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야곱 (2)

장자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야곱은 장자권을 형에게 빼앗겼다는 마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당시의 장자권은 아버지 재산을 상속받는 권리를 가리켰습니다. 장자에게는 다른 자식들에 비해서 두 몫을 주었으니, 에서는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갖고 에서는 3분의 1만 갖게 됩니다. 자식이 많으면 커다란 차이가 없지만, 야곱과 에서처럼 자식이 둘인 경우 두 배를 갖는 장자의 몫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첫째 아들은 가족을 대표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삭이 늙어서 자식을 축복하려고 할 때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부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형과 싸웠는데 태어나보니 자신은 둘째였고 실제로 형 에서에 비해서 자기 몫이나 권한이 작은 것에 늘 아쉬워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태어나 보니 그 차이가 너무 큰 것입니다.

 

에서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서 사냥에 능숙한 들사람이 됩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했기에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어서 대개  장막에 거주했고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용한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탐>은 흠이 없고 완전하다(integrity)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에게 흠이 없다는 말을 붙이기가 어려워서 조용한(quiet) 사람 또는 단순한(simple) 사람이라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들사람인 에서와 대조해서 온순한 집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야곱과 에서의 성품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야곱이 장막에서 죽을 쑤고 있는데 사냥하느라 기진맥진해서 돌아온 에서가 거의 죽게 되었으니 죽(soup)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우리 성경은 “붉은 것”이라는 표현에서 팥죽이라고 번역했습니다(34절). 또한 붉다는 것은 에서가 태어났을 때 그의 몸이 붉은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훗날 에서의 후손들이 에돔(“붉다)”)이라는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붉은 것”이라는 구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옮기면 “붉은 것, 붉은 것 바로 그것”이 되는데 에서가 허겁지겁 죽을 달라고 부탁하는 행동이 그의 말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서두르는 에서와 달리 야곱은 매우 침착합니다. 에서의 요청을 잠깐 멈추게 하고 “형의 장자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31절)고 형과 거래를 시작합니다. 이 시간을 기다리며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서는 당장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차 그에게 유익을 끼칠 장자의 명분을 무시합니다:“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절). 지금 죽는다면 장자의 명분은 아무 소용이 없으니 에서의 말이 맞지만, 사냥해서 굶어 죽는 법이 없기에 오늘 본문은 에서가 장자권을 가볍게 여겼다고 깔끔하게 정리합니다(34절). 에서는 맹세까지 하면서 장자권을 야곱에게 팝니다.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河-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좋은 아침입니다.

 

1.

주일 예배에서

창세기 야곱에 대한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주일에도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과 이삭에 관한 말씀은 일찍이 함께 나눴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땅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중간에 하나님의 약속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잠시 곁길로 갔지만,

마지막에는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믿음을 선보였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커다란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니, 이삭에 대한 말씀이 짧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 비하면

야곱의 일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합니다.

탄생부터 어린 시절, 결혼과 자녀들,

이집트 피난살이까지 한평생이 성경에 기록된 어쩌면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곱의 희로애락 한 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2.

야곱 속에는 완벽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 있습니다.

 

순종과 실수를 거듭하지만, 믿음의 조상으로 우뚝 선 아브라함이나

큰 어려움 없이 또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삶을 따라 사는 이삭과 달리,

야곱은 물질에도 민감하고,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 비해서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야곱에게 마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이민자로 살았기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는 야곱의 고백도

타향에 와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합니다(창49:7).

 

야곱의 삶을 지탱해 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피나가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노숙할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계시면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깨달음입니다.

 

20여 년 외삼촌 집에서 이민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에서가 야곱에게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야곱은 형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족을 얍복강 너머로 건네놓고

한밤중에 야곱 홀로 남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밤새도록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깜깜한 어머니 태중에서 형과 싸우던 야곱이

한밤중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것입니다.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난 야곱이

얍복강에서는 하나님을 꼭 붙들고 복을 주시길 간청합니다.

 

그때 야곱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벧엘과 얍복강은

야곱의 한평생을 버티는 두 기둥이었습니다.

 

3.

우리의 삶도 야곱에 버금가게

힘들고 고달픈 순간의 연속입니다.

모든 삶이 힘들고, 지금 이 순간이 늘 어려운 법입니다.

 

그때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과 얍복강 사건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꿈꾸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걷는

인생과 신앙의 순례길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게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하나님

참빛 식구들을 지키시고 항상 함께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8이-메일 목회 서신)

하나님과 겨루워 이긴 자, 야곱 (1)

야곱의 탄생: 발꿈치를 잡고

 

우리는 야곱의 일생을 살펴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탄생부터 어린 시절을 거쳐서 인생의 모든 여정과 죽음까지 자세히 기록된 인물은 야곱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걸었던 인생길을 천천히 되짚어가고 함께 걸어갈 예정입니다.

