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베이지역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참 좋습니다.

 

올겨울에는 엘니뇨의 영향으로

비가 충분히 왔기에

어느 해보다 만물에 생기가 돕니다.

 

아기 손처럼 연두색으로 나온 새싹들을

손끝으로 만져보면 촉촉한 생명의 기운을 느낍니다.

 

저는 사계절 가운데

봄을 참 좋아합니다.

 

겨울잠을 깨고

새싹이 돋고, 새잎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살아 있었구나”라는 탄성과 함께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봄은

부활의 계절입니다.

 

낮과 밤이 같다는 춘분(春分)이 지나고

첫 번째 보름까지 지난 후에

맞이하는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창문 틈으로

맑은 밤하늘에 반을 조금 넘긴 달님이 보입니다.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봄이 주는 축복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부활절이 봄에 있다는 것이

커다란 은혜입니다.

 

3.

늘 그렇듯이

분주한 일상에 빠져있으면

봄이 우리 곁을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 잠시 시간을 내서

베이지역의 봄을 만끽하시면 어떨까요?

 

봄 길을 걸으면서

자연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느끼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입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저는 이 시를 읽으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봄길을 걸으시는

참빛 식구들을 눈에 그려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You mak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in your presence there is fullness of joy;

at your right hand are pleasures forevermore. (Psalms 16:11)

 

하나님 아버지,

봄 길을 걸으면서

부활의 주님을 묵상하고

우리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17 이-메일 목회 서신)

마음 전쟁

작년에는 캘리포니아에 심각한 가뭄이 찾아와서 주지사까지 나서서 물 절약을 권유하고 물을 낭비하면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법규가 발표되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연일 가뭄으로 말라가는 캘리포니아 내륙의 모습을 방영했습니다. 고속도로에는 가뭄이 심각하니 물을 아껴야 한다는 게시판들이 곳곳에 세워졌습니다. 하도 심각하게 염려를 하니 비를 내려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엘니뇨가 찾아온 올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립니다. 지난 십여 일 비바람이 치는 폭우까지 내리고 덕분에 가뭄이 많이 해갈될 것 같습니다. 가뭄이 들 때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올겨울에는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인간의 예측이 자연현상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일이 힘들 때는 다시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잠잠히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온다는 것도 자연을 통해서 배웁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했듯이, 어려움이 찾아오면 신앙 안에서 견디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소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도 다시금 되새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찾아오면 지나치게 극단적인 생각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심을 믿고 꿋꿋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순절 막바지에 마음을 살피는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신앙과 삶을 바르게 정돈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기 원합니다. 우리 마음은 말 그대로 전쟁터입니다.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울 때가 그리 많지 않고 맞바람이 치고 성난 파도가 이는 거친 바다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애써 평안함을 추구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우리 안에 두 가지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마음속에 악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행동은 악으로 치달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악을 몰아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악을 다른 말로 죄라고 설명합니다. 죄는 사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탄이 우리 안에 죄라는 세력으로 찾아와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각을 심어주고, 선한 마음과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즉 사탄의 방해는 어느 곳에나 침투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인 사탄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 활동하고,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계명은 선한 것인데, 여기에도 침투해서 갈등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세상의 모습을 설명하는 성경적 방식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리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싸우는 것을 두고 비참하다고 고백합니다. 악한 세력의 활동을 몰아내는 것을 두고 고민합니다.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롬8:1-2). 우리에게도 마음의 전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마음을 다스림은 물론 맑은 영혼으로 부활의 주님을 맞기 원합니다. -河-

사는 동안에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이틀 동안,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AI) 컴퓨터 프로그램 알파고와

지난 10여 년 정상을 지켜온 한국의 이세돌 9단과의 바둑 시합이 있었습니다.

예상을 뒤엎고

알파고가 두 번 모두

대국에서 승리했습니다.

더욱 속상한 것은

앞으로 남은 세 번의 대국에서도

이세돌 구단이 승리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입니다.

두 번 모두 패하면서

이번 대국 자체에 대한 반론이 여기저기서 제기됩니다.

거대자본 구글이 지원하고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바둑의 기보를 학습시킨 알파고를

이세돌 구단 혼자서 대항하는 것은 불공평한 게임이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알파고(Alpha-Go)라는 이름대로

이제 “첫 번째로 시작하는 바둑”이라면

앞으로 어떤 인공지능의 시대가 펼쳐질지

솔직히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오듯이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 같아 염려되고,

앞으로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의료는 물론 지구환경과

세계평화의 해법을 찾을 수 있다니 기대도 됩니다.

2.

호기심에

국내외 기사를 검색해보니

아직은 그리 위험할 단계는 아니랍니다.

