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4) : 빛의 자녀들 2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시리라(Christ will shine upon you)”-에베소서 5장 14절 말씀이 지난 주일 내내 생각났습니다. 우리 지역에 비가 오지 않아서 걱정이지만, 대신에 한 낮에 밖에 나가면 따가운 태양 빛이 온몸을 내리 쮭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캘리포니아의 햇볕입니다. 그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비추신다는 지난 주일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니 어둠이 빛이 되었습니다. 이제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지난 시간에 배운 빛의 열매들입니다. 세 가지 열매가 우리 신앙과 삶에 있다면 우리로 인해서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으면서 빛의 자녀로 사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이면서 세상을 밝히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시기에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있을 때 참빛되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외인(outsider)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엡2:19).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자동으로 편입된 것입니다. 빛은 혼자 있을 때보다 모여 있을 때 더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라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워 놓으신 하나님 나라 공동체입니다. 빛의 자녀들의 모임이기에 교회에 힘이 있습니다.

공동체 속한 빛의 자녀들은 몇 가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는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12절에서 교회에 여러 가지 직분을 두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을 배우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敎會)는 말 그대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 즉 학습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봉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속에서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봉사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적합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빛의 자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입니다.

이렇게 배우고 봉사하고 교회를 세우면서 온전한 신앙을 가질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장성한 신앙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으면 봉사의 일을 하기 힘들고 쉽게 지칩니다. 어린아이 신앙을 갖고 있으면 사람의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빠지기 쉽고, 세상 풍조에 밀려서 신앙과 삶이 요동칩니다 (14절). 장성한 신앙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합니다(15절). 참된 것만 행한다면 옳고 그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인색한 신앙이 되기 쉽고 자칫 남을 판단하다가 자신은 물론 공동체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참과 거짓은 분별해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사랑으로 감싸야 합니다. 이렇게 진실함과 사랑을 겸비할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각 마디가 도움을 주고받을 정도의 친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의 참된 모습입니다. -河-

에베소서 (13) : 빛의 자녀들 1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걸작품으로 지으셨고, 우리가 행하고 걸어가야 할 선한 일들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그런데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말씀에 발이 묶여서 미리 예정해 놓으신 특정한 선한 일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한 일을 특정 직업 또는 어떤 일에 한정해 놓아서 범하는 실수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사람들과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일입니다. 일을 하는 당사자에게 기쁨과 감사가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선한 일을 찾기 보다 우리가 하는 일을 선한 일로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는 말씀도 나눴습니다. 참빛 식구들께서 하시는 일들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들로 승화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시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현재 추진하고 있는 고국의 소년 소녀 가장 초청 프로그램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명으로 헌금해 주신 성도님들의 선한 마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원래는 우리가 매월 돕는 초록우산을 통해서 초청하려고 했지만 행정적인 이유가 생겨서 서로 양해하고 다른 채널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지혜롭게 중재해 주시고 소통해 주신 담당 권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초청팀과 기획 위원들이 논의 한 결과 한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신청서를 받고 우리가 직접 프로그램에 적합한 청년들을 선발해서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교회 초청팀에서 신청서도 준비하고 프로그램에 대한 소개의 글도 준비해서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 신청서를 보냈습니다. 어떤 청년들이 초청에 응할지 기대가 되고 저절로 기도가 나옵니다.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함께 기도하면서 선발 과정을 지켜보고 청년들을 맞을 준비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학업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청년들을 우리 교회가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계획 중인 초청 일자는 2016년 1월 마지막 주입니다. 우리 교회가 추진하는 소년소녀 초청 프로그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고국의 어려운 젊은이들을 섬기는 선한 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앞으로 3주 동안은 <빛의 자녀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게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알려주는 빛의 자녀들의 성품과 삶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할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선포합니다. 빛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상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로 구원받음으로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세 가지 빛의 열매를 소개합니다. ”모든 착함, 의로움, 진실함”입니다. 빛의 자녀는 선한 마음을 갖고 선하게 삽니다.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바른길을 걸어갑니다. 무엇보다 진실해야 합니다. 참빛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춰 주십니다. 주님의 빛을 세상에 그대로 비추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정직

좋은 아침입니다.

