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과 틀림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주 설교에 등장한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세웠던 여성들인데

무슨 연유인지 둘의 관계가 깨져서 교회에 해를 입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한없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하나 됨이 중요하기에

빌립보에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두 사람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여성 지도자들에게 신학적인 문제가 있었던 같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다툼과 허영(rivalry and conceit)”으로 인해서

주도권 다툼을 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과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하다가

두 여성이 부딪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올라갔지만

유오디아와 순두게 모두 성품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숙한 신앙 인격을 갖추지 못한 채 지도자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2.

성숙한 신앙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할 줄 압니다.

 

내가 말한 것만 옳고 상대방은 틀리다는 것은

어리숙하고 초보적인 사고요 신앙입니다.

매사를 자기 관점에서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면

당연히 관계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바울의 권면대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일 설교에서 같은 마음은

1) 상대방에 동의하고,

2) 공감대를 갖고

3) 조화와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컬러와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서로 존중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3.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이슈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름의 문제를 놓고

옳고 그름으로 접근하니 관계가 깨집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경청하며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면

다툼과 분열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한 것만큼

다름의 문제도 쉽지 않고 까다롭지만

“주 안에서” 라는 말씀을 기억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실 것입니다.

 

4.

실제로

옳고 그른 것을 다루기는 쉽습니다.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름의 문제를 갖고 동의와 조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애씀, 양보, 경청,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더욱 값진 일입니다.

 

오늘 하루

다양한 삶의 환경,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고, 조화를 이루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Let your reasonableness be known to everyone. The Lord is at hand. (Phil 4:5)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이 가는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샬롬)가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9.5이-메일 목회 서신)

유오디아와 순두게

살면서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대부분의 관계가 처음에는 좋게 시작하지만, 마지막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어떤 면에서 관계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도 인간과 교감을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러니 처음에 좋았던 관계가 뒤에 가서 망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배웠듯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도 하나님과 지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과,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은 물론 성도의 관계까지 흩트려 놓은 사람들로 나누어졌습니다. 바울은 복음 안에서 좋은 관계를 보여준 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간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관계는 사랑이 넘치는 살맛 나는 세상을, 깨지고 부서진 관계는 자신은 물론 주위 사람과 공동체까지 추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바울을 도와서 빌립보 교회를 세웠던 여성들입니다. 유오디아라는 이름은 “행복한 인생길”이라는 뜻이고 순두게는 “풍족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의 이름만큼이나 각자 형통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바울과 더불어 빌립보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듯이 어느 순간에 이들의 관계에 금이 간 것 같습니다. 서로 생각이 달랐고 자기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교회 공동체에 해를 입혔습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향해서 앞에서도 부탁하였듯이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3)고 권면합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도 이들이 하나 되는 데 도움을 주길 부탁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과 멍에를 같이하는 신앙의 동지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동지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교회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글레멘드를 비롯한 바울의 동역자들도 있었습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로 인해서 갈라지고 혼란스러워진 교회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면서 공동체를 세워가는 귀한 인물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복을 누릴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같은 마음을 갖고 같은 길을 가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고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하나님 백성에 걸맞게 멋진 공동체를 세워 가기 원합니다.-河-

슬픔의 노래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예배에서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s)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한 후에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면서 부른 슬픔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서 자초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바벨론 군대가 성전까지 들어왔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사람들은 이국 땅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고향에서 칠흑 같은 밤을 살고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예레미야 애가와 비슷한 문학 형식이

시편의 탄식시입니다.

 

어려움이 계속되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을 향한 탄식인 “언제까지니까(How long)”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려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오, 주님”

 

이렇게 하나님을 부른 후에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마음을 토해내듯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세상의 탄식은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가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탄식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큰 차이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확신을 갖고 나니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양이 나옵니다.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하나님께로 초대합니다.

 

탄식이 변해서 확신이 되고

감사와 찬송, 그리고 전도로 발전하는 것이

시편 탄식시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탄식은

신세 한탄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갖습니다.

