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을 품지 말고

엊그제 화요일에는

평소에 자주 가는 스타벅스 커피숍

바로 옆 건물에서 총격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스카벅스 매장인데

옆에 그 유명한 유튜브 본사가 있는 줄 몰랐다가

어제 보도를 보고 알았습니다.

 

총격사건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성은 이란계 이민자였습니다.

동물 애호가로 활동했고

광고 수입을 위해서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는데

최근에(?) 유튜브의 규정변경으로 인해서

수입이 줄면서 불만이 커졌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집을 나간 것을 안 아버지는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은 사고 당일 새벽

차 안에서 자고 있던 범인을30마일 떨어진 마운틴 뷰에서 발견했습니다.

20여 분간 대화를 나눴지만

침착하게 경찰 조사에 응했기에 별일 없을 것으로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유튜브 본사에서 총격사건을 벌인 것입니다.

 

2.

이번 총격사건을 일으킨 여성은 자신의 계정에

“실제 세상에서 자유로운 의사 표현은 불가능하다.

[사회] 시스템이 지원해 주지 않는 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글을 남겼답니다.

 

동물 애호가로, 소셜 계정의 광고수입으로

무엇보다 17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온 이민자 1.5세로,

요즘 같은 시대에 중동계 이민자로 살아가면서

마음속에 세상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차 오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마음속에는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인터넷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만

그녀와 생각을 나누고 얘기를 들어줄 “실제 사람”도 부족했을 것 같습니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어낼 기제가 마땅치 않으니

총을 구입해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습니다.

 

3.

어찌 이 여성만 그럴까요!

대부분 사람들, 심지어 우리도

마음 한 켠에 분(anger)을 갖고 살아갑니다.

 

창세기의 가인도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동생을 죽였습니다.

에서도 장자권을 빼앗은 동생 야곱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했습니다.

잠언에서도 쉽게 분노하는 것은 미련한 일이라고 교훈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분노와 다툼없이”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속에 있는 분(anger)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못박은 군병까지 용서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분노를 다스리는 비결입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와 은혜, 함께하심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분노를 일으키고 발전시키는 시스템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엡4:26-27)

Be angry and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on your anger,

and give no opportunity to the devil. (Ephesians 4:26-27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부활의 주님께서 전하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4.5이-메일 목회 서신)

예수 그리스도 (6): 부활절에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면서 나누는 부활절 인사입니다. 부활절은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고 드디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춘분(春分)과 보름이 지난 후 첫 번째 맞이하는 주일에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에 맞춰서 부활절을 지켜 왔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부활절을 지키게 된 것도 의미가 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봄철에 피어나는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겨우내 땅속에 있던 씨가 싹을 틔우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생명이 임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생명이 임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과 일치합니다(요한 12:24).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부르는 것도 봄과 관련이 있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이스터”라는 말은 없습니다. 성탄절이 긴 밤이 지나고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冬至)에 태양신을 섬기던 전통을 갖다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일로 지켰듯이, 부활절을 이스터라고 부른 것도 세상에서 지키던 봄의 축제를 기독교가 갖고 왔습니다. 부활절과 토끼를 연결하는 것도 북유럽 튜턴족의 이스터 축제와 관련됩니다. 토끼는 그들이 섬기던 이스터 신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세상 속에 녹아 들어갔고, 세상의 풍습을 기독교 절기로 거침없이 변환시키면서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쳤습니다.

 

부활절 달걀에 대한 일화도 흥미롭습니다. 생명을 품고 있는 달걀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킬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달걀 장수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물론 전해 내려오는 전승일 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 토끼보다 달걀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졌습니다. 부활 신앙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장사 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라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습니다. 썩어질 육의 몸이 썩지 않을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날 것도 믿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갑니다. 부활의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누리고 부활의 주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그가 사셨습니다(He is Risen)! -河-

고난 주간을 보내며

지난 주에 나눈 히브리서 말씀(히2:2-3)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고 계실 줄 압니다.

 

오늘 목요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갖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잡히신 밤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고난 주간의 목요일을

“Maundy(먼디) Thursday”라고 부르곤 합니다.

 

“Maundy”는 계명(commandment)이라는 뜻의 라틴어

“만다툼(mandatum)”에서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요한복음의 새 계명일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A new commandment I give to you, that you love one an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you also are to love one another. (John 13:34)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삶을 살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떠올립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

If I then,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also ought to wash one another’s feet. (John 13:14)

 

교회의 전통에서Maundy Thursday에는

예수님 말씀대로

세족식을 하거나 촛불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2.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성금요일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인데

“Good”이라고 부르는 것이 약간 어색합니다.

이에 대한 몇 가지 견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Good에 해당하는 영어가 옛날에는 holy와 유사하게 쓰였답니다.

그래서 Good Friday를 우리 말로 옮길 때는

“성 금요일(Holy Friday)”이라고 합니다.

 

Good과 하나님을 뜻하는 God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God’s Friday라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Good Friday를 단어 뜻 그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 생각하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알고 있기에

마냥 슬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아니 온 세상을 향한 “선한 사역”입니다.

선으로 악을 몰아낸 최고의 사건입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목숨까지 내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은 말 그대로 Good Friday입니다.

 

3.