1.

기업가 정신 가운데 하나가

정직입니다.

성공적인 기업이라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경제행위를 통해서 이익을 내고

더 나아가 소비자를 속이는 행위를 했다면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요즘 독일의 자동차 회사 폭스 바겐이

배기가스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엔진에 고성능 소프트 웨어를 설치해 놓은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미국의 높은 환경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디젤 엔진에 몰래 소프트 웨어를 설치해서

슬쩍 검사를 통과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법을 속인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소비자들을 속였습니다.

천문학적인 리콜비용과 보상액이 예상되는데

사회적 책임을 가진 기업으로 당연히 지불해야 할 대가입니다.

2.

요즘 수요예배에서 읽고 있는

구약성경의 잠언에서는

‘정직’을 무척 강조합니다.

공평한 추, 공의, 바른 판단

– 정직과 관련된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정직은 솔직함입니다.

잘못한 것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니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입니다.

이번 폭스 바겐의 경우

처음에는 사장이 나서서 발 뼘을 하다가 일이 더 커졌습니다.

검사하는 기준은 물론 소비자까지 속였으니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속임수를 두고 “패역(거짓사/사기)”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정직은

겉과 속이 같은 것입니다.

겉은 번드르하지만

속이 문제라면 그것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속과 겉은 물론

처음과 끝이 같은 것이 정직입니다.

정직은 끝까지 옳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직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힘들면 힘든대로 벌거벗은 몸으로

감사하면 감사한 대로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정직입니다.

잠언에서 정직에 대한 말씀을 몇 구절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잠11:3)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 (잠11:11)

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잠14:9)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잠23:16)

왕이 가난한 사람을 정직하게 재판하면, 그의 왕위는 길이길이 견고할 것이다.(잠29:14)

3.

10월의 첫째 날입니다.

이제 올해도 세달 남았네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도 많이 있고

마음가짐도 가다듬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정직”을 우리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고,

사람들의 신용까지 얻는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직한 신앙은 맑고, 홀가분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15:8)

The sacrifice of the wicked is an abomination to the LORD, but the prayer of the upright is acceptable to him. (Pro 15:8 ESV)

하나님 아버지,

정직함이 우리들 마음과 행동

그리고 삶 전체에 깊이 뿌리 내리게 하옵소서.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 받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10.1 이-메일 목회서신)

빛의 자녀들

좋은 아침입니다.

1.

제 전화에 교회 전화를 연결해 놓아서

교회로 오는 스팸이 모두 제게 걸려옵니다.

웬만해서는 낯선 전화를 받지 않고

광고 전화의 경우 곧바로 블록을 시켜 놓습니다.

오늘 오후에도 전화가 걸려왔는데

발신지가 Des Moines, IW입니다.

(일단 영어로 쓴 것을 양해주세요)

이곳은 아이오와주의 수도입니다.

작년 아이오와 집회에 갔을 때

내렸던 공항이기도 한데

발음이 매우 어려운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비행기를 타서 조종사의 방송을 듣기까지

당연히 “데스 모이네스”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방송에서 나오는 도착지 정보가 영- 생소한 것입니다.

“데(‘더’가까움) 모-인”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 사람들이 세운 도시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지명이 생겼는데

“수도승들(the monks)”라는 뜻입니다.

프랑스어를 알면 몰라도

Des Moines를

“데 모인”으로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2.

미국에 살다 보면 영어가 큰 골치거리입니다.

살면 살수록 영어가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10년 한인 목회하면서

영어를 쓸 기회가 없으니

영어가 눈에 띄게 퇴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괜찮습니다.

발음이 좋지 않아도

웬만큼 의사소통할 수 있으면 되고

모국어가 아니니 어려운 발음이나 표현이 나오면

그때그때 배워나가면 됩니다.