 

탄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손길과 도움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탄식이 변해서 기쁨이 되고

똑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을 돕게 됩니다.

 

3.

예레미야 애가는 5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가운데 3장이 소망의 말씀입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발견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애가 또는 탄식의 묘미가 있습니다.

 

누구나 탄식없이 인생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생사 고락, 희로애락이 겹쳐서 찾아오는 삶 한가운데

“주여”를 저절로 부르게 됩니다.

 

탄식이 기쁨이 되고,

탄식 속에서 경험하는 주의 은혜가 참빛 식구들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13:5)

But I have trusted in your steadfast love;

my heart shall rejoice in your salvation. (Psalms 13:5)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결국에는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 8. 30이-메일 목회 서신)

주안에 서라

어릴 때는 위인전을 많이 읽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위인전을 읽으면서 그분들처럼 값진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음을 점점 느낍니다. 우리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 않고, 처음과 끝을 변함없이 살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본(本)이 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세상을 맑고 신선하게 유지하는 소금이 되길 부탁하셨습니다(마5:13-15). 또한 우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16). 구약의 이스라엘 역시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선택하신 것을 보면(사4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본보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과 신앙에 만족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고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메신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개인주의화 됩니다. 남들의 간섭을 싫어하고 자기 혼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라는 말 자체에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혼자 있을 때는 한없이 외롭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이것저것, 여기저기를 배회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고상한 일이고 기쁨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삶과 신앙의 확신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3:17) 로 자신 있게 말합니다. 바울의 자신감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 정도의 신앙이 부럽습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바울이 이번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교회가 시험을 받고,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원수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의 소굴로 변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던 예수님이 생각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세상 흐름에 휩싸이지 않고, 교회를 흔드는 무리에게 현혹되지 않고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진 성도로 손색없이 살아가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마지막에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우리 안에 바울의 고백이 있고,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는 물론 세상에서도 본보기가 되는 공동체로 자라 가기 원합니다.-河-

인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광고시간에

교회 앞 나무에 열린 미국 배 사진을 소개했습니다.

두 개가 열렸는데 저에게는 꽤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배나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냥 정원수인 줄 알고, 때가 되면 가지를 쳐주었습니다.

물론 제 안목이 없어서 배나무를 몰라 본 것은 죄송한 일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7년 동안 한 번도 열매를 맺지 않다가

올해 들어서 쌍둥이 열매를 맺었는지요!

 

올가을 우기가 시작되면

더욱 정성껏 가지치기도 해주고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사과며 자두가 많이 열리지 않지만,

배나무로 판명이 났으니 더욱 마음을 주겠습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열매가 없으면 도대체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 나무를 꾸짖으시던 장면도 생각났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찾아 가셨지만,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저주로 뿌리까지 말라서 죽는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를 가리켰습니다.

 

유대교가 겉으로는 번드르르 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이 없고, 열매가 없더니

결국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에 소개했던

씨 뿌리는 비유 속의 좋은 밭도 생각났습니다.

 

좋은 밭은 착하고 좋은 마음을 뜻합니다.

말씀을 듣고 끝까지 지키는 힘을 갖고 있어서

결국 인내로 결실하는 마음과 삶입니다.

 

3.

지난 주일 설교였던 푯대를 향하는 신앙 여정은

쉽게 결판나지 않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소낙비처럼 경험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꽤 지루하고 끈질긴 경주입니다.

그 경주에서 꼭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확신,

마지막 결승점에서 두 손 벌려 우리를 맞으실 예수님,

달리는 동안에 우리에게 힘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가지만

7년 만에 열매를 맺은 배나무의 내공과 인내가 필수적입니다.