게다가

기계는 사람이 장착해준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결국 그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의적인 의도나 목적을 갖고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만드는 것은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일을 로봇이 대신하게 되면

사람들의 일자리가 급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청년 실업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데

로봇까지 뛰어들어서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을 고스란히 로봇의 주인들인 초대형 회사들이 가져간다면

서민들의 삶은 한없이 피폐해 질것입니다.

직업윤리는 물론

부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원칙들도 세워놓아야겠습니다.

이런 일에도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을 선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많은 묘책을 만들어낼 수 있겠네요.

3.

어제 수요예배에서 전도서 3장을 읽었습니다.

만사에 때가 있으니 때에 적합하게 행동해야 하고

세상일은 수고의 연속임을 인정하고

현재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고

주어진 삶에 충실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전도서 3장 1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전 3:12)

I perceived that there is nothing better for them than to be joyful and to do good as long as they live;

(Ecclesiastes 3;12)

앞으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악이 아니라 선을 베푸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간직하고 (be joyful)

선을 베풀면서 (do good)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본분임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급하게 변하는 세상에 살지만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꼭 붙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10 이-메일 목회 서신)

유혹 – 무너뜨림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특별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의 커다란 주제는 <마음 전쟁>이라는 찰스 스탠리 목사님의 저서에서 가져왔습니다. 3년 전에 존 스토트 목사님의 <새>라는 책을 갖고 말씀을 나눴던 것과 비슷한 형식입니다. 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저 자신의 묵상과 우리 교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설교가 구성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신앙과 삶을 단지 이 세상에 제한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하는 세상살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죽음 이후의 세상은 말 그대로 육신의 장막을 벗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영적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영적인 문제에 직면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도 뱀으로 가장하고 나타난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은 아담과 이브 이전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정확히 알려주지 않지만 사단의 기원은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서 시작한다고 전통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수종 들던 천상의 존재이니 인간보다 앞서 있는 것은 당연하고,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갔고, 그 이후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치시는 말씀이기에 영적인 세력인 사단의 활동이 뜸합니다. 또한 구약성경의 사탄은 신약성경에서 알려주는 사탄에 비해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악한 세력의 유혹으로 규정합니다.

 

신약성경의 사탄은 구약성경보다 강력한 힘을 행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대적하는 영적인 세력을 알고 계셨고 그들을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public life)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 계실 때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마귀” “사탄” “악한 영” “공중권세 잡은 자”등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인 세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대적하셨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는 등 사탄을 완전히 제압하셨습니다.

 

사도바울과 복음서 이후의 말씀에도 사탄의 활동이 나옵니다. 특히 바울은 마귀를 공중권세 잡은 영적인 세력으로 설명했고 우는 사자처럼 먹잇감을 찾아 헤맨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게 만들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등을 돌려서 다시금 원수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요.

 

스탠리 목사님은 <마음 전쟁>이라는 책에서 사탄의 활동을 우리 실생활과 연결합니다. 사탄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예를 들어서 알려주십니다. 사탄의 유혹과 활동이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까지 지나칠 정도로 사탄의 활동과 연결하는 것은 조심할 일이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영적인 분별력을 갖추고 신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무장하길 원합니다. -河-

영감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대학 농구 지역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ESPN과 인터뷰하면서

두 가지 인상 깊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은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즌 초에 약팀에게 지면서

코치는 물론 선수들까지 싸잡아서 비난을 받았지만

팀이 점점 좋아지더니

결국 훌륭한 성적으로 우승했습니다.

팀이 잘 준비되어서 우승까지 왔다고

선수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잘 준비해 놓으면

언젠가 열매가 있겠지요.

열매가 없어도

최선을 다했으니 자신에게 아쉬움이 적을 것입니다.

둘째는,

코치가 자신에게 아주 큰 영감(huge inspiration)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포지션별로 경기를 철저하게 분석했고

코트 안에 들어가면 자신 있게 경기할 수 있도록 격려했으며

무엇보다 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이 크게 들렸습니다.

동시에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욥기가 생각났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던 욥은

친구들로부터 위로와 영감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욥을 깍아 내렸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영감 또는 친구를 향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가장 아쉽고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2.

성경에서 영감(inspiration)은

하나님의 숨결(God-breathed)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숨결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깃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읽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 안에도 들어와 계십니다.

성령 하나님이야말로 “영감”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영감을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그러니 감사할 수밖에요!

3.

인터뷰한 농구선수는

코치가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목사인 제가

참빛 식구들께 영감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가슴설레는 목회가 되겠지요!

저뿐만 아니라

참빛 식구들께서

서로 서로에게 “큰 영감(huge inspiration)”을 주는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정말 훌륭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감은

깊은 기도와 말씀 묵상에서 나옵니다.