창피를 당할 때도 종종 있지만

현장을 떠나면서 “씨-익” 웃고 넘어가는 담대함도 필요합니다.

다음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잘 메모해 두면 더 좋고요.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실제로 영어를 못해도

우리는 여전히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발음 여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십니다

(Christ will shine on you).

정말 중요한 것은

빛의 자녀로서

“선하게, 의롭게, 진실되게” 사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맺는 것이지요.

행여나 오늘 지내면서

영어로 인해서

꼭 영어가 아니어도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으셨다면 툭툭 털고 일어나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비추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빛의 자녀이십니다.

우리가 진짜로 부담을 느껴야 할 것은

빛의 자녀로 빛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우리를 비춰주시니

거뜬히 행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5:8-9)

Now you are light in the Lord. Walk as children of light;

for the fruit of light is found in all that is good and right and true.(Eph 5:8-9)

하나님 아버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빛의 자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9.24 이-메일 목회서신)

배려

좋은 아침입니다.

1.

저는 운동경기를 좋아합니다.

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직접 제가 할 수 있는 운동은 줄어갑니다.

(이번 주일에 우리 교회와 스탠포드 연구원들팀과

축구경기가 있는데 잠깐이라도 뛸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설레입니다)

요즘도 짬짬히 운동경기를 시청합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수들에게 관심을 갖게됩니다.

특히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는 야구선수들,

예전에 박찬호, 김병현

요즘은 류현진, 추신수, 강정호등이 엔돌핀을 돌게 하는 한국선수들입니다.

올 해는 피츠버그 강정호선수의 경기를 하이라이트로 챙겨보곤 합니다.

저는 이 선수가 한국에서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는데

피츠버그 팀에 와서 정말 열심히 운동을 해서 신인상 후보까지 거론될 정도입니다.

미국에 진출한 첫 해에 강정호 선수가 운동하는 것을 보면서

미국에 처음 와서 적응하던 생각도 나고

언어나 습관이 다른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던 경험도 떠오르면서

응원을 넘어서 감정이입까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강선수가 무릎을 크게 다쳤습니다.

곧바로 수술을 했고 앞으로 6-8개월의 회복기간이 필요하답니다.

경기 중에 상대방 선수가

심한 태클을 하면서 무릎을 쳤고

그라운드에서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하더니

시즌을 접는 큰 부상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승부를 건 운동경기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상대방을 배려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동업자 정신이라고 하지요.

2.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운동경기 만큼이나 거칠기 이를 데 없습니다.

때로는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 심한 경쟁에 휩쌓이기도 합니다.

승자만이 살아남고 대우받는 사회풍토는 점점 더 경쟁을 부추깁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다보면

채이고, 속고, 손해보고

때로는 몸과 마음이 심하게 다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라면

신사적으로 살아야겠지요.

남을 배려하고, 규칙을 지키고

손해를 보더라도

더불어 함께 사는 상생(相生)을 꿈꿔야 할 겁니다.

지난 주일에 배웠듯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상처받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푸념이 나오고 털썩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야지요.

멈추지 말고 경기장에 들어가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선한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한 주간

이웃을 배려하면서 신사적으로 삽시다.

힘들고 지칠 때는

쿰(히브리어, arise)하고 일어나서

주님 주신 길을 걸어갑시다.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참빛 식구들을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For we are his workmanship, created in Christ Jesus for good works,

which God prepared beforehand, that we should walk in them. (Eph 2:10)

하나님 아버지,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하면서

주님의 길을 걷는 참빛 식구들에게 힘을 주시고

언제나 함께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9.17 이-메일 목회서신)