오늘과 내일은

갈보리 십자가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발길과 마음을 따라 사시길 권합니다.

 

목요일 저녁의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기도, 잡히심

금요일 제 구시(오후3시)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여기에 해당하는 복음서 말씀을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친지들 또는 가족과 함께

성금요일 모임을 갖는 것도 참- 좋습니다.

일상과 삶의 영성을 고난주간에 실천하는 것이지요.

 

2018년 고난주간에

우리 모두에게 임할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또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 주간을 보내는 참빛 식구들 위에

십자가의 은혜가 깊이/충만히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29이-메일 목회 서신)

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되새기면서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길은 말 그대로 고난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저항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치르신 희생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16세기 일본에 복음이 전해지던 시대를 배경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이 목숨 걸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을 그렸습니다. 박해가 심해지면서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배교할 정도였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핍박을 피해서 외딴섬을 옮겨 다니면서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는 은혜와 하늘나라를 향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판명되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험한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쉬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판자를 밟으면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밟았지만, 십자가에 침을 뱉으라는 요구에 불복해서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금방 숨을 거두었지만, 며칠을 십자가에 매달려서 파도와 싸우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나는 하나님 나라로 간다네” 찬송하면서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서 장엄하게 순교했습니다.

 

엔도 슈사쿠의 <침묵>은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과연 예수님의 얼굴을 밟고 살아남은 자들을 무조건 배신자라고 몰아칠 수 있는지, 핍박과 순교의 시대에 하나님의 침묵을 어떻게 볼 것인지 등등 수많은 질문을 제기합니다. 신앙을 어느 한 가지로 단순하게 정의할 수 없음도 알려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우쳐줍니다.

 

소설의 제목 <침묵>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목숨을 잃는데도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보고만 있으시냐는 것입니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그 답을 줍니다:“나는 너희들의 아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그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쉽게 말하고 쉽게 결심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신앙과 동떨어질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간다고 말하지만, 자신이 자초한 어려움을 두고 자기 십자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멈춰서 생각해보면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은 어렵고 고민스러운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서자마자 부딪치는 질문과 문제, 그리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말을 섣불리 입 밖에 내기 어렵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혀서 결국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솔직한 고백이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진다면 그대로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1년 10년 계속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은 연약한 약졸(弱卒)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주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진정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과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2018년 3월 29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예수 그리스도 (5)

기독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신앙과 삶의 축으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세로 목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갑니다. 십자가의 가로 목을 통해서 이웃에게 나갑니다. 세로 목과 가로 목이 만나는 한 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아담 이래 모든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고, 우리가 사는 세상에 깊이 뿌리내린 악의 속성을 해결해 주신 승리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죄의 속박을 풀어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갚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죄의 결과가 죽음이라고 했으니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서 막혀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이어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사소해 보이고, 거추장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신앙의 가치를 잊고 지낼 때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누리는 은혜가 예수님의 목숨과 맞바꾼 값비싼 것임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교만한 자아와 집착하는 욕심, 시기와 질투를 못박고 예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우리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예수님이 사신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매일같이 십자가의 은혜에 힘입어 하나님께 나갑니다. 하나님께 나가서 예배하고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사함의 은혜를 누립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잔재가 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셨기에 우리의 악한 속성이 뿌리내렸던 죄에서 단절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고리가 끊겼기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죽음의 세력에 얽매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하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은혜를 세상에 전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랑을 세상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붙잡고 승리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의 속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수요예배에서는

마가복음을 마치고 다시 예레미야로 돌아와서

후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크게 1-25장과

26-52장으로 나누어 집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을 향한 예레미야의 예언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식이고 문체는 대개 시어체로 쓰였습니다.

후반부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선지자의 삶을 통해서 전합니다.

예레미야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정도입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을 흠뻑 느낄 수 있습니다.

 

50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다윗 왕조가 막을 내리는 순간에

눈물로 예언한 말씀이기에 만만히 읽을 수 없습니다.

매 순간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식이어서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2.

그런데 이번 수요일부터 읽기 시작한

예레미야 30-33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무 조건 없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상한 곳에서 새로운 살이 돋아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등 하나님을 떠난 백성을 향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망가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십니다.

 

다음 주에 살펴볼 31장에 가면

새로운 언약을 선포하시면서

모세 시대처럼 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새겨 주시겠답니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31:33)

But this is the covenant that I will make with the house of Israel after those days, declares the LORD:

I will put my law within them, and I will write it on their hearts. And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shall be my people.(Jer 31:33)

 

 

3.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죄의 고발과 심판의 말씀 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위로, 용서, 치유와 소망의 말씀이 있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저는 예레미야서의 구조를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물으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속마음은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아무 조건 없이

다시금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속마음,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그 큰 사랑이 넘치길 원합니다.

 

그들에게서 감사하는 소리가 나오고 즐거워하는 자들의 소리가 나오리라

내가 그들을 번성하게 하리니 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아니하겠고

내가 그들을 존귀하게 하리니 그들은 비천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렘30:19)

Out of them shall come songs of thanksgiving,

and the voices of those who celebrate.

I will multiply them, and they shall not be few;

I will make them honored, and they shall not be small. (Jer 30:19)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로 사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주의 은혜에 감사하는 참빛 식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3 22이-메일 목회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