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 보울

지난 8월 12일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의 후폭풍이 미국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반대편 시위자들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나치 사상에 물든 한 청년이 트럭을 몰고 돌진해서 20대의 젊은 여성이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했습니다.

 

미국 남부는 물론 곳곳에 남부 연합군을 상징하는 동상이나 조형물이 있는데, 대개 노예제도를 지지했던 남부 연합의 사상이 깃들어 있거나 아메리칸 원주민을 비하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공장소가 아닌 박물관 또는 특정 장소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폭력사태로 발전하곤 합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정책 등 백인 편향으로 보이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냅니다.

 

중서부를 비롯한 백인들이 다수인 지역에서는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나 이민자들에게 “미국을 떠나라(get out of America)”는 구호와 함께 백인우월주의가 예상보다 강하게 퍼지는 것 같습니다. 연초에는 LA에서 한국인 할머니 한 분이 백인 여성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주말에 예정되었던 샌프란시스코의 극우단체 “패트리엇 프레이어”의 집회가 논란 끝에 취소되었지만, 많은 사람이 폭력 사태를 우려했습니다.

 

이처럼 미국이 뒤숭숭합니다. 이미 40여 년 가까이 흘렀지만, 학창시절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들께서는 미국을 “멜팅 팟(melting pot)”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라는 그릇에 녹아들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는 이론이었습니다. 1900년대 초부터 소개된 개념이니 백인 중심의 유럽 이민자들이 대다수였던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가리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멜팅 팟”보다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히 녹아내려서 하나가 된 미국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물이 같은 접시에 들어있는 샐러드처럼, 각각의 문화, 인종, 관습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미국이라는 그릇 속에 어우러진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우리말의 만화경을 뜻하는 영어 표현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도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그리스어 “아름답다(beautiful)”에 “모양(form)”을 합친 말입니다. 다른 배경을 가진 각각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샐러드 보울 속을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경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처럼 아름답게 보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워야 할 미국이 많이 헝클어지고 있습니다. KKK로 대표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물론 나치의 깃발을 들고 폭력을 일삼는 네오 나치 단체까지 전면에 나서고 있으니 말입니다. “혐오 범죄”라는 말도 등장했습니다. 자기편이 아니거나,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하고, 폭언을 가하고,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총격을 가하는 범죄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과 염소와 어린아이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 먹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아니기에 그리스도인들로서 경계하고 안타까워할 일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폭력을 일삼고 자기들만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에 마음으로라도 동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들이 기독교인들처럼 보이고 기독교 용어를 사용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반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사는 미국이 모든 이들이 각자의 독특함을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화합 속에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기도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됨과 조화로움을 이루는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미국이 멜팅 팟처럼 하나로 녹아질 수는 없지만, 샐러드 보울처럼 각자 제 맛을 내면서 한 공간에 어울려 사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주고, 각각의 색깔이 모여서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만들듯이 다 함께 어울려 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2017년 8월 31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한 가운데

좋은 아침입니다

 

성경 통독과 수요예배,

그리고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는 서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면,

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고 슬퍼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가(Lament)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30-33장을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십니다.

깨지는 돌 판이 아니라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주십니다.

새 언약의 선포입니다.

 

다섯 장으로 구성된

예레미야 애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가서 한 가운데인

3:19-25절에 소망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상황은 깜깜합니다.

쑥과 담즙(쓸개)과 같은 고난이 닥쳤습니다.

마음이 낙심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을 걸으면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기억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분명히 돌보시고 함께 하실 것을 기대합니다.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애가 3:49-50)

My eyes will flow without ceasing, without respite,

until the LORD from heaven looks down and sees. (Lam 3:49-50)

 

2.

예레미야서와 애가서의 ‘한가운데’ 위치한

소망의 말씀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한 가운데를 향해야 합니다.

주변을 맴도는 신앙은 어둠 속에서 헤매며

신앙의 진수에 접근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애가서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을 두신 것을 보면서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한가운데”로 향해야 함을 배웁니다.