지혜가 부른다

구약성경은 토라라고 불리는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기록한 역사서, 지혜문학이라고 불리는 성문서와 예언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한가운데 성문서가 위치한 셈입니다. 욥기부터 시작해서 아가서로 끝나는 다섯 권의 성문서들은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기는 선한 사람도 고난 받을 수 있는 세상의 현실을 고발합니다.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과 기도 즉 하나님 백성의 예배입니다.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나머지 세 책은 하나님 백성들이 걸어가는 인생 여정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이 젊었을 때 기록했다는 아가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지 알려줍니다. 전도서는 노년의 솔로몬이 지나온 인생을 조망하면서 젊었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충고합니다. 아등바등 힘들게 살아봐야 인생사가 도찐개찐이고 헛될 뿐이니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을 누리면서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려다보면서 작은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큰 걸음으로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가장 지혜로울 때 기록했다고 전해지는 잠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입니다.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마’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를 넘어서 삶 속에서 요청되는 재능 또는 기술까지 포함합니다. 잠언의 지혜가 매우 실용적임을 뜻합니다. 잠언 속에는 현실의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들로 가득합니다. 손이 게으르면 가난이 밀려옵니다. 입술을 지키지 못하고 함부로 험담하거나 필요 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속이는 저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지만 공정한 추는 기뻐하십니다. 이처럼 잠언은 구절마다 독립적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한두 구절을 따로 떼어서 읽어도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원래 고대 근동의 잠언 또는 지혜 교육은 왕궁에서 이뤄졌습니다. 왕을 비롯해서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이 유명한 지혜 교사를 모셔서 과외를 받는 식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잠언은 교육의 자리를 가정으로 옮겨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잠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사람처럼 의인화된 지혜가 서민들이 사는 시장통에서 그들을 부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잠언의 마지막 장은 현숙한 여인으로 끝이 납니다. 가부장적인 고대시대에 여인의 삶을 높이 평가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잠언속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크마’도 여성명사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의 잠언은 특정 계층을 향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지혜로 초대합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 잠언의 묘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잠언 말씀은 통쾌합니다. 욥기를 읽으면서 가졌던 애매함이 잠언에 오면 모두 풀어집니다.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면서 악인에게는 화가 임하고 의인에게는 복이 임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인과응보의 신앙입니다. 신앙의 길을 단순하게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현재는 복잡해 보여도 끝이 있다는 종말론적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잠언은 또한 세상의 삶을 긍정합니다. 재물을 갖고 친구를 사귀랍니다. 재물이 많으면 아무래도 세상에서 편하게 살 수 있고 그것 역시 복이라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지나친 부는 도리어 화가 됩니다. 말을 절제하고 좋은 사람을 사귀고, 부지런히 일하면 살맛 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라면 세상 속에서도 멋지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구약 성경 잠언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나 기도에 대한 교훈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장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빗장을 단단히 걸어놓고 시작합니다. 잠언말씀이 실제적이고 때로는 현세적으로 보여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들의 거룩한 삶입니다. 잠언의 지혜가 우리를 부릅니다. 올가을에는 잠언 말씀을 차근차근 묵상하면서 하늘의 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5년 9월 24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무더위와 게으름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는 꽤 덥습니다.

샌프란도 90도를 넘어서고

제가 사는 지역이나 내륙은 세자리 숫자를 찍었습니다.

대개 9월에 인디안 썸머가 오곤 하는데

올해는 더위가 일찍 찾아 왔습니다.

이 더위가 비를 몰고 와서

가뭄이 해갈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2.

저는 날씨가 더운데다

최근에 찾아 온 어지러움증을 다스리느라

쉬었더니 무척 게을러졌습니다.

달리 치료책이 없으니

쉬면서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고

가능한 외부활동을 자제했습니다.

어느 한 곳에 집중하면 어지러움증이 다시 찾아와서

일상적인 예배준비를 하는 것 외에 휴식을 취했습니다.

덕분에 이제 많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온 더위와

쉬면서 은근히 습관이 된 게으름이 겹쳐서

삶의 리듬이 깨졌습니다.

그러니

금방 몸과 마음이 둔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말입니다.