아니, 서로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영감이 저절로 임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구합니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하는지라 (열왕기하 2:9)

Elijah said to Elisha, “Ask what I shall do for you, before I am taken from you.” And Elisha said, “Please let there be a double portion of your spirit on me.”(2Kings 2:9)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 위에

성령의 영감이 갑절로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3.3 이-메일 목회 서신)

오히려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부터 새롭게 시작된

6주간 새벽기도회에서

구약성경 욥기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욥과 세 친구들과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적인 이론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엘리바스는

욥이 고난받는 것은 그의 죄 때문이라고 단정합니다.

의인은 절대로 고난받을 수 없다는 자신의 신앙을 고집합니다.

이에 대한 욥의 대답을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욥기 6장입니다.

욥은 자신의 괴로움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훨씬 무겁다고 밝힙니다.

고통이 워낙 심하다보니 자신도 경솔할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라면 위로를 해주어야지

죄를 지적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꾸짖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욥은 지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옆에서 함께 있어줄 동지가 필요하지,

이론적인 훈수나 가르침은 욥도 모두 알고 있고

그런 교훈을 들을 정도로 몸이 편하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욥6:25)

How forceful are upright words!

But what does reproof from you reprove? (Job 6:25)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정죄하고

특히 신앙의 잣대로 판단하는 것은 상처에 초를 붓는 격입니다.

곁에 있어주고

조용히 기도해 주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2.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할 상황인 욥이

6장 10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 6:10)

But it is still my consolation, and I rejoice in unsparing pain,

that I have not denied the words of the Holy One. (Job 6:10)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히려”라는 표현 앞에서 한 참을 멈췄습니다.

지금 욥은 위로를 받을 상황이 아닌데

고난이 그에게 “오히려” 위로가 되고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물론 욥기가 진행되면서 욥도 사람인지라

감정의 기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

“오히려”라는 말씀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신앙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여러가지 일들이 생깁니다.

특별히 힘든 상황이 펼쳐지거나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을 때,

“오히려”라는 말씀이 우리들 안에서도 작동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번,

현재 여러분들 상황에

“오히려”를 대입해 보시고

그 속에서 위로와 기쁨이 임하는 경험을 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하나님 아버지,

참빛 식구들께

“오히려”의 말씀이 임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위로받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2.25 이-메일 목회 서신)

욥기가 없었더라면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

구약성경 욥기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새벽마다 한장씩 읽어온 것이

욥기까지 왔으니

보슬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구약성경의 욥기는

구약 전체의 메시지에서 옆으로 살짝 비껴 서 있습니다.

모세오경 특히 신명기로 대표되는 구약성경에서는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이 주류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살고

의인에 길에 서 있으면

하늘의 복이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죄인의 길로 가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명쾌하지만

우리네 인생이나 어그러진 세상을 설명하기에는

조금 단순할 수 있습니다.

2.

욥기로 오면

상황이 바뀝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부유했습니다.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신명기 말씀 대로 축복받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난이 닥쳤습니다.

자녀들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지고,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야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예배했고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하나님과 사단이 내기를 하신 겁니다.

사단은 욥이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을 경외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까닭없이” 즉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욥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을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표선수로 욥을 택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 말씀대로 잘 버텼습니다.

하나님의 믿음과 욥의 믿음이 만난 것입니다.

3.

욥기의 진수는 3장부터 이어지는

욥과 친구들의 논쟁입니다.

친구들의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과응보입니다.

욥이 죄를 지어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 신앙에 익숙하면

욥기를 읽으면서

친구들의 말에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욥은

까닭없이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의인의 고난입니다.

욥은 차근차근

또 때로는 감정에 격해서

친구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합니다.

고난 가운데 있던 욥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욥기가 마무리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오셨습니다.

폭풍 속에서 임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이심을 밝히십니다.

욥은 재를 뒤짚어쓰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I had heard of you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y eye sees you. (Job 42:5)

욥은

까닭없는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4.

욥기는 어렵고 생소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약성경의 주류 메시지에서 빗겨 있습니다.

하지만

욥기는 우리 인생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닥치는 고난을 두고 고민하게 만들고,

하나님 백성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지 알려줍니다.

의인도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까닭없이 고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을 허락하시고

욥처럼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눈으로 보길 원하십니다.