 

신앙의 한 가운데서

모든 참빛 식구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선하신 하나님을 다 함께 찬양하고 싶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애 3:25)

The LORD is good to those who wait for him, to the soul who seeks him.(Lam 3:25)

 

하나님 아버지,

고난의 끝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언제나 선하신 주님을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31이-메일 목회 서신)

작은 사랑 나눔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연초에 표어를 정하면서 우리 교회에 사랑이 넘치길 원했습니다. 세대가 어울려 있고, 발걸음이 잦은 교회이니 늘 크고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교회 사역도 인생사와 비슷해서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베드로전서에서 배운 대로 우리 모두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교회를 세워 나가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미국이라는 큰 나라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나그네의 삶은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고 지칠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함께 걷는 동지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힘이 됩니다. 같은 처지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인생길을 걷는 신앙의 동지들보다 더 귀한 분들이 세상에 없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가 되어주길 바라면서 올해 표어를 “서로 사랑하라”로 정했습니다.

 

그렇지만 한 켠이 아쉽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은 사랑나눔>을 제안했습니다. 가족 또는 개인별로 20불 안에서 무명으로 헌금하고, 그것을 역시 무명으로 꼭 필요한 이웃에게 전달하기로 한 것입니다. 참빛 성도님들께서 제안해 주시는 곳을 우선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리치몬드에 있는 초등학교에 기부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꿈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워싱턴 DC를 다녀오는데 필요한 경비를 슬쩍 지원한 것입니다.

 

다음 주일에 두 번째 작은 사랑 나눔을 위한 헌금을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우리 성도님께서 추천하신 과테말라의 께찰떼낭고에서 사역하시는 강순진 선교사님과 사랑을 나눕니다. 해발 2,400m 고지대에 위치한 화산 지역이라고 합니다. 고지대이지만 과테말라 농산물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로 비옥한 곳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찾아 모여들고 있답니다. 강선교사님(72세) 께서는 2006년부터 과테말라에서 사역하셨습니다. 교회는 물론 장애와 극빈 가정을 도우시고, 거리에서 무료급식, 의료와 교육 등 여러 기관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사역하시는 분이십니다. 저희 작은 마음이 선교사님께 힘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두 번 정도 작은 사랑 나눔을 더 실천할 계획입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나 단체가 있으면 안내 데스크에 있는 제안함을 통해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말 그대로 작은 사랑 나눔입니다. 한 주간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사랑 나눔에 동참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河-

쏟아지는 물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새벽 기도회에서는

예레미야서를 끝내고 오늘부터 예레미야 애가에 들어섰습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바벨론에 의해서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른 조가(lament)입니다.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과

하나님께서 계시던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던 예루살렘이 몹쓸 도시로 변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낮에는 예루살렘을 돌아보고

밤에는 낮에 본 참상에 눈물로 주님 앞에 엎드려서

예루살렘을 향한 애가를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애타게 외쳤고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말했지만

예루살렘 왕들과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예언이 맞았으니 더욱 당당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에 가서 편하게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땅의 백성들,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참상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면서 애가를 지은 것입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통곡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함께 애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하자고 초대합니다.

 

깜깜한 어둠입니다.

쓰고 쓴 담즙을 씹는 것과 같은 세상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버림받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으니 더욱 절망적입니다.

 

그 순간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합니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쏟듯 할지어다 (애가 2:19)

Pour out your heart like water before the presence of the Lord!(Lam 2:19)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잘못한 것들도 쏟아내고

어려운 상황도 그대로 쏟아내고

자신 안에 들어있는 찌꺼기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미련 또는 교만,

여전히 남아 있는 특권의식과 자존심도 물처럼 쏟아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예레미야의 초청입니다.

 

우리도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내야 합니다.

선별할 필요없이 물처럼 쏟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새로운 은혜로 가득 채우고

새 날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물처럼 쏟아 붓고

아침마다 새롭고 성실하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 (애가 3:22-23)

The steadfast love of the LORD never ceases;

his mercies never come to an end;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Lamentation 3;22-23)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고

아침마다 새로우신 주의 성실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24이-메일 목회 서신)

                   

선한 청지기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인을 “청지기”에 비유합니다. 청지기라는 개념은 오늘날 널리 사용되지 않습니다. 영어로 청지기는 “스튜어드”이니 항공사 직원을 가리키는 말 정도로 쓰일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쓰일 당시에는 청지기라는 직책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재산을 관리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믿고 그의 재산을 위탁했습니다. 선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성실하게 관리했습니다. 반면에 악한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거나 주인의 재산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재산이나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각각의 은사대로 은혜를 맡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은혜를 관리하고 그것을 공동체와 세상에서 나눠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혼자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각각에 맞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입니다. 로마서 12장 6절 이하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의 목록이 나옵니다: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사를 맡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맡기신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선한 청지기의 직무입니다.