얼른 툭툭 털고 일어서야겠습니다.

3.

청년들이

미로슬라브 볼프가 쓴

<광장에 선 기독교>를 읽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독교가 힘을 쓰지 못하고

신뢰를 잃어버린 시대에

기독교 신앙의 바른 모습을 제시해 주는 매우 좋은 책입니다.

책 첫 머리에

기독교 신앙을

“예언적인 신앙”과 “신비적 신앙”으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신비적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반면에 예언적 신앙은 세상에 참여하려는

이웃사랑을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볼프 교수는 현재 기독교에

두 가지 신앙이 모두 고장이 났다고 진단하면서

기독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제대로/균형있게 실천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더위를 먹고 쩔쩔매고 있는 기독교 아니 교회가

다시 새롭게 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힘차게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아닌우리들 각자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3.

이제 저도 어지러움증을 잘 조절하면서

다시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무더워도

하나님 사랑 속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신비로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이웃들에게 크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맛나는 세상을 꿈꿔야겠습니다.

우리 참빛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과 함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요한 7:37-38)

If anyone thirsts, let him come to me and drink. Whoever believes in me, as the Scripture has said,

Out of his heart will flow rivers of living water.”(John 7:37)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세상이 가물고 무더위가 찾아와도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넘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9.10 이-메일 목회서신)

뿌리깊은 나무

좋은 아침입니다.

1.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올겨울에 엘니뇨 현상으로 비가 많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이제 건기의 막바지에 다다르니

온 세상이 황금빛으로 변했습니다.

교회 앞 작은 화단에도

권사님께서 유도화 묘목을 열개 남짓 심으셨는데

한 개만 남고 여름 내내 모두 말라서 죽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물을 주건만 태부족입니다.

아침마다 꽃들과 나무들이

물을 달라고 고개를 쑥- 내밀고 있는 듯해서 미안하지만

얼른 우기가 돌아오길 바랄 뿐입니다.

2.

거의 반년 가까이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우리 지역의 특성인데

가만히 지켜보니

예쁜 꽃나무들이 가뭄에 가장 약합니다.

잡초들은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예상외로 가뭄을 잘 견디는 것들은

길가의 큰 나무들입니다.

집채만 한 나무들이

파란 잎사귀를 그대로 간직한 채 위용을 자랑합니다.

높이 솟은 종려나무들도

꼭대기까지 어떻게 수분을 공급하는 지

기운은 없어 보여도 여름 내내 잘 견디고 있습니다.

아마도

뿌리를 깊이 내려서

땅 속 물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커다란 덩치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3.

가뭄을 견뎌내는 큰 나무들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배웠던

바울의 기도도 생각났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엡3:17)

so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through faith—that you,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Eph 3:17)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들이 꿋꿋하게 가뭄을 견디듯이

뿌리를 깊이 내린 신앙과 삶은 어떤 어려움도 잘 견뎌낼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뿌리를 깊이 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라면

모든 것을 덮을 수 있고, 견딜 수 있고,

예수님과 더불어 독수리처럼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진리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굳게 잡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9월과 더불어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과 진리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남은 한 해를 은혜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터를 넓게 그리고 깊이 잡고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신앙과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한2서 1장 3절)

Grace, mercy, and peace will be with us, from God the Father and from Jesus Christ the Father’s Son, in truth and love. (2John 1:3)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의 신앙과 삶이

넓게 터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려서

예수님을 닮기까지 높이 자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9.3 이-메일 목회서신)