 

야곱에 대한 말씀은 크게 셋으로 나뉩니다. 형 에서와 장자권을 갖고 벌이는 경쟁,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속고 속이는 피난살이, 가나안 땅에 돌아와서 겪는 고초까지 나중에 야곱 자신이 말하듯이 그의 인생은 절대 평탄치 않았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47:9).

 

야곱의 인생에서 두 가지 큰 경험을 합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갈 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길에서 노숙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릅니다. 외삼촌 집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깊이 그리고 확실하게 경험한 두 가지 사건이 그의 인생길에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습니다.

 

야곱은 타고난 싸움꾼이요 자기 목적을 이루고 마는 집요한 인물입니다. 세속적인 면도 있습니다. 물질에 집착합니다. 도덕적으로 결코 존경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권을 얻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들어서 쓰십니다. 인간이 잘 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심을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우리 역시 야곱처럼 치열하게 세상을 살지만, 결국에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속에서 희망을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태어나는 과정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맞았지만, 20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신의 저주로 여겼습니다. 리브가와 이삭의 마음고생이 컸을 것입니다. 그때 이삭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쌍둥이 아들이었습니다.

 

복중에서 너무 심하게 싸우는 것을 느낀 리브가 역시 하나님께 나와서 “내가 어찌할꼬”라고 탄식합니다. 리브가의 복중에서 두 민족이 싸우고 있답니다. 훗날 이스라엘과 에돔의 갈등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쌍둥이 아들이 태어났는데 야곱이 에서의 발 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야곱에게는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는 별칭을, 몸에 털이 많고 붉은 첫째에게 에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河-

아히도벨

좋은 아침입니다.

 

1.
아침에 함께 묵상하는
사무엘하 본문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밧세바 사건을 전후로 극명하게 나뉩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수도를 삼고
대내외적으로 나라를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기 잘못을 덮으려고 충성스러운 장수 우리아까지
전쟁터에서 죽게 하면서 다윗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밧세바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죽고
다윗 가문에 폭력과 죽음이 끊이지 않더니
결국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윗은 죄의 대가를 치루려고 결심한 듯
자신과 가문에 닥친 어려움을 감당합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밤중에 신하들을 이끌고 피난을 가지만,
차분하게 대처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도 돋보입니다.

 

2.
다윗이 매우 당황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모사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입니다.
다윗이 즉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할 정도로 아히도벨의 배신은 위협적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라는 이름은
무감각한 형제, 냉철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조언으로 당대 최고의 모사꾼이 되었습니다.
아히도벨의 말은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할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으니
다윗이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자기 친구 후새를 예루살렘에 돌려보냅니다.

 

성경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경쟁을 보도합니다.
아히도벨은 기습공격을,
후세는 시간을 갖고 완벽하게 준비할 것을 제안하는데
압살롬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기하게도 후세의 손을 들어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알려줍니다.

 

자기 계획이 거절된 것을 안 아히도벨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다윗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은 사필귀정의 사건이지만,
하나님 버금갈 정도의 훌륭한 책사였음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3.
감정에 휘달리지 않고 냉철하게 상황을 분별하고 판단하던
아히도벨이 압살롬을 따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잇속이 있었거나,
압살롬의 달콤한 제안에 순간적으로 분별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자기 능력을 믿은 나머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소홀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끝까지 바른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순간의 선택이 생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아히도벨을 반면교사 삼고 배웁니다.

 

우리 앞에도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분별력을 잃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선택,
변치 않는 마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시119:55)

 

하나님
오늘 하루도
믿음 가운데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11이-메일 목회 서신)

너 근심 걱정 말아라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가 382장)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성에 염려(sorge)가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외부에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면, 염려는 우리 존재 안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존재의 불안함입니다. 죽음이 그 끝에 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지막을 의식하면서 불안해하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염려는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염려를 갖고 삽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깃든 염려를 어떻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냅니다. 광야야말로 불안과 두려움,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먹거리에 관한 염려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불안했습니다.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도 염려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셔서 길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시빌라 마틴(Civilla Martin, 1866-1948)과 그의 남편이자 목사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 1862-1935) 부부가 각각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탄생했습니다. 마틴 목사가 시골의 작은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날, 부인이 갑자기 아파서 설교를 취소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아홉 살 먹은 아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설교하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마틴 목사는 설교하러 떠났고, 그사이 부인 시빌라 마틴이 시를 씁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세 가족이 만든 찬송이 바로 <너 근심 걱정 말아라>입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God will take care of you>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데 왜 근심하고 걱정하느냐는 찬송입니다. 매일 같이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서 지키고 돌보실 것이라는 찬송입니다. 아홉 살 먹은 아들의 말을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러 갔던 마틴 목사 부부의 신앙 고백입니다.