주인은 때가 되면 청지기를 불러서 그가 행한 일을 보고받고 회계할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7절)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른다면 청지기는 항상 허리띠를 동이고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입니다. 청지기의 삶을 살기로 날마다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맡은 청지기와의 일대일 관계라면, 사랑은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 감당하는 청지기직입니다.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수많은 죄를 덮어주고 서로 대접하며 환대합니다. 이처럼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정신을 차리고 기도와 사랑의 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은사를 갖고 주님의 교회와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河-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 미국 언론은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버지니아 샤롯츠빌 사건의 후폭풍을 연일 보도하고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합군을 지휘했던 로버트 리 장군의 동상 철거를 두고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그들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의 충돌이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감싸는 듯한 애매한 발언을 하면서

미국 사회 곳곳에 이끼처럼 끼어있던 인종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느낌입니다.

 

어디서 힘을 얻었는지

뒤에서 쉬쉬하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점점 큰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2.

5년 동안 살았던 인디애나 블루밍턴에서

북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마틴스빌이라는 곳에

KKK지역본부가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있었던 2000년 통계를 살펴보니

약11,000명 주민 가운데 흑인은 11명일 정도로

유색인종이 발을 붙이기 힘든 도시였습니다.

 

어쩌다가 그 도시를 지나갈 기회가 생기면

왠지 기분이 언짢고 얼른 빠져나오기 위해서

서둘러 엑셀러레이터를 밟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교민 가운데 한 분은 그 도시의 약국에 근무하셨고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드러내놓고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인종이나 피부 색깔 등에 대한 차별과

이것을 빙자한 폭력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형상을 따라 모든 사람을 지으셨기에

누구나 존중받고 공평하게 대우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평화가 깨지고

무고한 시민들을 위협하는 일이기에

경계하고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이 미국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갈라진 모든 것을 충만한 은혜로 통합시켜 주십시오

찢겨진 모든 것을 충만한 사랑으로 아물게 해주십시오

부활, 새로운 생명을 주십시오.

Unite in full grace all that is divided.

Mend in full love all that is torn.

Resurrect us, we pray.

 

우리의 삶도 만만치 않지만

잠시 멈춰서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길 기도하기 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Matthew 5:9)

 

하나님 아버지,

분열된 세상이 화합하게 하시고

찢겨진 마음들이 하나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주의 평화, 샬롬을 구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7.8.17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미국을 기독교 국가라고 말합니다. 작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의 74%가 자신의 종교를 기독교라고 밝힌 것을 보면 맞는 말입니다. 물론 1970년대의 90% 이상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지만 여전히 다른 종교에 비해서 기독교인이 주류입니다. 미국에서 경계하는 무슬림은 미국 전체 인구의 1%도 안 됩니다. 날씨가 좋고 즐길 것이 많아서 주일이 되면 교회에 가지 않고 이곳 저곳으로 놀러 간다는 캘리포니아도 주일 예배출석률이 30%에 가깝습니다.

 

물론 세대별로 자세히 조사하면, 청년층의 기독교 인구 비율이나 교회 출석률은 급격히 떨어질 것입니다. 다른 종교의 비율은 여전히 낮아도 종교가 없는 젊은이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미국은 기독교가 주류 종교임이 틀림없습니다. 자신의 종교가 기독교라고 말하고, 기독교 용어를 쓰고, 기독교인으로 행동해도 이상하게 볼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베드로전서의 배경인 소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정반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인 회당에는 모세 율법을 믿는 유대인들이 주류였습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신전을 출입하는 다른 종교의 비율이 기독교보다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것은 그들의 종교는 물론 삶의 터전이 무너질 수 있는 모험이었습니다.

 

그래도 소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수 있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믿었기에 순교를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은 성도들이 이런 신앙에 뿌리를 내렸고, 그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전서에는 “고난”이라는 주제가 겹쳐서 나옵니다. 의를 위하여(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축복이라고 알려줍니다 (3:14).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도 배웠습니다(3:17). 이처럼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말 그대로 고난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앙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소아시아의 흩어진 나그네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확실히 믿었음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기 원하십니다. 앞서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닦아 놓으셨기에 우리도 그 길을 넉넉히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은 인생길을 걷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