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교회 (4)

돌봄은 관계와 밀접히 연결됩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비롯한 공동체 속에서의 돌봄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자신을 돌보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자신을 한 발짝 멀리 뛰어 놓고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돌봄의 대상인 타인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관계가 좋으면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잠언에서도 마른 떡 한 조각을 갖고 화목한 것이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미움과 갈등, 다툼으로 관계가 틀어지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평화가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니 관계가 깨진 곳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봄은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돌봄은 서로 지체 의식을 갖고 은사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 곧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명과 은사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생각을 우리 모두 공유할 때, 교회를 소중히 여기게 되고 온 힘을 기울여서 공동체를 세워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롬12:9-13)은 공동체를 세우는 구체적인 원리와 태도를 알려줍니다.  그 한가운데 “사랑”이 위치합니다.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돌보는데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교훈은 교회뿐 아니라 가정과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교제까지 확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선, 거짓 없는 사랑으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거짓없이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와 형제자매를 살리는 선함을 사랑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둘째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말 그대로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것입니다. 미움과 갈등을 삼가야 합니다. 존경해야 합니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사랑해주고, 관계를 개선하며, 존경해 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돌봄은 받는 것보다 베풀 때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주를 섬겨야 합니다. 행여나 이웃을 섬기다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고 기도하는 신앙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은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구체적인 돌봄입니다. 이렇게 주를 섬기며 이웃을 돌볼 때, 우리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가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河-

롤러코스터

좋은 아침입니다.

 

1.

새해 첫 달이 지나갑니다.

힘차게 새해를 시작했지만 20여 일이 지나면서

새해 역시 평범한 일상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생겼겠지요.

 

우리는 올 한해를 지내면서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꼭대기와 골짜기를 반복해서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 생각, 관계, 세상의 삶,

심지어 우리의 신앙도 높낮이를 경험하면서 한 해를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요 우리가 가진 밑천의 한계입니다.

 

지난번 설교에서

로마서 12장 2절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롬12:2)라는 표현 속에는

“다시”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다시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함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2.

  1. S 루이스는

악마가 그리스도인을 유혹하는 전략을 흥미롭게 묘사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침체와 건조함의 골짜기”에 있을 때

그것을 잘 활용해서 시험에 들게 하는 악마의 전략을 알려줍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올 한해는 흔들림 없이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벌써 침체와 건조함의 골짜기에 내려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비관해서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그럴 수 있다”고 지나치게 낙관하면서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데

악마가 그 순간을 교묘하게 파고 든다는 것입니다.

 

악마가 가장 힘겨워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걷고 신앙이 흔들리더라도

계속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도를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원수 [악마에게는 원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악마의] 커다란 전략이 위협받을 때는 없다”

 

3.

우리의 삶의 길이 장밋빛 융단일 것이라는 기대는

그동안의 경험상 일찌감치 접었습니다.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번갈아 내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롤러 코스터의 반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즐겼듯이

우리의 인생도 결을 따라 살면서 즐겨야 합니다.

거기서 무너지면 C.S 루이스의 표현대로 악마가 가장 좋아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분명히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매번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꿋꿋하게 신앙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And we know that for those who love God all things work together for good,

for those who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Rom 8:28)

 

하나님 아버지

새해를 살면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어떤 상황에도 신앙만은 흔들리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7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는 교회 (3)

자신을 돌보는 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가 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돌보는 최종 목적입니다.

 

돌봄의 범위는 자신을 넘어서 공동체로 향해야 하는데 오늘 본문이 돌봄의 범위를 공동체까지 넓혀줍니다.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로마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제국의 수도였기에 교회도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과 헬라 출신 교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에베소서를 비롯한 바울서신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단지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임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핏 값을 치르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행20:28).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팔과 다리와 같은 지체없이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각 지체가 몸에 분리되어도 안 됩니다. 지체가 몸을 구성하고 몸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도 지체인 성도들로 인해서 세워집니다.