에베소서 (12) : 최고의 선물 3

은혜로 삽니다” –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말은 언제나 맞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무슨 일을 해 볼 수 있을지 싶으면 어디서 인지 불청객이 들이닥쳐서 애써 쌓아놓은 공든 탑을 무너뜨립니다.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하고 있을 뿐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입니다.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아주 커다란 바위가 앞 길을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돌아가자니 해가 이미 저물고 바위를 지나쳐 가야 하는데 역부족입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은혜로 삽니다.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수요예배에서 함께 읽고 있는 잠언에서는 부지런함과 성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교훈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면 부지런히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힘을 발합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지만 은혜라는 하나님의 선물 꾸러미를 가슴에 품고 삽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줄과 같습니다. 은혜로 호흡하고, 은혜로 걷고 달려갑니다. 은혜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행복합니다. 평안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생동감 넘치는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의 일을 예비하고 그 일을 하도록 인도하신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선한 일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선한 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예배와 일을 같은 단어(“아보다”)로 표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도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기도할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해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고 부르심의 목적을 발견하기를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삶 한가운데서 부르십니다. 직장은 물론,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 취미와 여가생활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선한 일들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선해 보이지 않아서 속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우리를 죄로부터 부르셔서 의인으로 삼으셨습니다. 대단한 변화인데 그것을 구속(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세상 일들을 선한 일로 구속(redemption)시킬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창조 사역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선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우리 안에 이미 은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걸작품으로 지으셨고 우리의 일을 예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힘차게 주님의 일을 행할 뿐입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

“기도할게요”

우리들 삶은 물론 신앙생활에서 형식에 치우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신앙이 형식화되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자랑거리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하시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예로 드셨습니다.이들은 늘 따로 서서 기도했고 자신들이 행하는 신앙의 행위를 자랑했습니다.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기도 가운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해서 기도했으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행위일 뿐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도 들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당시에 세리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로서 백성들로부터 눈총을 받던 계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했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적으로 뛰어났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낙인찍혔던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신앙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무엇보다 신앙이 형식화되면 겉만 번드르할 뿐 핵심이 사라집니다. 위선적인 신앙은 겉과 속이 다르니 회칠한 무덤처럼 역겨움이 밀려옵니다. 동시에 신앙이 습관화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우리의 신앙은 무엇이든지 소중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진실성이 담겨있어야 합니다. 대충 넘어가거나 겉으로만 잘하고 있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이처럼 신앙이 형식으로 흐르고 습관이 되는 예 가운데 하나가 기도해 준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이웃사랑입니다. 당사자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서 같은 심정으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수많은 훈련을 통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기도해 주겠다는 말을 남발합니다. 아마 교회 안에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 “기도할게요”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나서 마지막에는 기도해 주겠다고 마무리합니다. 메일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낼 때도 기도한다는 말을 관용구처럼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기도해 주고 있는 지는 하나님과 자신만이 알뿐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임에서는 기도제목을 나누는 일이 일상입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의 기도제목을 꼼꼼히 적습니다. 어떤 분들은 적당히 듣고 넘깁니다. 최악의 경우는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뒷공론을 하거나 구설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럴 것이면 기도제목을 나누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모임에서 나눈 기도제목을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주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요? 기도제목을 나누는 것이 교회 모임의 한 순서로 전락해서 형식화되지 않았는지 한번쯤 돌아볼 일입니다.

제가 만난 어떤 집사님은 이웃을 위한 기도제목을 두꺼운 파일로 만들어서 늘 갖고 다니셨습니다. 새벽마다 또는 자신의 기도시간에 손수 적어 내려간 또는 부탁 받은 기도제목을 놓고 하나님 앞에서 실제로 기도하셨습니다. 이달 초 한 모임에서 강사로 나선 목사님께서는 백여 명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되는지 간증하시면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해서 실제로 기도할 수 있는 숫자가 곧 그가 섬길 수 있는 교회 숫자의 최대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만큼 이웃을 위한 기도가 고귀하고 “기도할게요”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가 크다는 것입니다.

“기도할게요”라고 말하고 실제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커다란 위선입니다.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함께 기도제목을 나눈 이웃을 무시하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차라리 그럴 것이면 기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신앙이 형식화되고 상투적으로 변하면 복음의 능력을 상실합니다. 신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무엇보다 “기도할게요”라는 말에 책임지는 우리가 되기 원합니다.(2015년 8월 27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