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1956년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영화 <모비 딕>을 인터넷으로 보았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1820년 태평양 한가운데서 고래잡이 어선이 흰 향유고래에 받쳐서 침몰한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허먼 멜빌이 우리 말로 “백경(白鯨)”이라고도 불리는 장편 소설 <모비 딕>을 1851년에 출판했습니다. 얼핏 읽으면 고래에 대한 논문처럼 보일 만큼 내용이 생소해서 세간의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대서사시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명작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유명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모비 딕>은 인물과 주제에서 성경과 밀접합니다. 주인공이자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구약성경의 악명높은 아합왕의 이름입니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내레이터 이슈마엘은 아브라함과 그의 종 하갈 사이에서 낳은 이스마엘에서 왔습니다. 훗날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서 모녀를 살려 주시는데, 소설 속의 이슈마엘도 피쿼드호의 유일한 생존자로 사건을 세상에 알립니다. 피쿼드호가 침몰할 것을 예고한 사람은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와 동명이인입니다. 이 밖에도 고래잡이 어선 피쿼드호의 주인 이름이 구약성경 욥의 친구 빌닷입니다.

 

소설에 구약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신비로울 정도로 힘이 센 흰고래가 욥기의 레비아단을 연상시키고, 한 편에서는 선지자 요나를 삼켰던 바다의 큰 물고기를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모비 딕> 초반부에 메이플이라는 신부가 요나서를 갖고 열정적으로 설교하는데 요나서의 큰 물고기를 아예 고래라고 지칭합니다.

 

물론 성경의 인물과 주제만 소설에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종교를 믿는 선원들, 인종과 민족이 다른 선원들 등 나이와 출신성분이 다양합니다. 고래잡이 어선인 피쿼드호가 바람 한 점 없는 적도에 멈춘 적이 있는데, 선원들 간의 경쟁과 갈등, 권력욕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포괄적인 주제를 다루다 보니 작품에 대한 감상평이 극과 극을 달리는 등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인 향유고래에 대한 견해입니다. 어떤 이들은 향유고래를 악의 상징으로 보았고 선장 에이합을 악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반대로 선장을 구약시대 아합처럼 악한 인물로, 흰색의 향유고래를 선으로 보면서 향유고래가 에이합 선장은 물론 피쿼드호를 침몰시킨 것을 선의 승리로 봅니다.

 

저는 <모비 딕> 영화를 보고 소설을 떠올리면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거대한 대양 한가운데 떠 있는 피쿼드호를 연상케 합니다. 몸에 여러 개의 창이 박혀 있지만 힘차게 대양을 헤엄치는   향유고래의 모습 속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봅니다. 저는 소설 속의 향유고래가 선을 넘어서 창조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싶었습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합은 자신의 한쪽 발을 앗아간 고래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 있습니다. 처음부터 고래 사냥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고래를 찾아서 복수하려는 생각뿐입니다. 급기야 자신이 찾던 고래를 만났지만 고래등에 줄이 걸려서 생명을 잃습니다. 고래잡이 어선도 고래에 받혀서 침몰합니다. 선장 한 사람의 지나친 집착이 낳은 참사입니다.

 

누구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집요하고 통쾌한 복수를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라는 구약의 율법에는 맞을 수 있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허먼 멜빌이 그의 소설에서 구약의 인물들만 등장시킨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우연히 옛날 영화 <모비 딕>을 보면서 신앙과 인생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나친 집착이나 욕심은 금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똑같이 갚아주겠다는 생각은 도리어 자신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큽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주신 분복(分福)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무엇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살기 원합니다.(2019년 5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