 

12장 3절은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로 시작합니다. 바울의 편지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기초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지만, 이 말씀이 곧 하나님 말씀이 될 수 있는 근거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각 사람”에게 권면합니다. 일일이 모든 성도에게 권면하는 것이니 바울의 권면에서 면제될 사람이 없습니다.

 

제국의 수도 로마에 세워진 교회였으니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서로 옳다고 팽팽하게 맞서는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공동체가 안고 있는 분열의 씨앗입니다. 바울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마음에 품지 말라고 합니다. “겸손”을 뜻합니다. 빌립보서 교회에 권면했듯이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분량은 우리에게 믿음의 크고 적음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처신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각 성도에게 은혜를 나눠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사는 예언, 섬김, 가르침, 위로, 구제, 다스림, 긍휼입니다. 성도들은 받은 은사를 갖고 각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길 뿐입니다. 은사대로 섬긴다고 해서 한 가지 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면서 사랑과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두루 섬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 교회를 돌보는 기쁨이 충만하기 바랍니다. -河-

비판의 기술

좋은 아침입니다.

 

1.

작년 후반기 동안

주보의 <짧은 글 깊은 생각>에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에서 발췌한 글을 소개했습니다.

올해는 “비판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매주 한 단락 씩 발췌해서 소개할 계획입니다.

 

주보를 성심껏 챙겨서 읽는 분들도 계시고

그냥 넘어가는 분들도 계시는 줄 압니다.

목사인 저는 우리 교인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요즘은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고 제가 잘하는 것 위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비판의 기술>은

세인트루이스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인

테리 쿠퍼 (Terry Cooper)가 썼고 한국 IVP가 번역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는 비판과 비판주의를 구분합니다.

건전한 비판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하지만 비판을 일삼거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이나 그의 생각, 세상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합니다.

 

마지막 장은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가슴을 품은 ‘은혜 충만한’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공동체와 그 안에서 펼쳐지는

서로 돌보는 거리낌 없는 대화를 제시합니다.

 

앞으로 중요한 대목을 주보에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2.

비판의 기술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타인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서로 핑계를 댄 것도 일종의 비판입니다.

그러니 비판은 태생적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비판하는 방식을 배운 적이 없어서

자기 나름대로의 잣대나, 방법을 사용하지만

꽤 주관적이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거나

공동체도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어도

속으로 다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으니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3.

비판에 기술이 필요합니다.

비판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앞으로 2-3주 살펴볼

로마서 12장 후반부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이 우리 안에 흘러 넘칠 때

우리 자신은 물론, 가족과 공동체, 넓게는 세상을

비판을 넘어서 은혜로 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올해 우리 교회 표어인 “돌봄(긍휼)”과 만납니다.

 

멋진 비판은 언제나 환영이지만,

비판주의에 빠지지 않고

큰 바위 얼굴처럼 커다랗고 넓은 신앙의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긍휼이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긍휼을 우리 삶에서 얼마든지 계발하고 훈련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긍휼은 영적 훈련이다. (비판의 기술, 188)

 

하나님 아버지

올 한해 우리의 신앙은 물론

사고, 성품, 삶이 멋지게 자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7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는 교회 (2)

돌봄은 그리스도인에게 꼭 필요한 영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돌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평범한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돌봄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 하나님은 위로자와 상담자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와 세상을 돌보시는 보혜사가 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돌봄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정도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구원하실 만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실 만큼 귀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알기 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부인했습니다. 혹은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현재의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이 다르게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을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독교 교리(doctrine)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말씀이 시작되는 서두입니다. 로마서 전체 문맥에 따르면 앞에서 사도 바울이 소개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요약한 표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응축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우리 위에 임한 하나님의 모든 긍휼과 사랑입니다. 12장 이하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물론, 교회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돌보는 것은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돌보는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는 이 세대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 순응(conform)하지 않고, 대신 변화를 받아서 (transform)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된 온전한 변화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자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기 돌봄은 단순한 순응이 아니라 완전한 변화를 지향합니다. 새롭게 된 자신이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 떠나는 신앙 여정입니다. -河-

돌봄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연말부터 미국 정부의 모든 예산 집행이 닫혀있습니다(shut-down).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는 대통령과

그것은 재정의 낭비라는 의회의 대치 때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국경을 넘어온 사람 중에는

미국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올 정도라면 보통 사람들이 아니니 위험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넓고 긴 국경에 벽을 쌓는다고 밀입국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습니다.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모두 나쁜 사람들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국경을 넘은 애절한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 감당해야 할 몫일 수 있습니다.

