와 출신성분이 다양합니다. 고래잡이 어선인 피쿼드호가 바람 한 점 없는 적도에 멈춘 적이 있는데, 선원들 간의 경쟁과 갈등, 권력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다 보니 작품에 대한 감상평이 극과 극을 달리는 등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향유고래에 대한 견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향유고래를 악의 상징으로 보았고 선장 에이합을 악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선장을 구약시대 아합처럼 악한 인물로, 흰색의 향유고래를 선으로 보면서 향유고래가 에이합 선장은 물론 피쿼드호를 침몰시킨 것을 선의 승리로 봅니다.

 

저는 <모비 딕> 영화를 보고 소설을 떠올리면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피쿼드호를 연상케 합니다. 몸에 여러 개의 창이 박혀 있지만 힘차게 대양을 헤엄치는   향유고래의 모습 속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봅니다. 저는 소설 속의 향유고래가 선을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자신의 한쪽 발을 앗아간 고래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 있습니다. 처음부터 고래 사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고래를 찾아서 복수하려는 생각뿐입니다. 급기야 자신이 찾던 고래를 만났지만 고래등에 줄이 걸려서 생명을 잃습니다. 고래잡이 어선도 고래에 받혀서 침몰합니다. 선장 한 사람의 지나친 집착이 낳은 참사입니다.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집요하고 통쾌한 복수를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구약의 율법에는 맞을 수 있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허먼 멜빌이 그의 소설에서 구약의 인물들만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우연히 옛날 영화 <모비 딕>을 보면서 신앙과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은 금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도리어 자신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신 분복(分福)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살기 원합니다.(2019년 5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갚아줌

좋은 아침입니다.

 

1.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두침침한 것만은 아닙니다.

 

밝은 면보다 어두운 곳이 먼저 눈에 띄고

감사할 것보다 불평할 것이 먼저 생각나고

믿음으로 살기보다 염려와 근심이 앞서기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빛이 되어서 세상을 밝히고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맑게 만드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번주에도

흐뭇한 소식이 있었습니다.

 

남부 조지아 주에 있는

모어 하우스 칼리지 졸업식에서

졸업식 축사를 하던 로버트 스미스라는 기업가가

4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의 학자금 빚을 모두 갚아주겠다(wipe-out)고 약속한 것입니다.

 

4천만 달러 정도가 필요한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사회에 지은 빚을

갚는 심정으로 기꺼이 기부하겠답니다.

 

150년 역사를 가진 모어 하우스 칼리지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중에서도 남자만 다니는 명문 대학입니다.

지미 카터, 오바마 전 대통령도 이곳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고

오프라 윈프리가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한 곳입니다.

 

어제 한국일보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발레호에 사는 모어 하우스 한 졸업생이 갖고 있던

16만불의 빚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는 홀가분하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고 기뻐했습니다.

 

모든 빚은 우리를 옥죕니다

삶을 힘겹게 만들고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 그 빚을 누군가 대신 갚아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복음(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2.

성경에서 “구속(redemption)”이라는 말도

누군가 대신 빚을 갚아준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 룻기에서

나오미와 룻이 지은 빚을

보아스가 대신 갚아주고 룻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도

어떤 사람이 빚을 져서 행여나 노예로 팔려 가거나

삶의 터전을 잃을 것 같으면

여유가 있는 가까운 친척이 그의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을 추천합니다.

 

구속의 절정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빚을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셨으니

그 구속의 은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3.

엊그제 빚을 갚아주겠다고 약속한 기업가는

은혜를 입은 학생들도

나중에 같은 일(pay it forward)을 했으면 좋겠다고 당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엄청난 빚을 갚아 주셨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요?

눈에 보이지 않고 실제로 계산이 되지 않는다고

받은 은혜를 너무 무시하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됨으로 그 은혜를 갚고

어려운 이웃들, 복음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은혜를 전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and are justified by his grace as a gift, through the redemption that is in Christ Jesus(Rom 3:24)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깊이 되새기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23 이-메일 목회 서신)

2019 기도 (3)

– 기도의 장애물: 욕심과 의심

 

기도를 가로막는 것이 여럿 있습니다. 욕심으로 기도하면 안 됩니다. 욕심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는 속셈이기에 기도의 바른 동기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야고보1:15). 죄도 기도의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우선 죄는 기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로막기에 기도를 넘어서 신앙에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살피고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의심도 기도에 장애물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디아크리노>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능동형으로 쓰이면 “분별하다”가 됩니다. 여러모로 살펴서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6장 3절에서 우리가 날씨를 분별하듯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분별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동형으로 쓰이면 단어의 의미가 더 복잡해 집니다. 모든 것을 살핀 후에 결론에 도달하거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논쟁을 하면서 다투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보고하니 예루살렘의 유대계 기독교인들은 인정하지 않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행11:2). 서로 차별하고 판단하는 것도 여기에 속합니다(약2:4).