신앙의 길은 고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까닭없는 고난도 받아 들이고

고난 속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깨닫고

고난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욥기를 읽으면서

귀로만 듣던 말씀이

눈으로 보게 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아주 깊은 신앙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지 못하시지만

사순절을 보내면서

욥기 말씀을 (쉬운 성경으로) 차근차근 읽으시고 묵상하시면서

신앙과 삶을 욥기에 비춰서 재조정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5)

I had heard of you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y eye sees you. (Job 42:5)

하나님 아버지,

사순절을 보내는 참빛 식구들께서

욥이 만났던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6.2.18 이-메일 목회 서신)

화평케 하는 자

세상이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은 올해 말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각 당 후보들이 제각기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예비선거를 치르고 있습니다. 후보마다 공약이 제각각입니다. 만약에 그들의 약속이 한꺼번에 지켜진다면 미국은 산으로 갈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요즘 시대는 올바른 가치 기준 없이 너도나도 옳다고 말하는 상대주의가 대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구원과 같은 거대담론이라고 불리는 크고 중요한 주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개인이나 각 단체의 이해관계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와 내 편만이 존재할 뿐 우리라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정겨운 모습과 민족이나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 온 백성이 단합하는 일보다는 갈등과 분열이 앞선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도 관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부관계는 물론이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쉽게 허물어집니다. 희생과 섬김의 동지의식보다 이기주의가 앞서고 강자가 약자를 무시하는 험악한 시대로 변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단절은 세상은 물론 개인의 삶이 메말라갑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편안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마음은 사막처럼 갈라지고 황폐해지니 왠지 모르게 서글퍼질 때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관계의 단절이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에덴에서 쫓겨난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아담과 이브, 자연 만물과의 관계가 망가졌습니다. 죄의 결과인 셈입니다. 또한 이브가 사단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으니 사단의 계략에 넘어간 것입니다. 관계가 단절된 세상은 “탄식(groaning)”뿐입니다. 틈이 점점 벌어집니다.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없을 만큼 연약했을 때, 하나님을 떠나서 경건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을 때, 죄인 되었을 때,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와서 그의 사랑을 힘입고,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그 사랑 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peace maker)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갈등과 혼란에 가슴 아파하면서 그곳에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과 나누는 것입니다. 양보하고, 희생하고, 섬기고 무엇보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자 특권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로 사시는 참빛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아비가일

인생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부모님과 가족들, 나이가 들면서 가까워진 친지들과 이웃들, 그리고 우리를 가르쳐주신 선생님들과 어르신들과의 만남이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돕는 배필 즉 배우자와의 만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모든 만남이 복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좋았던 기억들을 간직하고 좋은 만남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다윗에게도 좋은 만남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과의 만남이 눈에 띕니다. 아비가일의 이름이 “나의 아버지는 기쁨입니다”라는 뜻이니, 웃음이 떠나지 않는 가정에서 곱고 예쁘게 자랐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아비가일을 두고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아비가일은 고집이 세고 포악한 남편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녀의 남편 이름이 나발인데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이 부유한 목축업자였다는 사실 외에 달리 좋을 것이 없어보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광야생활을 하고 있을 때 먹을 것이 필요했습니다.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잔치를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먹거리를 요청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들에서 나발의 가축들과 목자들을 지켜준 일이 있었기에 나발이 자신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고 고약한 마음씨의 나발은 다윗을 비난하면서 다윗이 보낸 사람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400명의 군사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발을 치러 올라갑니다. 다윗은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인물입니다. 나발이 괘씸할 수는 있어도 광야에 사는 일개 목축업자에게 그렇게까지 흥분해서 힘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도 별것 아닌 사람이 자신을 비난하거나 작은 일로 자존심이 상하면 참지 못하고 발끈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때 나발의 부인 아비가일이 음식을 갖고 다윗을 만나러 옵니다. 여인 혼자서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자기 집으로 쳐들어오는 다윗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애원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는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생명 보자기”로 싸서 보호해 주실 테니 먹거리가 없어도 또한 자존심이 상해도 함부로 칼을 들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다윗이 물 맷돌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렸듯이, 하나님께서 물 맷돌로 다윗의 원수들을 쓰러뜨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한 명연설이었습니다. 다윗이 군사를 데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은 자신의 가정을 살렸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사소한 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지혜롭게 조언했습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러 가는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숨어있는 동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울도 살려주었던 다윗이 음식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발과 그의 가족을 전멸시키는 것은 졸장부의 행세입니다. 자칫 큰일을 앞두고 창피한 이력을 남길 수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고귀한 품격을 되찾게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유진 피터슨이라는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아비가일의 아름다움은 다윗을 놀라게 하여 갑작스럽게 빠져 들어갔던 추함에서 그를 구해 내었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된다.”

 

인생길에서 누구를 만나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추한 마음도 아름답고 고귀하게 변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보고 듣게 하는 만남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선하게 변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되찾게 해 줄 만남을 기대합니다. 귀한 만남이 가져올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꿈꾸면서 새봄을 맞고 싶습니다.(2016년 2월 25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