미국이 돌봐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돌봄에는 부작용도 있고, 희생도 따르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런데도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 돌봄입니다.

 

2.

헨리 나우웬은 <돌봄의 영성>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웃을 돌보는 사람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다.

이 정체성을 주장할수록 점점 더 깨닫는 사실이 있다.

사랑의 창조주가 인간 가족의 모든 구성원을 조건 없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제시하려는 관점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기초한 것이다.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나는 긍휼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란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은 가볍게 하는 말이 아니다. 경청, 심방, 독서, 글쓰기 등을 통해

오랜 세월 다른 사람들을 섬긴 끝에 나온 결론이다.

그동안 나는 숱한 경험에 동참해야 했고, 그중에는 고통스러운 일도 많았다.

 

돌보는 사역을 그만두고 더 쉬운 일을 해볼까 생각한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깨달은 게 있다.

쉬운 일을 욕망할 때마다 예수님을 따라 살기로 한

내 헌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돌봄의 영성, 46-47쪽)

3.

헨리 나우웬의 고백대로

돌봄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올 한해 <돌보는 교회>라는 주제로 살게 됩니다.

돌봄을 받으려고 하면 돌볼 수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충분히 돌봄을 받았으니

예수님께서 값 주고 사신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서

가정과 교회와 이웃, 그리고 세상을 돌보기 원합니다.

 

돌볼 수 있는 믿음, 마음, 손과 발과 능력이 있음에 감사하면서…

 

너희 아버지가 긍휼히 여기시는 것 같이 너희도 긍휼히 여기라.(눅6:36)

Be merciful, even as your Father is merciful. (Luke 6:36)

 

하나님 아버지

돌봄을 받고 돌봄을 기대하기보다

돌보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9. 1. 10이-메일 목회 서신)

돌보는 교회 (1)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돌보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홀로서기라는 표현은 근사하지만, 실제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고군분투하는 것이 안타까우셔서 그에게 동역자 이브를 주시면서 에덴 동산를 가족 공동체로 만드셨습니다. 이브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아담과 교제하셨는데도 이브를 만드신 것을 보면 홀로서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돌봄을 받기만 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가면서 돌봄을 받기보다 돌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돌봐야 할 영역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돌봄이라고 했을 때 지나치기 쉬운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도 돌봄의 영역입니다. 가정을 비롯한 공동체를 돌봐야 합니다. 가정이나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브를 주신 것과 같은 신앙과 인생의 동지입니다. 이웃도 돌봐야 합니다. 우리의 돌봄이 자신과 가정 또는 공동체에 그친다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돌봐야 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차례로 살펴볼 주제입니다.

 

오늘은 자신을 돌보는 신앙을 나누겠습니다. 기독교 신앙하면 자기희생을 떠올립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눅14:27)라는 예수님 말씀이나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는 바울의 고백(고전9:27)이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신 것은 신앙이나 인생이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돌봄만 받으려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바울은 실제로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면서 복음이 전파되길 원했습니다. 바울의 특별한 소명이며 열정입니다. 무심코 따라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사랑을 명령하실 때도 “네 몸과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몸만 챙기는 본능을 지적하신 말씀이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을 전제로 이웃 사랑을 부탁하신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돌보는 것은 첫째로 육신을 돌보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신이 건강해야 인생은 물론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마음입니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어두워지거나 뚝-떨어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삶 속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오늘 본문에서 “몸”이라고 불렀고 육신을 포함한 삶 전체를 뜻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자기 돌봄의 목표입니다. 올 한해 우리 몸을 멋지게 돌봄으로 삶 전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