 

하지만 헬라어 <디아크리노>가 본문에서는 의심하다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확신을 갖지 못해서 판단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모두 생각하다가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도리어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어중간한 상태를 취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6절에서 의심하는 자를 가리킬 때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서 요동하는 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니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을 믿는 것, 산을 옮기는 기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산을 옮기시는 것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기도를 위해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심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믿음의 반대말이 의심인 셈입니다.

 

산이 옮겨질 것을 의심하거나 또는 기도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고 의심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믿을 것도 아닙니다. 어떤 것이 욕심이며 어떤 기도가 하나님 뜻에 맞는지 분별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살피다가 갈팡질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 하길 원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터를 넓고 깊게 잡고 신앙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河-

터진 웅덩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에는

산을 옮기는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믿음과 기도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면 최고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산을 옮기는 사람 (mountain-mover)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산을 옮기는 기도가 쉽지 않습니다.

가끔 있을 수 있지만, 매번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어서

때로는 신앙생활이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기도 제목에 연연하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살 수 있고

하박국 선지자처럼 기뻐하면서

주님이 우리의 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박국 3:18-19).

 

단숨에 여기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실천하고 의도적으로 훈련하고

그 과정에서 실패와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참 신앙의 여정에 들어서고 그 길을 걷는 것이지요.

 

2.

요즘 아침마다

예레미야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엊그제 나눈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두 가지 죄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샘)인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 생명이 있는데, 다른 신들과 가치관을 쫓아갔습니다.

생명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을 추구했습니다.

 

둘째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밑이 터진 웅덩이를 판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물을 파는 것은

일종의 스타트 업을 세우는 일과 같고 노동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스스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횡재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노력한 대가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밑이 빠진 웅덩이였습니다.

물이 모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갑니다. 헛수고한 것입니다.

 

3.

저희 집에 화장실 하나가 고장 났습니다.

고무마개가 헐거워져서 물이 계속 세니

주인이 물을 많이 쓴다고 야단을 칩니다.

졸졸 새는 물인데도 막아 놓지 않으니 물값이 제법 나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아예 사용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큰마음을 먹고 고치기로 했습니다.

워낙 오래된 모델이니

Lowe’s에 가서 모든 종류의 마개를 사서 시험해 보았습니다.

다행히 한 개가 정확히 맞아서 성공적으로 고쳤습니다.

얼마나 개운한지요!

 

산을 옮기는 기도와 믿음을 배웠지만

우리 삶 한편에 졸졸 새버리는 틈새는 없는지요?

행여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물을 간직하지 못하는 우물은 아닐지요?

 

생수의 근원,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삶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산을 옮기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 2:13)

for my people have committed two evils:

they have forsaken me, the fountain of living waters, and hewed out cisterns for themselves,

broken cisterns that can hold no water.(Jer 2:13)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주님 안에서

열매 맺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5. 16이-메일 목회 서신)

2019 기도 (2)

– 산을 옮기는 기도

 

기도는 혼자 말하는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대화는 일방적이면 안되고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일방적으로 우리의 소원만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헤아려야 합니다.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닫는 하나님의 뜻(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듣고 싶어 하시는 기도를 준비한다면 멋진 하나님의 자녀임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참되고 선한 주님의 백성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부요하고 평안하길 원하십니다. 세상을 밝히는 빛과 세상을 맑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제사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각자의 처지에 맞게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기도의 시작은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했음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오고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처럼 더 이상 소용이 없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 백성이 기도하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사가 기도로 승화되었습니다.

 

본문에서 기도할 때 산이 옮겨져서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도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연관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한 올리브(감람)산이 저 멀리 있는 바다에 던져질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이 완전히 소멸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 모든 것이 기도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산을 옮긴다는 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불가능한 일이 실제가 되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훌륭한 랍비를 보면 산을 옮기는 사람이라고 부르곤 했답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이제는 우리가 산을 옮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마다 산이 옮겨진다면 신앙은 마술(Magic)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산이 옮겨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한없이 경험하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