 

신앙은 물론 삶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실제가 되고

“믿음으로 사는 것”

“예수님께서 붙들려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증할 수 있기 원합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8:15)

As for that in the good soil, they are those who, hearing the word, hold it fast in an honest and good heart, and bear fruit with patience. (Luke 8:15)

 

하나님 아버지,

인내로 결실하는 참빛 식구들 되게 하시고

주님 붙잡고 푯대를 향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목사 드림

(2017. 8. 23이-메일 목회 서신)

네 가지 밭

성경을 한 장씩 차례로 읽어가는 새벽기도회에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유명한 누가복음 본문을 만났습니다. 공관복음서로 알려진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농부들은 씨를 심기보다 옆구리에 망태기를 메고 손으로 휙휙 뿌리는 식이었답니다. 그러니 씨가 여기저기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읽다 보면, 씨를 뿌리는 농부보다 말씀을 뜻하는 씨와 씨가 뿌려진 밭이 강조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농부가 뿌린 씨는 길가, 바위,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에 각각 떨어졌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게 밟히고 공중의 새가 와서 쪼아먹었습니다.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싹은 났지만, 습기가 없는 바위 위에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고 말라버렸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강력한 가시나무가 기운을 막으니 크게 자라지 못했고,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이 백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의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길가는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그 말씀을 빼앗아갔습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씀을 듣지만, 시련이 닥치니 말씀을 저버리고 배반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신앙의 성장을 막는 염려, 물질, 쾌락입니다. 가시덤불이 현대를 사는 우리의 상황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밀물처럼 몰려오고, 마음속에서 바이러스처럼 생기는 염려는 복음의 씨가 자라는 것을 막습니다. 염려를 완전히 떨칠 수 없지만, 염려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께 맡기고 그 자리에서 기도하므로 염려를 몰아내야 합니다. 계속해서 염려가 몰려오니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시덤불의 두 번째 요소인 재물은 없으면 없는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신앙 성장을 방해합니다. 재물이 없으면 그 자체가 시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한지 우리 모두 잘 압니다. 재물이 많으면 대부분 하나님을 떠나거나, 재물에 노예가 됩니다. 요즘 한국에서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형교회의 문제들 대부분이 재물과 관련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에 이어서 세 번째로 등장하는 쾌락은 하나님을 향해야 할 우리의 마음을 홀딱 빼앗아갑니다. 쾌락만큼 달콤한 것이 없습니다. 어릴 적 꿀단지에서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가 며칠 지나면 한 단지를 모두 훔쳐 먹듯이 쾌락은 슬며시 우리 안에 들어와서 마음과 삶을 소리소문없이 망가뜨립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기뻐하고 즐긴다면 그 모든 것이 쾌락에 속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이 등장합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착한 것은 거리낌 없이 정직한 마음입니다. 좋은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원수까지 사랑하고 미운 자를 위해 기도하며, 약한 자를 돕는 말 그대로 예수님을 닮은 성품입니다.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지켜서 인내로 결실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 백배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에는 씨가 뿌려진 밭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전도자의 책임은 단지 씨를 뿌리는 것임을 알려주고,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밭에 비유하면서 좋은 밭을 가진 성도가 되길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의 밭을 우리 각자의 마음과 신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도 도움이 됩니다. 우리 안에는 네 가지 밭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신앙이 한결같이 좋은 밭일 수 없습니다. 마음 한편에는 길가도 있고, 다른 편에는 바위는 물론 가시덤불이 넓게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은 우리의 마음을 좋은 밭으로 갈아엎는 훈련이고 과정입니다.

 

때로는 네 가지 밭이 차례로 또는 두서없이 나타납니다. 마음 전체가 길가와 같아서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하지만 속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 그리고 쾌락에 빠져서 가시덤불로 뒤덮일 때도 있습니다. 물론 성령 충만해서 우리 마음 전체가 좋은 밭일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좋은 밭이 오래가도록 신앙의 끈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순례길입니다. 여기서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갖고 주어진 신앙과 인생의 여정을 감사와 기쁨으로 완주하기 원합니다. (2018년 8월 23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