 

새달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앞길을 알지 못하니 우리를 지키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존재 한 가운데서 생기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걷는 새달이 되기를 원합니다. -河-

자긍심

좋은 아침입니다.

 

1.
여행 중에
숨은 맛집이라고 소문난 곳을 방문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예쁜 정원까지 꾸몄습니다.
생각보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습니다.

 

주방 너머로 셰프가 보였고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메뉴가 많지 않았기에
우리 일행 네 명은 똑같은 메뉴를 주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셰프가 정색을 하면서
“네 분이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개성이 없으신가요?”
“호기심도 없고 창의력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라며 타박합니다.

 

우리는 서로 매우 친한 사이라고 변명하거나
손님을 마구 대하는 듯한 말투에 화를 낼 여유도 없이
셰프의 기세에 눌려서 각자 다른 메뉴를 주문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음식이 나왔습니다.
셰프가 오더니 반찬부터 메인 메뉴까지
재료, 조리방식, 각 메뉴의 특징까지 상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고급 식당에서 셰프의 안내를 받는 것에 버금가는 환대였습니다.
마음이 환해지고
우리 앞에 차려진 각각의 요리와
대화를 나누는 듯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2.
셰프는 자기가 준비한 요리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칠 것이 없었고 부족한 것 하나도 없이
당당하게 자기 요리를 우리 앞에 내놓은 것입니다.

 

셰프의 설명을 듣고 나니
우리 네 명이 똑같은 음식을 시켰을 때
왜 호기심도 없느냐고 몰아붙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일에 자신감과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모든 일이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 하는 일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일에 자긍심을 갖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그때, 숨어있는 힘까지 발휘되고 호기심을 넘어서 창의력도 생길 것입니다.

 

3.
자신감 넘쳤던 셰프처럼
우리의 자긍심은 퍼져 나갑니다.
더불어 기뻐하게 되고 왠지 모를 힘을 줍니다.

 

오늘 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
우리가 하는 일,
가족, 친지, 교회 등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자긍심을 갖고 살아봅시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얼마나 귀한지
예수님께서 우리의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심에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자긍심으로 세상을 밝히고
사람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수1:9)

 

하나님,
자긍심을 갖고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5. 4이-메일 목회 서신)

어떤 지점

좋은 아침입니다.

 

1.
태풍의 눈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태풍의 중심부에 비와 바람이 외벽을 형성하면서
수십 킬로에 이르는 지역에 평온한 상태가 유지되는 현상입니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저 같은 사람에게는 신비로운 자연현상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태풍 한 가운데에 평온하고 맑은 태풍의 눈이 생긴 단 말입니까?

 

그런데 살다 보면
태풍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안개가 끼인 것처럼 앞길이 뿌옇게 보일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정답이 없는 인생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이나 어느 순간에
앞길이 훤히 보이거나, 문제들을 해결한 묘수가 떠오르거나
자신감과 확신이 생깁니다.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도
태풍의 눈처럼 평안과 소망을 느낍니다.

 

염려와 불안이 밀려옵니다.
실제로 두려운 일이 닥쳤습니다.
도저히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 힘듭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 어떤 지점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이 임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맛보는 순간입니다.

 

2.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늘 맑은 것은 아닙니다.
365일 24시간 확신 가운데 사는 것도 아닙니다.
평소에 믿고 있던 것들에 의심이 생기고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배운 것으로 설명하면
시험에 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시험에 드는 일은 언제나 발생합니다.

 

그런데 어떤 지점 또는 어떤 순간에는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모든 것이 다 믿어지면서
영적인 눈이 활짝 뜨인 것을 경험합니다. 거침이 없습니다.

 

이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할 때마다
신앙이 한 계단 한 계단 도약합니다.

 

3.
이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지점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일을 앞당겨서 경험하는 신비로움입니다.
어려움 한 가운데서 하늘의 평안을 맛보는 지점입니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신앙의 장애물이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이런 순간을 맛보면서
우리는 다시 일어나 주어진 인생길을 갑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지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이
주님 안에서 그 날, 그 순간, 그 지점이길 원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하나님,
빼앗지 못할 평안, 확신, 자신감
넘치는 사랑과 소망을 맛보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 목사 드림.
(2023. 4. 27이-메일 목회 서신)